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어느 때보다도 지금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다. 과거 초대교회 시대보다 더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에도 순교의 두려움은 덜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한밤중에 자기 집에서 사라지고, 신앙을 계속 고집할 경우 친족들이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적대적 군중들에게 맞고 팔다리를 잘리기도 합니다. 선교학자 데이비드 바렛(David B. Barret)은 특히 2000년도 한 해에만 16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들은 폴리갑이 순교한 A.D. 155년이나 페르페투아가 순교한 A.D. 202년과 기본적으로 같은 이유로 죽었습니다.
초기 순교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라!”고 담대하게 고백했고, 또한 유일한 구원자라면 어떤 경쟁자 -어떤 ①인간이나 ②종교나 ③이데올로기나 ④제국- 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적어도 이러한 확신에 대한 확고하고도 기쁨에 찬 헌신이 필요하다고 확언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보여 주시고, 또한 스스로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속으로 오셨습니다. 바로 이분이 역사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예수님이십니다.
‘순교’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을 이해하는 기초입니다. 순교야말로 과거와 현재 기독교의 원색적인 특색과 본질을 부각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다 순교해야 하고 또 순교할 것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교는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모든 사람이 아니라 일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요 선물입니다.
실제로 순교에는 죽음에 대한 자발적 의향이나 갈망보다 더욱 근본적인 어떤 것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죽음인 순교에는 핵심이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현재 서구에 사는 사람들도 순교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자기 신앙 때문에 죽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절대적 충성을 얻으려고 경쟁하는 것들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순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초기 순교자들 -스데반이나 폴리갑과 페르페투아나 다른 많은 사람들- 은 실제로 자기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순교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들 자신이 직접 선택하지는 않았습니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오히려 순교가 마치 명예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순교를 서두르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신실하기를 택했을 뿐이었고, 순교는 다만 그 결과였을 뿐이었습니다. G. K. 체스터턴(Chesterton)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를 언급하며 그가 ‘순교’를 ‘일상의 삶의 방식’으로 전환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지배하려고 위협하는 가짜 신들 -①자아 ②쾌락 ③권력 ④성공- 에 대해 날마다 죽는 법을 끊임없이 배웠던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그분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선물로 받은 진짜 생명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음까지 맞서 장렬하게 죽었던 것입니다. 이런 새 생명의 선물은 그들에게 너무도 귀하고 값진 것이어서 도저히 비밀로서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순교는 과거든 현재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영성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하는 일과는 사실상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영리한 계획에만 의존한다면, 결코 사랑하거나 기도하거나 느끼거나 일하거나 묵상하거나 금식하거나 자신의 더 깊이 있는 영적 삶을 위해 자신의 방식을 죽이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순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삶의 방식을 순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기적인 방식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다른 북소리에 맞춰 행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신현필 목사(한국오픈도어선교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