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이하 한복협)는 "전쟁과 평화"란 주제로 강변교회(담임 허태성)에서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다. 이 날 행사에서는 박종화 목사(경동교회)와 허문영 박사(평화한국 상임대표), 손봉호 교수(고신대 석좌교수)가 발표했으며, 유관지 목사(감리교북한교회연구원장)가 응답했다. 다음은 손봉호 교수의 "그리스도인과 전쟁" 발표 전문이다.

s2.jpg1. 가장 악한 만행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은 전쟁이다. 살인이 가장 극악한 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전쟁에 이무 책임도 없는 민간인들이 직접 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군인들보다 더 많이 죽고 다치며, 그들의 재산이 파괴되기 때문에 전쟁은 한 두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한다.  

우리는 흔히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그래서 고의적인 살인만 죄악이지 과실치사나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의도하지 않은 살상은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행위주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잘못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와 그의 고통이다. 고의적인 살인이나 실수 혹은 전쟁에서의 살인이나 피해자가 죽는다는 사실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전쟁에서 우연하게 죽었다 하여 고의적인 살인행위로 죽은 것보다 덜 억울하거나 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힘의 정도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커졌고 그 방법이 다양하고 복잡해진 오늘날에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평등의 원칙에 부합하며 기본 인권을 올바로 존중하는 것이다. 현대의 윤리는 행위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적이라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 가운데 전쟁만큼 큰 것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약 7천만 명이 희생되었고 그 가운데 민간인이 약 4천만 명이었으며, 6.25전쟁에서는 군인은 약 40만 명이 목숨을 잃은 반면 민간인은 약 200만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상자는 그 보다 더 많았을 것이며 그들은 일생을 장애자로 고통을 겪으며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 재산 피해도 엄청나서 전 지역이 초토화되었다.

무기로 죽이고 상처를 주는 것 외에도 전쟁 중에는 평상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강간, 납치, 협박, 모독 등의 인권유린이 이뤄지고 정의, 정직, 예의가 다 무력해져서 인간이 짐승보다 더 못한 짓을 자행할 수 있으며 인간의 가장 저급하고 비열한 단면이 거침없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며, 특히 기독교인은 모든 힘을 다 기울여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쟁을 논의할 때 반드시 그리고 우선적으로 전제해야 할 기본명제다.  

2. 의로운 전쟁 이론

전쟁이 좋지 않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리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쟁보다 더 나쁜 대안은 없다는 사실도 대부분 인정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시대, 모든 지역에서 전쟁은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는”(사 2:4) 상황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사상가들은 어떤 전쟁도 반대하는 평화주의(pacifism) 대신에 의로운 전쟁(just war)이론을 제시하였다. 도덕적으로 양심에 가책 없이례참여할 수 있는 전쟁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가장 유명한 이론은 로마의 철학자 Cicero (106-43 B.C.)가 제시한 것이다. 그는 (1) 전쟁에 참여할 유일한 정당성은 국가의 명예 혹은 안전을 지키는 것이고, (2) 모든 협상이 다 실패했을 경우에 이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며 (3) 상대에게 적절한 경고를 하기 위하여 반드시 공식적으로 선포되어야 하고, (4) 그 목적은 정복이나 세력의 확장이 아니라 정의로운 평화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야 하며, (5) 포로와 항복하는 모든 사람들은 보호되어야 하고, (6) 합법적인 군인만 전투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루터 등 기독교 신학자들도 Cicero의 주장과 비슷한 정당한 전쟁 이론을 제시했다. 2003년 4월 14일 복음주의협의회 월례발표회에서 투빙겐 대학교 선교학 교수 Peter Bayerhaus 교수는 루터교회의 중요한 교리 문서인 아우그스베르그 (Ausberg) 신앙고백 16조항이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범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 통치자들과 심판자들로서 무기를 사용하여 공의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적법하다”고 기술하고, 정당한 전쟁의 조건들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고 소개하였다. “(1) 전쟁의 불가피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적법한 권위가 있어야 한다. (2) 분명한 전쟁의 원인이 있어야 한다. 즉 무기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분명한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큰 악을 제거하는 작은 악이 것이 되어야 한다. (3) 전쟁의 수단이 그 전쟁으로 극복하고 제거하려는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방어하고 보호하려는 선한 목적에 적절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4) 전쟁은 마지막 수단으로 채택되어야 한다. 즉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외교적 노력이 실패했을 경우에만 채택되어야 한다. (5) 전쟁은 예측할 수 있는 시간 안에 끝날 수 있다는 계산을 가지고 수행해야 한다. (6) 그와 같은 전쟁의 결과는 전쟁을 초래케 한 재난보다 훨씬 더 좋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의로운 전쟁에 관한 Cicero와 Bayerhaus 교수의 관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전쟁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위치다. Cicero가 중시한 것은 국가의 명예와 안전인 반면에 Bayerhuas는 국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 전쟁 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소크라테스도 국가는 어머니와 같다고 주장하였고, “미우나 고우나 나의 조국” 이란 생각은 오늘날에도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외국과 전쟁이 일어나면 조국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국가관을 수용할 수 없다. 국가란 악한 자를 벌하고 선한 자를 상주는 역할, 즉 사회질서를 유지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임무를 가질 뿐 그 자체로 신성한 것도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사실 애국심이란 거대한 집단이기주의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불의한 전쟁을 수행할 때는 그리스도인과 양심적인 시민들은 그에 항거하고 반전운동을 펼쳐야 할 것이다. 후에 독일 수상이 되어 독일 통일의 초석은 놓은 Willy Brandt는 2차 대전 중 Norway에 망명하여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의 패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조차도 잘못된 애국자가 되어 불의한 전쟁을 기독교 이름으로 지지하고 자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고 기도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하여 스페인과 전쟁을 선포한 미국 대통령 McKinley의 위선은 유명하다, 백악관을 방문한 목사들에게 “며칠 간 밤늦게까지 백악관 마루를 서성이다 마침내 무릎을 꿇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필리핀을 완전 점령하여 그들을 교육시키고 격상시키며 문명인으로,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우리의 동료시민으로 만드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뒤 나는 아주 편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선은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다. 2008년 한국청소년개발원이 한. 중. 일 청소년에게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앞장 서 싸우겠다”고 대답한 학생이 일본 41.1%, 중국 14.4%였는데 한국은 10.2%에 불과했고,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대답은 일본 1.7%, 중국 2.3%, 한국 10.4%였다 한다 (2008년 4월 10일 조선일보). 나조차도 이를 개탄했는데, 정말 개탄해야 할 사실인지 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3. 평화주의와 이웃에 대한 책임

