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목숨까지 바치며 하나님 나라 건설에 헌신한
선교 초기 정신 본받아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
5-4. 자료를 정확히 번역하지 않은 내용의 재인용 문제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수만 리 밖에서 다른 문화와 다른 제도, 다른 관습, 그리고 다른 방언을 가지고 살아가던 이들의 생각을 우리말로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다 130여 년 전 일어났던 일을 현재의 우리말로 정확히 옮기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는 번역자가 알고 있는 상식만을 사용해 독자들을 이해시키면 안 된다. 물론 실제 번역 작업에 임할 때는 가용한 수단을 동원해 당시의 문화, 제도, 관습 등을 참고해 번역 작업을 해야 한다.
앞에서 얘기했던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의 첫 번째 남부지방 순행 시 존스의 기록을 보면 단어 사전풀이만 가지고 우리말로 옮길 수 없는 단어들이 여러 개 발견된다. 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두 분의 선교사들이 순행한 이후 이미 강산이 13번이나 바뀌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제도적으로는 대한제국 시대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 전쟁을 겪고 대한민국 정부도 수차례 바뀐 시간적 간극을 메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그리피스의 『A Modern Pioneer In Korea』에 나온 단어 중 몇 단어를 생각해 보자.
Governor: 대한제국기 지방 통치를 하는 수령에 대한 감독과 지휘를 총괄하면서 도내의 민정(民政), 군정(軍政), 사법(司法) 등의 전권을 행사하는 행정장관이 관찰사(觀察使)였다. 별칭으로 감사(監司)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Mayor: 조선시대는 8도의 지방행정 구역으로 구획하였고 그 아래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을 두었기 때문에, 남부순행 시 둘째 날 묵은 지역 ‘지평’은 당시 지평현(砥平縣)이었다. 이때는 현감(縣監)으로 원주의 경우 원주목(原州牧)이기에 목사(牧使)로 번역함이 옳다.
하지만 원주 도착했을 때의 광경과 환영 모습을 그리피스는 당시 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해 Governor’s office라 기술했고 존스는 Mayor’s office로 기술했기에 여기서부터 번역의 혼란이 왔다. 여기에다 아펜젤러의 1889년 2월의 공주순행을 8월의 남부순행과 함께 편집해 남부순행기로 기술함으로 인해 한국 독자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존스는 그들이 묵었던 객사를 ‘Municipal Guest House’로 원주 목에서 운영하는 객사로 기술해 그들이 묵었던 객사를 제공한 사람은 원주목사였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계속해서 우리는 그리피스의 기술에서 객사에서 일어난 주민들의 소란을 볼 수 있는데 그리피스가 기술한, 원주에 도착해 원주 객사에서의 어수선한 소란을 수습한 이는 바로 경성에서 그들을 호위해 따라온 중앙부대 소속 군인 기수(旗手)였다. 그리고 그 호위병의 명을 받아 혼란한 군중을 정리한 사람은 원주 목사의 순검(포졸)이었지 관찰사 소속이 아니었다.
6. 결론
아펜젤러 선교사에게는 첫 감리교선교사, 사회운동가, 근대교육의 선구자, 최초 성경번역위원회 위원 등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그에 대한 서적도 많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존스는 학구적인 태도로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었고, 한영사전을 만들고 찬미가를 펴내고 여러 한국 관련 서적 출판 및 선교활동으로 서양에 한국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리려 했다. 또 <신학월보> 뿐만 아니라 『Korean Repository』, 『The Korean Review』를 창간했고, 배재대학에 신학과를 창설하고, 협성신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에 관한 연구와 관련 서적 출판은 아펜젤러에 비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1차 사료로 소개한 아펜젤러와 함께 순행한 존스의 남부순행 저널은 1928년 노블이 KMF에 편집해 기고한 후 거의 한 세기가 되어서야 많이 부족한 필자가 번역할 때까지 그 전문이 번역되어 햇빛을 보지 못했다. 필자는 이러한 환경이 여기에 제기한 문제를 가져온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제기한 아펜젤러와 존스의 남부순행에 관한 오류의 시작은 그리피스가 아펜젤러의 전기를 쓰면서 공주 순행과 남부순행을 섞어서 기술했기 때문에 야기되었음을 이해했다. 그로부터 야기된 여러 문제는 서두에서 언급한 1차 자료의 사용에 있어 분별력을 길러야 하고, 또한 인용 시에는 꼭 그 전거를 재확인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이러한 오류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필자는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가 KMF 1912년 12월호 p.368~372에서 그리피스의 책 『A Modern Pioneer in Korea』에 대한 서평의 일부분과 이만열 교수가 1985년 발행한 『아펜젤러』 개정판을 2015년 출간하며 역자 서문 말미에 있는 이만열 교수의 글을 소개하면서 결론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매우 잘 알려지고 품위 있는 작가 그리피스 박사에 의해 그에 관하여 쓰인 이 책은 여러 가지 점에서 놀라운 것과 무엇인가 실망스러운 것이 있다. 이것이 아마도 이 글의 최초부터 언급된 바로 그 이유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지만, 우리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한두 가지 사실들이 따로 있다. … 그리피스 박사의 책은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그의 저술에 감사하는 사람, 아펜젤러 씨가 사랑했던 것처럼 그를 사랑했던 사람, 아펜젤러 씨와 같은 분의 생애를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것들로 충분하다는 사람, 그 책이 가지고 있는 약점들을 인정하는 사람, 그리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한국의 친구들이 읽을 것이며, 그 책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하며, 그 나라에 대해 글을 쓰고도 그곳에 결코 간 일이 없는 저자를 괴롭히는 곤경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릴리어스 언더우드가 그리피스의 ‘아펜젤러의 전기’ 서평을 발표한 이후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한국 교회사 학자들은 릴리어스 만큼 이 책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지 않았고 더구나 그 오류들을 단지 인용하고 전했기에 앞서 제기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특별히 선교사(宣敎史) 자료를 대할 때 발견되는 오류에 대해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 그러한 조그마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선교사들이 이룩한 초기 선교역사를 정립할 수 있고 이와 함께 바른 교회 역사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대한국을 병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4년 루이스 감독은 “그가 확신하기는 대한국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적 메시지를 황인종들에게 전하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음과 생활을 통해 전하는 특권을 갖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모든 일본과 중국을 복음화하는 선교사들이 될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척박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후 세계 2위의 선교사를 파송하기까지 씨를 뿌리고 물을 공급할 때까지 헌신한 선교사들에게 감사한다. 그러기에 한국 땅과 문화, 특별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선교사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전수하기를 소망한다.
“이제는 아펜젤러의 일기와 보고서와 설교 등을 당시 한국 선교의 전반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면밀히 검토하고 연구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 땅의 감리교회와 교회사학계는 이런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 연구를 더욱 촉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