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 제도의 존재는 서양인들에 의해서 외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카스트'라는 말 자체가 '카스타'(casta)라는 '혈통'이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에서 왔습니다. 그 본격적인 연구는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카스트를 연구하는 세 부류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서 카스트 제도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는 동시에 오해도 싹트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오리엔탈리스트는 일반적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서양의 관점으로 동양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와 관습 등을 연구했던 서양의 학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당시는 서양의 식민주의가 왕성했던 때이고, 기본적으로 서양과 동양의 기본적인 관계는 '권력과 지배와 복잡한 헤게모니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도 사회를 연구하면서 기본적으로 힌두교 경전을 연구해서 결론을 도출하였기에 브라만이 사회의 지배적인 집단이고 사회 질서의 중심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경전 중심적인 접근은 결국 인도 사회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정적인 사회로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이런 관점에서 카스트 시스템은 '기껏해야 브라만들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우대를 해주는 것이나, 최악의 경우에는 조악하고 변질된 미신' 정도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선교사들의 관점이 있었습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윌리엄 케리는 1793년 인도의 콜카타 지역으로 들어와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서양문명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동양을 바라보았는데요. 인도의 종교인 힌두이즘을 바라볼 때도 천박한 것으로 인식하고, 나아가서 인도 문화 전체를 타락하고 불합리가 가득한 열등한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도의 사회와 문화가 힌두이즘이라고 하는 종교 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카스트 시스템도 '힌두이즘의 사회적인 기반'이라고 여기면서 카스트 시스템이 '힌두들의 열악한 상태의 원인'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에 영국 선교사였던 윌리엄 워드는 카스트 시스템을 중국의 '전족'에 비유하여 "나라 전체를 불구로 만들었고 이 역겨운 제도의 치명적인 영향력 아래서 브라만들은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은 채 무지로 빠져들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당시의 유럽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것이었고, 그러한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내려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행정가들의 관점이 있습니다. 1757년에서 1785년 사이는 벵갈주에 있던 동인도회사가 행정적인 시스템을 발전시킨 시기였습니다. 행정가들은 행정적인 필요를 위해서 인도의 사회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도를 카스트의 집합체로 바라보았고, 1901년 첫 번째로 실시된 센서스에서는 모든 인도인의 카스트가 조사되면서 어느 정도 실증적인 연구가 이뤄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카스트는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한 독립체'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동족결혼, 식사규칙, 고정된 직업, 동일한 의식 행위'를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카스트의 기원과 현황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뤄졌지만, 사회적 구분을 위해서 카스트 간의 순위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취급하였고, 이로 인해 인도인들이 그전에는 신경 쓰지 않던 카스트 간의 순위 경쟁에 불을 지펴놓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행정적인 목적을 위해서 카스트를 바라보고, 그들 사이에 경쟁심을 부추겨야만 했던 행정가들의 태도였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태도가 초기 카스트 연구에서 형성된 관점이었는데요. 지나치게 서양 중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인도의 사회와 문화 자체를 지나치게 종교 중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카스트 제도 자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카스트 제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칼럼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yoonsik.lee201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