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잡지인 『The Korean Repository』(이하 『리포지터리』)는 1892년 1월에 발행되어 20세기 길목인 1899년 6월에 폐간되었다. 『리포지터리』는 개화기의 선교역사 연구에 저본이 되며 구한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직접 한국을 경험하며 기록한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국사회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그러나 『리포지터리』에 관한 선행연구들은 양적·질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그러한 가운데 반가운 소식은 『리포지터리』를 연구하고 이를 새롭게 해석하는 의미 있는 논문들이 최근 많이 눈에 띄고 있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리포지터리』의 초기 연구자들이 주로 신학대학의 기독교 역사학자들이나 신진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주를 이뤘는데 비해 최근에는 국가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뿐만 아니라 일반대학의 인문학연구소, 국학연구소 등에서 『리포지터리』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신학대학이나 기독교 관련 기관에 적을 두지 않은 일반인들로서, 이들 연구자의 예를 들자면 이슬(李瑟), 고영자, 박정환, 이영미, 권평 등 일반대학, 한국학연구소, 인문학연구소에 재직 중인 일반 연구자들이다.

삼문출판소(미이미교회 인쇄소)
▲한국 최초의 활판인쇄 시설을 갖춘 1902~1905년(추정) 배재학당 내 삼문출판소. ‘미이미교회 인쇄소’라고도 칭한 이곳에서 『리포지터리』가 인쇄됐다. 이 건물은 1902년부터 켄뮤어가 전세를 내 성서회관으로 사용했으며, 성서공회 연합지부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위의 연구자들은 직접적으로 『리포지터리』를 심도 있게 분석한 연구물을 내놓았는데, 이슬은 『리포지터리』를 개괄적으로 분석했으며, 이영미는 『리포지터리』의 성격과 의미, 권평은 『리포지터리』 창간 첫해 잡지의 내용과 체제, 그리고 기고자의 대부분을 점하는 선교사들의 소개를 더했다.

한편 박정환은 『리포지터리』에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도 방문기가 실려 있음을 기술했으며, 고영자는 1899년 개신교 선교사 중 최초로 제주도를 방문한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방문기 후반부를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에 편역해 소개했다.

『리포지터리』와 관련해 특별히 순천향대 인문학연구소(당시 소장 심경석 교수)는 2017년 5월 12일 교내 인문과학관 소강당에서 ‘근대 전환기 조선(朝鮮)의 관계 맺기와 타자(他者)의 시선 -The Korean Repository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나온 관련 서적이나 연구 논문은 『리포지터리』의 1892년 창간 이후 1898년 12월 휴간까지만을 다루고 있다. 즉 1899년 2월 9일 속간되어 그해 6월 1일까지 17회에 걸쳐 주간으로 발행된 『리포지터리』의 발행 사실과 그해에 폐간된 사실관계를 간과하고 있다. 필자는 앞에서 소개한 선행연구자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는 한편, 그들의 연구에서 왜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에 대한 자료 분석이 누락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 누락에 따른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이 소고를 쓰게 되었다.

Ⅱ. 『리포지터리』 선행 연구와 새롭게 발굴된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

필자는 유니언대학 아카이브(UTS Burke Library Archive)에서 피터스 선교사의 친필 ‘제주도 방문 일기’를 발굴한 바 있다.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1899년 간행된 『리포지터리』 자료를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입수하게 되었다. 1899년 발간 『리포지터리』를 살펴보며 관련 책자나 논문을 참고하는 가운데 기존 발표된 책과 논문에서는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의 존재를 언급한 이도, 거기에 실린 글을 인용한 저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2010년 이후 『리포지터리』를 심도 있게 연구한 저자들과 그들의 성과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이슬 (2010), 개항기 영문월간지 『코리아 리뷰』 연구, 碩士學位論文, 12-18.
나. 고영자 (2013), 알렉산더 피터즈, ‘켈파트섬 방문’,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 견문록, 107-120.
다. 박정환 (2013), 초기 제주도 개신교 형성사, 한국기독교와 역사(39), 181-208.
라. 이영미 (2021), 영문잡지 『코리안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1892~1898)의 성격과 의미, 9-35.
마. 권평 (2021),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해제(解題) -1892년도를 중심으로-, 동서신학, 제3호, 11-47.

이들의 『리포지터리』에 대한 관심과 선행연구 성과는 가치 있는 일이고 인정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에 대한 존재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점이 그들 연구 성과에 옥에 티로 남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선행연구자들이 『리포지터리』 1898년 11월호와 월간 마지막 호인 12월호에 올린 중요한 공지(Important Announcement), 그리고 1905년 5월호1)에서 언급한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보였다면 1899년 2월부터 속간된 『리포지터리』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리포지터리』 1898년 11월호
▲『리포지터리』 1898년 11월호에 실린 중요 공지에는 1899년에는 잡지 형태로는 발간하지 않으며, 편집자들은 1900년에는 다시 발간하기를 바란다며 휴간을 안내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적 문제와 재정 문제를 휴간 이유로 밝혔다. ⓒ『The Korean Repository』
1899년 2월 9일 기존 월간에서 주간으로 새로이 선을 보인 『리포지터리』를 소개함에 앞서 1898년 11월호, 12월호에 연속으로 게재된 『리포지터리』를 휴간하겠다는 사고(社告)를 살펴보자.

11월호에서는 휴간 이유를 인적 문제와 재정 문제 2가지로 아래와 같이 “중요한 공지(重要한 公知, IMPORTANT ANNOUNCEMENT)”로 알렸다.

