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산 증인인 조동진 박사의 삶을 다룬 '나의 소명, 나의 선교행전'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동진 박사는 한국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육(1961)의 창도자이며, 비서구세계 최초의 선교사 훈련과 연구기관인 '국제선교연구원'(1963, 훗날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을 설립했습니다. 또 '아시아선교협의회'(AMA)와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등을 창립해 비서구세계 선교계의 연합을 추진했으며, 서구와 비서구권의 선교가 만나 협력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최근 열린 '2010동경대회'에서는 故 랄프 윈터 박사를 대신해 대회 전체 주제강연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조동진 박사 관련기사)

jdj.jpg부르심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셨다. 내가 집사로 봉사하던 의주군 고관면 토교동에 있는 토교교회에서 최한기 전도사를 강사로 초청한 해방 후 첫 부흥회에서였다. 최한기 전도사는 1938년 우리 민족교회에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해방되던 해에 7년 만에 출옥한 '출옥성도' 중 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이 부흥회를 통해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올렸다. 나는 어머니의 서원기도에 대해 강하게 거부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부흥회 셋째날 밤, 성령께서 나를 거꾸러뜨리셨다. 강사 최한기 전도사의 설교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그 자리에 거꾸러졌으며 어린 시절부터 지은 부끄러운 죄가 눈앞에 활동사진처럼 나타나는 순간 땅바닥을 치며 통곡하고 회개하며 기도했다. 통곡하고 애통하는 나의 기도는 삼일 심야 부흥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었다. 부흥회 마지막 날 어머니는 나의 곁에서 머리 숙여 기도하시고, 부흥강사 최한기 전도사와 담임목사 김태주 목사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이 기도와 함께 나의 생애를 바쳐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것을 서약했다. 나는 토교교회가 속해 있던 의산노회에서 목사후보생 시취를 받고 목사후보생이 됐다.

두 번째 부르심 : 무교회 면 개척전도사

1946년 2월, 소련군과 공산당을 피해 고향인 평안도를 떠나 서울로 피난했다. 나는 조선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조선신학교에서 쫓겨난 51인 정통수호 신앙동지회에 가담해 만주에서 귀국한 박형룡 박사를 따라 부산의 고려신학교로 옮기고, 또다시 그를 따라 서울에 새로 설립한 장로회신학교로 옮기는 등 세 학교를 통해 3년 간 신학교육을 받고 1949년 6월에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신학교 시절 학생회 총무였던 나는 졸업 학년인 3학년 첫 학기가 되자 매년 개최하는 학생 부흥회 강사로 여수 애양원 나환자교회 목사였던 손양원 목사님을 초빙하기 위해 나환자 병원인 애양원에 가서 손양원 목사님을 모셔왔다. 그 때가 1948년 10월 중순이었다. 그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4월 초에 있었던 제주사건의 여파가 계속되던 때였다.

손양원 목사를 모신 신학교 학생부흥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크게 나타났다. 그러나 부흥회가 끝날 무렵, 여수에서 제주도로 파견하려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여수순천사건으로 번진 것이 양민학살로 이어졌고, 결국 순천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손양원 목사의 동인, 동신 두 아들이 공산주의 학생들에게 피살되는 엄청난 참사가 있었다. 부흥회를 마친 손양원 목사와 함께 나는 순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 군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여수 애양원까지 쫓아갔다. 성령께서는 이 일을 통해 나로 하여금 다음 해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여수 지역 무교회 면인 쌍봉면이라는 무교회 면 개척전도사로 부르시는 계기로 만들어 주셨다.

1949년 6월 졸업과 함께 동기동창이던 아내 나신복과 결혼한 나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의 죽음을 마음에 안고 여수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무도 생활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여수군의 무교회 면 개척 전도생활을 위해 기차역도 없는 쌍봉면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학 우등생이었던 나는 전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 신학에는 우등생이었지만 전도에는 낙제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개척전도사 생활에 실패하면서 전도와 선교에 대해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조동진 박사 (조동진선교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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