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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득의(以信得義)의 정통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랑실천’ 곧 ‘이행득구(以行得救)’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믿음의 나무에 열리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나 목사는 선교지나 목양지로 떠날 때 반드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선교나 목양의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요한일서 4장 7~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게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가지고 죄짓고 도망쳐 짙은 숲 속에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셨고(창3:9), 전적으로 타락하여 구원의 소망이 없었던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구유에서 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선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요, 최초의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이 선교의 책임을 사도들에게 위임하셨고 사도들은 선교를 교회에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교회든지 선교의 사명을 확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이런 실화가 있다. 아빠와 엄마가 일곱 살 된 아들과 다섯 살 된 딸을 데리고 등산을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아들이 응급수술을 받다가 피가 모자라 수혈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들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은 가족 중에 다섯 살 된 딸밖에 없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던 아빠는 어린 딸에게 조심스럽게 “얘야! 오빠가 피가 모자라 피를 보충해야 하는데 네가 오빠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하고 물었다. 딸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수술이 끝난 후 의사는 부모에게 수술이 잘 끝났고 생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아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그때까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던 딸의 손을 잡고 “네 덕분에 오빠가 살게 되었다. 고맙다”고 말했더니 딸 아이는 “와! 정말 기뻐요. 그런데 나는 언제 죽게 되나요?”라고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빠는 어린 딸에게 “네가 죽다니, 네가 왜 죽는단 말이냐, 그럼 너는 죽을 줄 알면서 오빠에게 피를 주었다는 말이냐?”라고 물었고 딸은 “네! 저는 오빠를 사랑하니까요.”라고 답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주려는 것이 참된 사랑인데 선교사와 목사는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기다리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가 버린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렇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21:15), ‘내 양을 치라’(요21:16), ‘내 양을 먹이라’(요21:17)고 목양의 책임을 맡기셨다. 사랑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해내는 묘약이요, 사랑은 모든 죄를 덮어버린다.
홍선기 목사(한국오픈도어선교회 명예이사장, 혜림교회 원로목사)
오픈도어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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