“『리포지터리』는 1899년도에 잡지로는 발행하지 않지만, 편집자들은 1900년도에는 그 일을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한 결정에 이르게 되었다; 2명의 선배 선교사가 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더 많아졌으며, 여기에 더해 지난 2년 동안 미수금 된 꽤 많은 구독료를 수금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부 미수금 된 금액은 납부되었으며 나머지 금액도 곧 납부되리라 본다. 구독자들께서 빠른 시일에 송금하는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우리는 고객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릴 것이다. 정규 목록이 들어 있는 12월호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 2월까지는 발간 예정이며, 이러한 지연에 대해 독자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2)

이어서 12월호에서는 “重要한 公知” 대신에 편집부 기사로 왜 휴간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부연 설명을 했다. 즉, 주된 이유는 선임 선교사들이 안식년 휴가를 떠났고, 또한 월간지를 내는 일이 선교사역을 우선할 수 없다는 편집자들(선교부)의 방침이었음을 아래와 같이 편집부 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번 호를 끝으로 『리포지터리』는 잡지로서의 발행을 1년간 휴간합니다. 우리는 대한국에 이러한 종류의 정기간행물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4년 전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신문 1종 외에는 어떤 종류의 출판물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월간지 발행이 교단에서 우리에게 맡긴 선교 사역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고수해 왔습니다. 선교부의 가장 오래된 선교사 몇 명이 휴가를 떠나게 됨에 따라, 이제 우리는 그들로부터 넘겨받은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몇 달간 펜을 내려놓으려 합니다....”3)

필자가 관심 있게 들여다본 『리포지터리』의 공지 내용과 “편집부의 글”에는 잡지(magazine) 형태의 발행을 1년간 휴간하겠다는 사정이 담겨 있었다. 즉, 다음에 발행할 『리포지터리』의 발간 형태는 ‘잡지’ 형태는 아니라는 편집자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리포지터리』 편집진은 이렇게 마지막 휴간 공지가 나간 후 2개월도 되지 않아 ‘잡지’4)가 아닌(?) 4페이지의 주간지 형식으로 발행을 재개했다.

1892년 1월 월간으로 창간된 『리포지터리』와 1899년 2월 9일 주간으로 속간되어 발행된 『리포지터리』의 다른 점은 제호부터 “THE KOREAN REPOSITORY”에서 “THE KOREAN REPOSITORY. LOCAL EDITION. PUBLISHED EVERY THURSDAY / THE KOREAN REPOSITORY. WEEKLY EDITION. PUBLISHED EVERY THURSDAY”로 변경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 체제와 비교할 때 ‘국내판 / 주간 매주 목요일 발행’으로 새롭게 선보였다.

또한 1895년 1월 속간된 첫 페이지에는 편집자가 기존 ‘OHLINGER, EDITOR - MRS. F. OHLINGER ASSIS’T. EDITOR’에서 ‘H. G. APPENZELLER, GEO. HEBER JONES, EDITORS.’로 표기한 것처럼 공동편집자 체제로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899년 2월 주간으로 발행을 시작한 『리포지터리』 역시 공동 편집자 체제는 그대로 유지했다. 이에 더해 1899년 2월 주간에서는 ‘GEORGE C. COBE-BUSINESS MANAGER.’를 경영 관리자로 소개하면서 편집과 경영이 분리되어 운영을 시작함을 알리고 있다.

새롭게 눈에 띄는 것은 1892년 창간 당시의 월간 『리포지터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독료(SUBSCRIPTION RATES)와 광고료(ADVERTISING RATES)를 지면 맨 앞에 배치하여 1898년 11월 『리포지터리』 휴간 공고에서 보여줬던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러나 『리포지터리』는 주간지로 탈바꿈한 지 5개월로 접어들던 1899년 6월 1일, 주간으로는 17회 발간을 마지막으로 폐간 선언을 하며 〈독립신문(THE INDEPENDENT)〉에 합병 형식으로 모든 경영권을 넘긴다는 “사고(社告, FINIS)”를 실은 뒤 20세기 문턱을 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월간으로 발행된 『리포지터리』는 “한국의 특정 분야에 관한 전문 잡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망라하여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는 종합적인 매체로 출발하였다.”5) 반면, 주간으로 발행된 『리포지터리』는 1898년 중요 공지에서 밝혔듯이 글을 기고하는 사람들이 부족했고 또한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기존 기고자들의 다양한 소논문 위주의 편집에서 공동편집자가 글을 쓰거나 다른 저자들의 글을 발췌해 싣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주간 체제로 변경된 『리포지터리』의 내용을 보자면 “CITY AND COUNTRY”와 “TELEGRAPHIC NEWS”에서 국내외 소식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국의 공공 소식지인 관보(OFFICIAL GAZETTE) 내용을 발췌, 영문으로 번역 게재해 외국인들에게 대한국 현황을 알리는 소식지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측면에서 『리포지터리』는 사료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계속>

[미주]
1) 『The Korea Review』 편집자는 1905년 5월호에서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방문기 연재에 앞서 이 글은 1899년 『The Korean Repository』에 게재되었던 글을 재수록한다고 밝혔다.
2) H. G. Appenzeller and G. H. Jones (ed.), The Korean Repository, Vol. V. 1898, Seoul : The Trilingual Press, 1898, p. 442
3) Ibid, p. 478
4) 1899년 발행 리포지터리를 잡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신문으로 볼 것인가에 관해서는 향후 서지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
5) 이영미 (2021), 영문잡지 『코리안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 (1892~1898)의 성격과 의미. 한국학연구, 60, 10쪽.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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