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대체로 돈과 명예와 높은 신분과 권력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것이 다 갖추어져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영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 등장하는 율법교사는 청년이요, 율법교사요, 관원이요, 돈도 많아 시쳇말로 아주 잘 나가는 사람이었지만 그것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라고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했다. 예수님은 상대가 율법교사이므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역질문을 하셨고, 율법교사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27절)고 가르쳤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듣고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고 하셨다.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정통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랑실천’ 곧 ‘이행득구(以行得救)’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믿음의 나무에 열리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나 목사는 선교지나 목양지로 떠날 때 반드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선교나 목양의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요한일서 4장 7~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가지고 죄짓고 도망쳐 짙은 숲 속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셨고(창3:9), 전적으로 타락하여 구원의 소망이 없었던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구유에서 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선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요, 최초의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이 선교의 책임을 사도들에게 위임하셨고 사도들은 선교를 교회에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교회든지 선교의 사명을 확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이런 실화가 있다. 아빠와 엄마가 일곱 살 된 아들과 다섯 살 된 딸을 데리고 등산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이 응급수술을 받다가 피가 모자라 수혈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들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은 가족 중에 다섯 살 된 딸밖에 없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던 아빠는 어린 딸에게 조심스럽게 “얘야! 오빠가 피가 모자라 피를 보충해야 하는데 네가 오빠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딸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수술이 끝난 후 의사는 부모에게 수술이 잘 끝났고 생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아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때까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던 딸의 손을 잡고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다. 고맙다”고 말했더니 딸 아이는 “와! 정말 기뻐요. 그런데 나는 언제 죽게 되나요?”라고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빠는 어린 딸에게 “네가 죽다니,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그럼 너는 죽을 줄 알면서 오빠에게 피를 주었다는 말이냐?”라고 물었고 딸은 “네! 저는 오빠를 사랑하니까요.”라고 답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주려는 것이 참된 사랑인데 선교사와 목사는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기다리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가 버린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렇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21:15), ‘내 양을 치라’(요21:16), ‘내 양을 먹이라’(요21:17)고 목양의 책임을 맡기셨다. 사랑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해내는 묘약이요, 사랑은 모든 죄를 덮어버린다.
홍선기 목사(한국오픈도어선교회 명예이사장, 혜림교회 원로목사)
오픈도어선교회 제공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정통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랑실천’ 곧 ‘이행득구(以行得救)’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믿음의 나무에 열리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나 목사는 선교지나 목양지로 떠날 때 반드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선교나 목양의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요한일서 4장 7~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가지고 죄짓고 도망쳐 짙은 숲 속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셨고(창3:9), 전적으로 타락하여 구원의 소망이 없었던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구유에서 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선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요, 최초의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이 선교의 책임을 사도들에게 위임하셨고 사도들은 선교를 교회에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교회든지 선교의 사명을 확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이런 실화가 있다. 아빠와 엄마가 일곱 살 된 아들과 다섯 살 된 딸을 데리고 등산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이 응급수술을 받다가 피가 모자라 수혈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들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은 가족 중에 다섯 살 된 딸밖에 없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던 아빠는 어린 딸에게 조심스럽게 “얘야! 오빠가 피가 모자라 피를 보충해야 하는데 네가 오빠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딸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수술이 끝난 후 의사는 부모에게 수술이 잘 끝났고 생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아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때까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던 딸의 손을 잡고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다. 고맙다”고 말했더니 딸 아이는 “와! 정말 기뻐요. 그런데 나는 언제 죽게 되나요?”라고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빠는 어린 딸에게 “네가 죽다니,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그럼 너는 죽을 줄 알면서 오빠에게 피를 주었다는 말이냐?”라고 물었고 딸은 “네! 저는 오빠를 사랑하니까요.”라고 답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주려는 것이 참된 사랑인데 선교사와 목사는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기다리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가 버린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렇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21:15), ‘내 양을 치라’(요21:16), ‘내 양을 먹이라’(요21:17)고 목양의 책임을 맡기셨다. 사랑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해내는 묘약이요, 사랑은 모든 죄를 덮어버린다.
홍선기 목사(한국오픈도어선교회 명예이사장, 혜림교회 원로목사)
오픈도어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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