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산 증인인 조동진 박사의 삶을 다룬 '나의 소명, 나의 선교행전'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동진 박사는 한국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육(1961)의 창도자이며, 비서구세계 최초의 선교사 훈련과 연구기관인 '국제선교연구원'(1963, 훗날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을 설립했습니다. 또 '아시아선교협의회'(AMA)와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등을 창립해 비서구세계 선교계의 연합을 추진했으며, 서구와 비서구권의 선교가 만나 협력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최근 열린 '2010동경대회'에서는 故 랄프 윈터 박사를 대신해 대회 전체 주제강연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조동진 박사 관련기사)
여섯 번째 부르심 : 선교단체 간의 네트워크를 통한 동서 선교협력 노력의 성공
결국 나는 범아시아 선교단체 간의 네트워크를 먼저 형성하고 나서 서구 선교단체들과의 접촉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970년 아시아 12개국을 찾아가서 각 나라마다 선교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한 특별 순방여행을 시작했다.
나는 먼저 일본으로 가서 핫도리 아키라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 홍콩으로 가서 디모디 자오 박사와 필립 탱 박사를, 대만에서 데이비드 랴오 박사를, 태국에서 윗첸 와따끼 차로엔 목사를, 싱가포르에서 찬두레이 감독을, 말레이시아에서 G. D. 제임스 박사를, 필리핀에서 그레그 팅슨 목사를 만났다. 그리고 나서 베트남으로 가서 돈반미엔 목사를, 인도에 가서 사무엘 카말레슨 박사와 데오도르 윌리엄스 목사를, 파키스탄에서 바지르 지완 감독을, 방글라데시에서 사부하스 생마 목사를 만났다. 이 사람들은 1960년대 아시아 선교운동의 중요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아시아 선교단체들의 네트워크 조성에 동참할 것과 상호간의 동반자 선교관계를 맺는데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우리는 마침내 1973년 8월에 한국 서울에서 ‘범아시아 선교지도자 컨설테이션’을 소집하자는 합의에 도달했다. 나는 이 합의를 가지고 1971년 9월 미국 UFMA와 EFMA가 함께 그린레이크에서 개최한 하기선교대회에 참석했다. 나는 그곳에서 1973년 8월 한국 서울에서 ‘범 아시아 선교지도자 컨설테이션’을 개최한다고 광고했다. 그리고 이 모임에 서구 선교단체 지도자들을 특별 객원 참가자로 초청한다는 공개 초청을 발표했다. 다음과 같은 선교학 교수들과 IFMA, EFMA, 그리고 WEF 간부들 여덟 사람이 이 공개초청에 호응했다.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아더 글라서 박사, 랄프 D. 윈터 박사, 피터 와그너 박사, 달라스 신학교 선교학 교수 조지 피터스 박사, IFMA 총무 에드윈 L. 잭 프리젠 박사, EFMA 총무 글라이드 W. 테일러 박사, WEF 국제총무 왈드렌 스캇 박사, WEC 미국본부의 아시아 총무 호레이스 S. 윌리엄슨 목사. 나는 이 여덟 서구 선교학자와 지도자들을 ‘범아시아 선교지도자 컨설테이션’에 특별 객원 참가자로 정식 초청했다. 서구 선교지도자 고위층에 대한 초청으로 말미암아 아시아 선교지도력 개발을 위한 나의 동서(east-west) 간의 협력을 위한 노력이 크게 성공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됐다.
나는 1973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한국 서울에서 개최한 ‘범아시아 선교지도자 컨설테이션’을 소집하고 그 회의를 주도했다. 아시아 13개국으로부터 26명의 선교지도자들과 특별히 초청받은 네 사람의 서구 선교학자들과 IFMA, EFMA, WEF의 세 총무단, 그리고 WEC선교회와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의 간부가 참석했고, 한국에서 사역하는 서구 선교단체 대표 12명도 옵저버로 참석했다. 컨설테이션은 ‘계속위원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과업을 추진하도록 위촉했다.
