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도 방문기’ 필사본 전체가 실린 1899년 『The Korean Repository』가 발굴됐다. 기존 1905년 5월, 6월 『The Korea Review』에는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도 방문기’ 후편만 연재되면서 그가 언제 제주도를 여행했는지 등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글쓴이 리진만은 피터스 선교사의 영인본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The Korean Repository』와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에 관한 2차 자료들을 접하며 여기에서 발견되는 오류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확인해 이 글을 보내왔다. 이에 본지는 지난 4월 24일에 이어 『The Korean Repository』의 1899년 발행과 종간, 그리고 피터스 선교사의 개신교 선교사로서의 첫 번째 제주도 방문 사실에 관해 여기에 소개한다. <편집자 주>

1899년 피터스가 기록한 제주 방문기 친필 영인본 표지와 내부. 피터스의 제주 방문기는 1899년 4월 13일 자로 발행된 『리포지터리』에 실렸다.
▲1899년 피터스가 기록한 제주 방문기 친필 영인본 표지와 내부. 피터스의 제주 방문기는 1899년 4월 13일 자로 발행된 『리포지터리』에 실렸다. ⓒUTS, Burke Library Archive

Ⅲ. 『The Korean Repository』와 알렉산더 A. 피터스의 제주도 방문에 관한 2차 자료

3-1. 유영열·윤정란 (2004), 『19세기말 서양선교사와 한국사회』, 경인문화사
3-2. 박용규 (2008),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성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 신학지남, 75(1), 106-155.
3-3. 박용규 (2008), 제주 선교 100년 그 역사와 의미. 신학지남, 75(2), 204-241.
3-4. 김중은 (2008), 舊約 國譯史에서 알렉산더 피터스(彼得)의 위치와 의의. 구약논단, 14(1), 159-182.
3-5. 고영자 (2013), 알렉산더 피터즈, ‘켈파트섬 방문’,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 견문록, 107-120.
3-6. 박정환 (2013), 초기 제주도 개신교 형성사. 한국기독교와 역사(39), 181-208.
3-7. 강혜정 (2017), 「The Korean Repository의 학술 자료적 가치」,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3-8. 이영미 (2021), 영문 잡지 『코리안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1892~1898)의 성격과 의미”

『The Korean Repository』(이하 『리포지터리』)는 “한국의 특정 분야에 관한 전문 잡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망라하여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다루는 종합적인 매체로 출발하였다”5).

현재까지 『리포지터리』를 표기함에 있어 “연구자에 따라 『韓國留記』, 『한국소식』, 『한국휘보』, 『한국보고』, 『코리안 리포지터리』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고, K.R. 혹은 The Korean Repository라는 영문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6).

『리포지터리』 단어 뜻을 그대로 옮기자면 19세기 말의 한국 지식과 정보의 보고(寶庫)라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보고를 품고 있지만 『리포지터리』에 관한 책이나 연구논문은 그리 많지 않다. 지금까지 『리포지터리』를 소개한 책이나 논문을 접하며 반가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여기에서 발견되는 대표적인 오류가 확산하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다.

『리포지터리』의 정간 연도에 대해 고찰하기 이전에 먼저 피터스 선교사가 언제 신학 수업을 받으러 미국으로 출발했는지, 그리고 그가 신학교에서 수학한 기간이 언제인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은퇴할 때의 알렉산더 A. 피터스
▲은퇴할 때의 알렉산더 A. 피터스.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대영성서공회 켄뮤어 총무와 부총무 피터스의 제주 방문이 개신교 선교사로서 첫 번째 제주 방문이다.

박용규는 위 자료 3-2. 각주 6에서 “성서공회사 1권 261. 여기서 이만열이 1900년까지 그가 권서로 활동하였는데 이것은 정확한 기록은 아니다, 피터스는 1899년 1월 요코하마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라고 주장했는데 두 분의 기술은 모두 오류이다. 1899년 상반기 당시 대영성서공회 총무는 켄뮤어였고 피터스는 부총무였다. 위의 자료 2-4. 켄뮤어(Kenmure)의 보고문 「Pioneering in Korea」, The Bible Society Reporter 1899년 7월호에는 분명 피터스와 켄뮤어는 제주도 여행을 2월 18일 출발해 3월 25일 서울로 되돌아왔다고 기록했다. 또한, 전년도 3월까지의 실적을 보고하는 1900년도 대영성서공회 연례보고서(BFBS Annual Report, 1900)에도 총무 켄뮤어와 피터스는 함께 제주도를 방문했다는 켄뮤어 총무의 보고 내용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피터스는 1899년 제주 여행을 마친 후 1899년 4월 12일 북부지방 여행을 시작했으며, 금강산을 거쳐 함흥을 방문하고 계속해서 만주 지방 한국 이주민들을 만나고 시베리아 국경까지 들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돌아온 기록을 『리포지터리』 Vol.Ⅰ, No.10. 6쪽(April 13, 1899)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중은은 위 자료 3-4. 164쪽에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난 해가 1900년이라 했으며, 신학교에 3년간 재학하는 동안 1901년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선교사로 지원했고, 1902년에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했다고 기술했다. 출발 연도를 1900년으로 본다면 피터스의 수학 기간은 2년밖에 안 되는 문맥상 오류가 있다.