앞에서 제시된 의로운 전쟁 조건들에 대해서는 그 하나, 하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반박할 수 있다.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적법한 권위”란 것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았으므로 적법한 권위라 할 수 있고 6.25을 일으킨 북한의 김일성 정권도 그 나름대로 적법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전쟁 후의 상태가 전쟁의 원인이 되는 악을 충분히 보상할 때만 정당하다는 것도 이론적일 뿐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결과가 가져올 이익이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나 전쟁 과정이 일으킬 해악보다 적다고 예상되는데도 불구하고 시작되는 전쟁은 없다. 전쟁이란 너무 복잡한 현상이기 때문에 어떤 예칙이나 계산도 정확할 수 없다. 대부분의 전쟁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해악을 가져온다.  

오늘날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정당성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구실은 그 전쟁이 “방어적”이란 것이다. 사실 그런 구실은 거의 모든 전쟁에서 이용되어 왔다. 1967년 이스라엘 비행기가 이집트 비행장을 폭격함으로 시작된 ‘6일 전쟁’도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의 예상되는 공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일으킨 방어적인 공격 (preemptive strike)이라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진정 방어적인 전쟁은 정당하다 해야 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악한 세력의 공격을 그대로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은 방어적인 전쟁도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불의한 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항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불의를 당하고 참는 것이 옳다. 소송과 관계해서 바울사도는 (고전 6:7)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하고 가르쳤다. 예수님도 (마 5:39-41)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사실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온갖 해악을 다 고려하면 불의한 세력에게 당하는 것이 전쟁에 이기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의의 정도와 전쟁의 결과가 경우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어떤 공식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즉 불의의 정도와 세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어떤 희생도 그것에 굴하는 것만큼 클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작은 희생으로 불의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불의의 피해가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가해진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피해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다면 나의 주장과 이익을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으나, 나의 희생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 특히 아무 책임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죄한 이웃을 위하여 싸워야 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희생당할 만한 어떤 잘못도 없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확신 때문에 더 큰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전투에 참여해야 할 상황에 있고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개인적 원칙 때문에 집총을 거부하면 우리 쪽의 힘은 그만큼 약해질 것이고 그 때문에 우리 쪽이 패전하면 나 뿐 아니라 다른 이웃도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6.25 한국 전쟁 때 평화주의자가 많아서 패전했더라면 그 평화주의자들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한국인들도 지금 북한 주민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원칙적인 평화주의(pacifism)를 매우 난처하게 만든다. 나는 개인적으로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으나 나의 확신 때문에 평화주의자가 아닌 이웃이 더 큰 고통을 당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4. 민주화가 하나의 대안 