- 1974년 말까지 최소 200명의 새로운 아시아 선교사를 더 파송 하도록 격려할 것.
- 아시아의 모든 나라마다 ‘선교단체협의회’를 조직하도록 격려할 것.
- 한국에 ‘동서선교연구개발원’ 설립을 추진할 것.
계속위원회는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섬과 태국 동북지역을 200명 선교사를 집중 파송 할 대상 지역으로 선정하고, 1970년대 말까지 200명의 새 선교사를 파송 하는 일을 포함해 부과된 모든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그리고 1974년 말까지 일본, 한국, 홍콩, 인도, 그리고 인도네시아 각 나라마다 ‘선교단체협의회’를 조직했다.
나의 동서선교연구개발원 설립은 1973년 컨설테이션 직후 컨설테이션에 참석했던 네 사람의 선교학자들을 강사로 모시고 제1회 하기선교대학원을 개강함으로 시작됐다. 하기선교대학원에는 홍콩, 인도네시아, 인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5개국의 선교사 후보생들과 한국 선교사들을 합해 67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나는 계속위원회의 총무로 아시아선교협의회(AMA) 창립총회 소집을 주도해 1975년 8월 28일부터 9월 1일까지 서울의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개최했다. 아시아선교협의회 창립총회에는 방글라데시, 자유중국,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13개국 대표들과 네덜란드, 영국, 독일, 미국 등 서구 4개국 대표들이 협동대표로 참석했다.
AMA 창립총회는 총회 마지막 날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선교대회를 열고,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선언’을 1만 여 명의 신도들 앞에서 선포했다. 이 ‘서울선언’은 1966년 미국 교회의 ‘휘튼 선언’과 1970년 독일 신학자들의 ‘프랑크푸르트선언’과 짝을 이룬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인들의 ‘선교선언’이었다. 범 아시아 선교 네트워크로서의 AMA는 1975년 이래 신속하게, 그리고 아주 폭넓게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 영향을 끼쳤다.
1978년 싱가포르에서 개최한 제2회 AMA대회에 초청받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복음선교회 총무 판야 바바 목사는 AMA 대회에서 돌아가 그 다음 해에 즉시 나이지리아 복음주의 선교협의회를 조직했다.
1982년 서울에서 개최한 제3회 AMA 대회에 초청받았던 브라질 안디옥 선교회 회장 조나단 산토스 목사는 귀국 즉시 브라질 외국선교단체협의회 창립을 서둘러 1983년에 창립총회를 소집했다. 1986년 제4회 AMA 대회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에서 개최하면서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대표 수십 명을 초청하고 ‘제삼세계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9년 5월 미국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제삼세계 선교협의회를 창립했다. 이 조직은 AMA가 주도해 이뤄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세 대륙 간의 ‘세계선교 네트워크’이다.
이와 같은 나의 세계선교 네트워크에 대한 대 모험에 많은 서구 선교지도자들이 크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빌리 그레이엄에게서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에서 모이는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할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 준비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 로잔 대회 준비위원회 셋째 날 의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다.
1974년 나는 로잔 세계복음화대회 전체회의에서 선교전략에 관한 강사로 지명됐다. 나는 이 대회에서 ‘새로운 세계를 위한 선교 구조의 갱신’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나는 “서구 세계의 선교 만으로의 일방적 선교에서 동과 서가 함께하는 쌍방선교로 돌아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세계의 동과 서에는 쌍방이 모두 선교자원과 선교의 필요가 함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선교 인력의 생성과 투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동과 서가 함께 손을 잡고 선교의 가용자원과 선교가 필요한 지역을 연구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길만이 동과 서, 세계의 양쪽으로부터의 ‘선교의 새 세력’의 생산과 훈련의 창출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1974년에 계속해 스위스 샤도데이에서 모인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총회는 새로운 국제선교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한 ‘제3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나를 유일하게 제삼세계를 대표하는 위원으로 선정해 선출했다. 나는 1975년 8월 WEF 선교위원회 창립회의를 서울에서 모일 수 있도록 주도했다. (계속)
조동진 박사 (조동진선교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