해제: 저자 피터스는 대영성서공회 한국 총무를 맡고 있던 켄뮤어와 함께 1899년 2월 18일 제물포를 떠나 켈파트(제주) 섬으로 출발했다. 그들의 제주도 방문 기간은 1899년 2월 23일부터 3월 하순까지였으며 서울 귀경 날짜는 3월 25일이었다. 기독일보에서는 2021년 6월부터 7월까지 4회에 걸쳐 ‘피터스의 제주도 탐방기’라는 제목으로 그의 탐방 일기를 연재해 소개한 바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피터스의 글은 그가 제주 탐방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 소감을 쓴 것이다.

개신교 최초 피터스 선교사 제주도 탐방 후기 Ⅰ
개신교 최초 피터스 선교사 제주도 탐방 후기 Ⅱ

1971년 산방굴에서 본 마을과 바다 경관
▲1971년 산방굴에서 본 마을과 바다 경관 ⓒ한국저작권위원회

말과 소는 제주 섬에서 수출하는 매우 중요한 품목이다. 조선말들 중 많은 말이 그곳에서 나온다. 소는 본토의 것에 비할 만큼 크거나 강하지는 않다. 말 한 마리 평균 가격은 16달러이고 황소나 암소의 평균 가격은 25달러이다. 조랑말과 소는 섬 도처에 방목되어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자라가지만 물론 그들의 소유주가 있다. 겨울에 가축들은 밭에서 먹이를 찾아 먹고, 봄에는 여름을 나기 위해 산으로 내몰린다. 밭과 밭 사이에 쌓은 밭담은 조랑말들이 이 밭 저 밭을 드나들며 뛰어다니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양질의 말과 소의 상당 부분은 정부의 소유이며 지방 관리는 그들을 돌보는 목적으로 그곳을 지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방 관리는 정부의 필요에 따라 일정량의 말과 소를 해마다 서울로 올려보내야 했다. 현물세가 폐지된 이후 관리는 이 동물들을 팔아서 거둔 돈을 정부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별다른 감시망이 없으므로 섬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정부 소유의 소나 말을 잡아 이용하는 데 그다지 주저함이 없다.

상거래 수준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고, 사람들의 생활양식 또한 매우 원시적이다. 섬이 고립된 탓에 사람들은 본토인들보다 매우 무지하고 문명화되지 않았다.

본토와 마찬가지로 섬에서도 사람들은 종교가 없다. 3개 성읍9) 각각에 공자 사당이 있다. 각 성읍의 문밖에는 현무암으로 깎아 만든 큰 신상이 6기 또는 8기가 서 있다. 섬의 몇 개의 사당들은 십만여 명의 모든 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는 듯하다. 섬 전체에 불교 사원은 물론 승려가 하나도 없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100여 년 전에 어느 회의적인 현령이 섬의 모든 사찰을 파괴하도록 명령했고, 승려들을 쫓아내라고 했다. 그 이후로 불교는 두 번 다시 이 섬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현령은 그의 무신론으로 인해 처벌받았고, 그는 곧 친척과 친구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이곳 이역만리 섬 제주에서 죽었다.

섬에는 몇 가지 매력적인 경승지가 있다. 대정에서 10리 이내에 이상한 바위산10)이 약 800피트(234m) 높이로 불쑥 솟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의 남측 약 300피트(약 91m) 입구에는 굴이 하나 있는데, 입구는 너비 약 20피트(6m), 길이 20피트(6m), 높이 40피트(12m)이다. 굴의 입구에서 보이는 마을과 바다의 경관은 참으로 웅대하다. 이 굴 안에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사원이 들어서 있었지만, 다른 사원들과 동시에 파괴되었다고 들었다. 대정에서 정의로 가는 도중 30리 지점과 60리 지점엔 2개의 폭포가 있다. 폭 30여 척(9m), 깊이 40여 척(12m)의 바위 지면에 2개의 둥근 바위 구멍에서 쏟아지는 폭포가 있다.

정방폭포
▲정방폭포 ⓒ제주도청
폭포 벽은 거의 수직이고, 2개의 작은 산 계곡물이 그 안으로 떨어진다. 우리가 그것들을 보았을 때, 한 개울은 거의 말라 있었고, 다른 개울은 약간의 물이 있었지만, 장마철에 그들은 멋진 장관을 연출할 것임이 틀림없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언급한 2개의 폭포는 매우 똑같다는 것이다.