전쟁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는 ‘현실주의’, 어떤 경우에라도 전쟁은 안 된다는 ‘평화주의’, 전쟁은 불가피하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정의롭게 해야 한다는 ‘의로운 전쟁 이론’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전쟁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 주지 못한다. 전쟁은 너무 악하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 없으나 동시에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원칙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고 손을 놓아버리기에는 그 악이 너무 심각하다.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면서 가능한 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일어나더라도 가능한 한 정의롭게 수행하고 가능한 한 희생과 고통을 줄이며, 가능한 한 빨리 끝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의롭던 의롭지 않던 어떤 전쟁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며 특히 그리스도인의 임무일 것이다. 이와 관계해서 흥미로운 것은 최근 “민주주의 국가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정치학자들 간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대변하는 정치학자 J. Rummerl은 (Death by Government 1994, Power Kills: Democracy as a Method of Nonviolence, 1997) 민주주의적 사회에서는 시민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싸우기 보다는 협상하고 타협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적 유산의 일부가 되어 있어서 다른 민주 사회와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관계를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비폭력적 방식으로 서로의 이해관계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시민사회를 강화하므로 권력의 집중을 막고 국가의 권력행사를 통제한다고 보았다. Rummel외 다른 학자들도 민주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전쟁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편다.

물론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숙한 민주 국가 간에는 비민주 국가 간이나 민주국가와 비민주 국가 간 보다는 전쟁이 적게 일어난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Matthew White에 의하면 민주주의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19.8%인데 비해서 두 비 민주주의 국가 간 전쟁 확률은 30.8%,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 간의 전쟁 확률은 49.4%라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오늘 날, 미국과 독일, 프랑스와 영국, 한국과 일본, 한국과 대만 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으나, 남한과 북한, 일본과 북한, 일본과 중국 간에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상대적으로 높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민주주의가 성숙하면 할수록 한국과 전쟁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비록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전쟁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비교적 현실적인 것은 우리 사회를 가능한 한 민주화하고 시민사회를 육성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극대화하려고 노력하되, 그것을 물리적 싸움과 폭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민주적 제도에 따라 협상과 타협으로 해결하는 시민사회를 만들면 국가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축소될 것이고, 시민들의 뜻에 반해서 전쟁을 선포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질 것이다. 물론 우리만 민주화한다 하여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이 일어날 확률이 많이 줄어질 것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남북한 간의 전쟁이다. 그 동안 무기는 훨씬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서로를 살상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고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전쟁이 일어나면 지난 6.25 전쟁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인명희생과 재물파손이 일어날 것이다. 적화통일 이외에는 전쟁보다 더 피해야 할 상황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라도 감행해야 할 것이다.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북한 정권을 자극하여 전쟁 이외에 다른 통로가 없도록 밀어붙이는 정책은 누구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여 전쟁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모든 한국인, 특히 그리스도인의 지상 임무라 할 수 있다.

전쟁을 줄이는 하나의 대안이 민주화라면 우리는 남한과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남한의 민주화는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이룩되었다. 대통령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한 것이 문제지만 이번 총리, 장관 내정자 청문회를 보면 그래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다. 그것은 단순히 남북 간의 전쟁 가능성을 줄이고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고통이 줄어지고 그들의 삶이 인간답게 되기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북한이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 한 북한이 개방되고 민주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념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북한의 민주화와 개방을 유도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정책을 써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북한을 위협하고 힘으로 밀어붙여서 북한이 무릎을 꿇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아니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시도했던 것과 같은 햇볕정책이 더 효과적일지에 대해서 이념에 따라 의견이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며 실사구시의 문제다.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냉정하게 토론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이지 감정적으로 다툴 문제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햇볕정책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비전문가의 의견이란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기독교적 원칙에 입각하여 북한의 핵무기 제조와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반대하고 비판해야 하지만 주민들이 굶주리지 않게 식량을 보내는 것은 전쟁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주장이 있다면 그런 의견도 역시 열린 마음으로 들어봐야 할 것이다. 북한의 민주화를 통하여 전쟁 가능성을 줄인다는 목적에  모두가 동의한다면, 그 방법의 차이 때문에 우리끼리 반목하는 것은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손봉호 교수 (한복협사회위원장, 고신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