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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1~3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 도다
부모는 자녀의 성격과 기질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부모가 경쟁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치는가가 중요하다. 물론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출생서열에 따라 다르게 대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맏이는 항상 부모를 보고 어른의 세계를 배우다 보니 또래보다 성숙하지만, 형제가 많은 동생은 손위 형제자매에게 배우는 시간이 더 많으므로 롤 모델이 중요하다.
부모도 결혼 후 첫 아이를 양육할 때는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일단 엄격하게 훈육한다. 하지만 둘째, 셋째가 생기면 훨씬 더 너그러워지고 양육경험이 늘어날수록 능숙해진다. 긴장도 덜하고 무슨 문제가 생겨도 금방 해결할 대책도 생겨나고 첫 아이를 키울 때만큼 할 일이 많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막내까지 키우다 보면 부모님이 연로하고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하여 자녀 양육 유형이 변한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막내를 훈육보다 무조건 사랑으로 대하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부모가 완전 무방비 상태로 아이를 방임하거나 직무유기처럼 내버려 두게 되기도 한다. 어떤 부모는 평생 막내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수도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의 신세대 부모들은 아이를 하나밖에 안 낳다 보니 모든 자녀 교육의 양육개념 자체가 흔들리고 깨어져 무개념 상태인 듯하다. 부모가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정도를 넘어 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수록 부모와 자녀와의 사회적 범죄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 안타깝다.
출생서열이 낮을수록 형제자매들 사이에 지킬 것은 지키고, 지키지 않으면 야단맞던 과거와는 달리 규칙들이 완화되고 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던 일조차 아무 일도 아닌 듯 야단도 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둘도 아닌 한 명도 겨우 낳다 보니 대부분 아이가 독자인 셈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롤 모델이 없으며, 부모는 부모대로 양육의 기준이 사라졌다. 무조건 좋은 것을 입히고, 먹이고, 제일 좋은 학원에 보내고, 어디를 가나 무조건 1등이 최고인 줄 아는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것이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라고 가르칠 뿐, 인성은 안중에도 없는 4차원의 경쟁 엄마들뿐이다. 이런 엄마들의 양육 방식은 결국 자녀들에게 우월의식이 아니라 열등감만 가득 채우는 꼴이 되었다. 하나뿐인 아이에게 조건 없는 무한 사랑을 주면, 정작 아이는 거침없이 반항할 자유를 더 많이 누리며 독창성을 발휘할 동기가 부여된다. 하지만 어느 방향으로 해소를 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최초의 타인을 경험하는 것도 가족이요, 형제자매이다. 집에서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것과 둘 이상의 형제자매를 키울 때 밥이나 간식 먹는 것조차 다르다. 형제들은 내 것을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경쟁심을 갖고 빨리 먹고, ‘한입 더 뺏어 먹을까’라고 생각한다. 태어나서 제일 먼저 처음으로 직면하는 사회가 가정이며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경쟁자도 바로 형제자매다. 두세 명의 형제자매가 있을 때는 이들 간에 경쟁하면서 양보나 타협하는 것도 배우고 익히고, 때로는 화가 나도 참고, 동생을 이겨도 미안해하고 형에게 지면서 축하하는 인생의 교훈을 서로 가르치고 배운다. 처음에 들었던 열등감도 이런 형제자매간의 서열에 따라 순종할 것은 순종하고 서로 도우면서 형제애로 뭉쳐지며 자연스럽게 열등감을 극복하는 순리를 터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질투를 느끼고, 불안을 느끼지만 극복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때로는 남을 원망하기보다 자기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실천하며 성장해간다. 이때 한번 잘못 형성된 경쟁심은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고, 어디를 가나 인생 자체가 경쟁이고 모든 것을 거래로만 여기는 것이다. 내가 주는 것은 받기 위해 주는 것이며, 받았으면 줘야 한다는 공식을 모든 대인관계에 대입하다 보니 결국은 대가성 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자연히 경쟁해서 우월한 강자만이 살아남는 동물의 세계나 다를 바 없는 치열한 경쟁원리로만 스스로를 내모는 것이다. 일등만이 우월하고 자신을 포함한 나머지는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실패자, 루저가 된다. 집단 열등감의 도가니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배우자를 고르는 것이 경쟁이고, 결혼 후의 생활도, 배우자 간에도 어떤 직업이나 직종이냐에 따라 경쟁상대로 생각하기 쉽다. 경쟁이 사회 속의 경쟁이 아니라,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경쟁하다 보면 끝을 보게 될 수밖에 없다. 열등감이 파경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부부나 가정은 어떤 사회보다 안정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에 남편은 아내 자체가 경쟁의 대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 순간 가정의 사랑과 화평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실금처럼 보이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은 심해지고 간격은 더 넓어지기에 두 쪽이 날 수밖에 없다.
내담자 중에 남편은 행정고시, 아내는 외무고시 출신으로 고시동기였는데, 아이를 키우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상에 그렇게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인간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부부간의 경쟁은 치열했다. 심지어 출퇴근조차 누가 일찍 나가고, 누가 더 늦게까지 일하고 오느냐는 식이었다. 아내가 서기관 승진을 먼저하고 남편이 2년 늦게 했지만, 결국 부이사관의 승진은 남편이 앞섰다. 그런 사이에 아이는 중고등학교에서 사고뭉치로 겨우겨우 부모의 후광 때문에 학교를 졸업했다. 나중에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유전자 검사까지 받았다고 했다. 아이가 인지발달이 늦고, 학습능력이 너무 떨어져 솔직한 말로 자식이라고 데리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머리를 전혀 닮지 않은 자식을 서로 의심 끝에 유전자 검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이에게 가해지는 비이성적인 훈육방법 때문에 아이의 반항은 결국 일탈행위로 이어지고, 그것을 넘어 범죄의 원인이 되었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부모가 벌주겠다고 소리치거나 협박하고 강압적인 행동을 많이 사용할수록 자녀는 규칙을 무시한다고 했다.
버클리대학교 심리학자인 도널드 매키넌에 의하면 미국에서 한 평범한 어린이들의 부모는 숙제할 시간이나 취침 시간 등과 같이 구체적인 규칙을 평균 여섯 가지 정도 자녀들에게 지키도록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아주 창의적인 어린이들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지키게 하는 규칙은 평균 한 가지도 되지 않고 오히려 규칙이 적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규칙보다는 도덕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건축가들과 기술은 뛰어나지만 창의성은 없는 건축가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 창의적인 건축가들을 차별화하는 요인은 부모가 자녀들을 훈육할 때 설명하는 방법을 쓴 점, 그들의 부모들은 행동 기준을 제시하고 그런 기준의 근거를 옳고 그름의 원칙에 의거해서 도덕성, 고결함, 존중, 호기심, 끈질긴 노력 등과 같은 가치를 거론해가며 설명했다.
최원호 서울한영대학교 겸임교수, <열등감, 예수를 만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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