한라산(Mt. Auckland)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의 크기와 생김새도 비슷한 바위들이 열병을 짓고 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 그것들은 일련의 사람들이 운집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조선 사람들은 이를 두고 ‘오백 장군(500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의에서 멀지 않은 어느 마을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수년 전에 아주 큰 뱀 한 마리가 그 마을에 살았다. 그 마을은 옛날부터 매년 아리따운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만 했다. 그 뱀은 처녀를 산 채로 잡아먹었다. 만일 처녀를 바치지 않으면, 비가 내리지 않거나 강한 바람이 불거나, 말과 소가 죽고 병마와 다른 재난이 사람들에게 닥친다는 것이다. 약 100년 전에 어느 한 아버지에게 집안의 자랑이자 귀염둥이인 매우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곧 그녀가 희생될 차례가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과 헤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상심하는 대신, 피에 굶주린 저 성가신 놈을 섬에서 없애기로 했다.

그래서 제물을 바치는 날이 오자, 제주 섬의 테세우스11)는 날렵한 도끼를 들고 딸을 제사 장소로 데려갔다.

그는 딸을 거기에 두고, 자신은 멀지 않은 곳에 몸을 숨겼다. 곧 뱀이 나왔지만 뱀이 그 딸에게 다가가기 전에 아버지는 뱀 위에 있었고, 한 번의 타격으로 뱀의 머리가 잘렸다. 그런 다음 그는 뱀을 조각내서 큰 김치 항아리 안에 집어넣고 단단히 덮었다. 사람들은 이제 평화롭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뱀은 사람들의 꿈속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자신의 조각난 몸을 항아리에서 빼 줄 것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엔 심각한 복수를 할 것이라 사람들을 위협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마침내 그들은 뱀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항아리를 비웠을 때 이전의 뱀 조각들 하나하나가 개별 뱀들로 변신하여 온통 뱀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뱀의 초자연적인 힘은 사라졌고, 더 이상 처녀를 회생 제물로 바칠 필요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해마다 그 장소에 돼지, 쌀, 소주 등과 같은 제물을 바치고 있다. 그 의식은 ‘무당들’이 맡고 있다. 물론 무당들은 먹을 것을 차려 뱀들에게 단지 보여줄 뿐이고, 의식이 끝나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잔치를 벌인다. 이 무당들 또는 주술가들은 이 뱀에 얽힌 이야기의 진실을 거침없이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삼성혈을 밟고 선 순사들(1914년경)
▲삼성혈을 밟고 선 순사들(1914년경) ⓒ제주도청
우리는 조선의 유명한 3가문의 시조가 이 섬에서 나왔다고 하는 유명한 삼성혈(3개의 구멍)에 대해 대단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삼성혈과 3명의 영웅이 전설이 될까 봐 두렵다. 왜냐하면 섬에 사는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아는 것 같지 않았다.

제주 섬은 유배지였다. 유배 역사의 마지막 유배객은 약 3년 전(1896년)에 그곳으로 보내졌다. 현재 그곳에는 대부분 정치범인 12명12)의 유배객이 있다. 그들 중 2명이 우리를 보러 왔고 섬에서 원하는 곳은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말했다.13) 그들은 자기 인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귀양살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어떤 조선인도 당국의 허가 없이는 제주 섬을 떠날 수 없다.

섬 일주를 마친 후, 우선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증기선을 수소문하는 것이었다. 배편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들은 바 없었고, 증기선이 올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은 작은 배 삼판선(杉板船) 한 척을 빌리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삼판선은 탁 트인 것으로 길이 약 30피트(9m), 너비 약 10피트(3m) 정도 하는 것이었다. 제주 섬과 조선 해협 부근 첫 번째 섬 사이의 해협의 폭이 40마일(64km)인 해협을 건너려면 순풍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서 뱃사공들은 바람을 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날 저녁, 우리가 잠자리에 들려는 바로 그때, 뱃사공이 와서 지금이 출발하기에 좋은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달랐다. 그날 밤은 춥고 바람이 불며 매우 어두웠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따뜻하고 편한 침대를 걷어차고 짐들을 꾸려 칸막이도 없는 작은 삼판선으로 출발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뱃사공에게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들은 즉시 가자고 우리를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우리는 짐을 꾸려 짐꾼을 고용하고 숙소에서 약 반 마일(800m) 떨어진 곳에 있는 배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는 제주 관습(풍속)이 자정이 지나야지만 배가 출발하고, 그 외 다른 시간은 불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가자고 아무리 설득해도 그들을 떠나게 할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짐 일부를 꾸려서 어부의 오두막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날 오후 비가 오기 시작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북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은 우리가 뱃사공의 제안을 받았을 때 가지 않은 것을 회개할 충분한 시간이 있는 6일 동안 그칠 줄 몰랐다.