이에 관해 필자는 피터스 선교사가 대영성서공회의 부총무 사익스(A. A. Sykes), 영국선교부 배드콕(Rev. Badcock)목사와 함께 1899년 4월 12일 ‘북부지방 여행’을 떠난 기사7)를 1899년 발행된 『리포지터리』에서 발견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자면, 피터스가 신학수업을 위해 한국을 떠난 시기는 그가 북부지방 여행에서 서울로 돌아온 1899년 5월 이후가 된다.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는 당시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가 미국성서공회 길만(Edward W. Gilman) 박사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9월에 시카고에 가면서 요코하마를 경유했는데, 시카고에 가서 신학을 공부할 것이며 그 후 정식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올 계획입니다.”8)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피터스는 1902년까지 3년간 신학교의 과정을 마치고 1902년 4월 필리핀 선교사로 임명받고 신학교 졸업 후 그해 8월에 필리핀 선교지로 떠날 수 있었다.

(왼쪽) The Bible Society Reporter 속표지. (오른쪽) 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 1899~1900년 보고.
▲(왼쪽) The Bible Society Reporter 속표지. (오른쪽) British & Foreign Bible Society 1899~1900년 보고. ⓒ대한성서공회 성서학도서관

Ⅳ. 『리포지터리』의 발간 기간에 관한 오류의 문제점

4-1. 『리포지터리』 관련 연구 성과 책자는 2004년 경인문화사에서 발간한 유영열·윤정란 공저 『19세기말 서양선교사와 한국사회』가 그 연구의 시발이며 개괄적인 자료를 담은 역작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리포지터리』의 발간을 1898년까지 월간 목차를 부록으로 싣고 있고, 또한 1899년 자료에 대해 언급이 되지 않아 이후 연구자들이 이러한 자료를 부분적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리포지터리』 연구 분야에 개척자로서 찬사를 받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1899년 자료가 지금까지 역사 속에 묻혀있게 된 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지 생각한다.

4-2. 2017년 『순천향 인문과학논총』에 실린 위 자료 3-7에 강혜정은 『리포지터리』의 발간 기간을 1892년~1898년으로 한정하는 오류가 있다.

4-3. 이영미는 지난 3월 「한국을 연구한 초기 개신교 ‘선교사 겸 학자’」들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발표하며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왕성한 연구 결과를 내놓으며 선교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보다 한 달 전 2021년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발간된 위 자료 3-8에서도 저자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발간된 『리포지터리』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다만, 여기에서도 저자는 『리포지터리』의 발행 기간을 위의 연구자들과 같이 1898년까지로 한정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에 관해 필자의 생각은 왜 위의 저자들뿐만 아니라 『리포지터리』를 연구하는 분들이 1905년에 발간된 『코리아 리뷰』에 언급된 1899년 발행본 『리포지터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분명 『코리아 리뷰』 편집자는 1899년 『리포지터리』에 실렸던 기사를 재수록한 것이라고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1899년 『리포지터리』를 발굴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그들의 『리포지터리』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계속>

[미주]
5) 이영미 (2021), 영문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1892~1898)의 성격과 의미”, 10쪽.

6) 강혜정 (2017), 「The Korean Repository의 학술 자료적 가치」,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55쪽.

7) 『The Korean Repository』, Vol.1, No.10, April 13, 1899. p.6.

8) 대한성서공회 자료집 제1권(로스 서신과 루미스 서신), 588쪽. 다만, 서신 작성 년, 월이 1899년 1월로 되어있는데 이는 새해가 되면 우리도 가끔 습관적으로 실수하는 새해 연도를 쓰면서 1900년이라고 써야 할 것을 1899년으로 실수해 썼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외부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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