1896년경 군산 지방에서 선교사들이 이용하던 돛배. 삼판선 규모가 이와 비슷할 것으로 사료됨
▲1896년경 군산 지방에서 선교사들이 이용하던 돛배. 삼판선 규모가 이와 비슷할 것으로 사료됨 ⓒ전킨선교사 기념사업회
마침내 바람이 잦아들었고, 어느 날 밤 이곳 ‘풍속’에 따라 우리는 3시간도 채 자지 못한 채 새벽 2시에 출항했다. 약 5마일(8km) 정도 항해한 후 동이 트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미미한 아침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뱃사공들은 이 바람이 북쪽에서 왔기 때문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삼판선을 돌릴 태세였다. 그러나 우리 측 또한 마땅한 이유 없이 돌아갈 수 없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해가 뜰 때까지 노를 젓다가 바람이 바뀌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엄하게 말했다.

나의 목소리와 태도가 상당히 단호했는지라, 그들은 다시 노를 잡고 본토로 향했다. 태양이 떠올랐을 때 바람은 동쪽으로 바뀌었고, 우리는 두 개의 돛을 펴고 물결 위를 타고 전진했다. 우리가 한반도를 향해 적당한 속도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즐거웠다. 그러나 우리가 삼판선 위에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그 삼판선은 참으로 작아 보였고,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물결을 따라 위아래로 넘실대니 아무리 줄잡아 말하더라도 우리를 몹시 뱃멀미하게 하였다.

저녁에 우리는 첫 번째 섬에 도착하여 객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우리는 무수한 작은 섬과 섬 사이에서 장엄한 항해를 하고, 삼판선에서 또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정오에 목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3시간 뒤에 제물포로 출발하는 증기선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즉시 우리는 삼판선에서 우리의 짐들을 증기선으로 옮겼다. 다음 날 정오에 우리는 제물포 짐꾼들과 흥정하고 있었다. <끝>

[미주]
9) 1899년 당시 1목 2군 즉, 제주목과 대정군, 정의군을 말한다.
10)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산방산(山房山)과 산방굴사를 말하는데 공식적인 산의 높이는 395미터이다.
11) 테세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다.
12) 김윤식의 제주 유배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따르면 1897년 말 김윤식이 제주에 도착했을 때 제주에는 중앙정치의 격변 과정에서 밀려난 정치인 13명이 유배되어 있었다. 이준용(李坡鎔) 모반사건에 연루된 최형순(崔亨順)이 1895년에, 을미사변 당시 방관한 죄로 서주보(徐周輔), 정병조(鄭丙朝), 김경하(金經夏), 이태황(李台璜), 이범주(李範疇), 김윤식(金允植), 이승오(李承五) 등이 1897년에, 친러정권 전복을 위한 쿠데타에 연루된 김낙영(金洛榮), 김사찬(金思燦), 한선회(韓善會), 이용호(李容鎬), 장윤선(張允善) 등이 1898년 제주로 유배되었다.
13) 함께 모여 시회(詩會)도 즐기며 바둑 독서 등을 하고 본토의 친인척과 비교적 자유롭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들은 1901년의 민난, 소위 이재수난 이후 그해 7월 다음과 같이 다른 섬으로 보내졌다. 김윤식은 지도(智島), 정병조는 위도(蝟島), 김사찬은 임자도(荏子島), 한선회는 추자도(楸子島), 이용호·이범주는 신지도(新智島), 서주보는 여도(呂島), 김경하는 녹도(鹿島), 이태황은 사도(蛇島), 장윤선은 금갑도(禁甲島)에 가게 됐다.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