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10동경대회에서 13일(목) 오전 Minoru Okuyama 목사(Chairman, Japanese Host Committee)가 "일본인을 향한 도전들 : 불교, 신도교 그리고 그 외의 것들"(Japanese Challenges: Buddhism, Shintoism and Others)이란 제목으로 전한 주제강연 번역 전문이다. 13일 오전에는Minoru Okuyama 목사의 강연 외에도 "Making Disciples: A Way Forward in Missions"(Rev. Gbile Akanni) "Beyond Christianity"(Rev. Kevin Higgins) "Indian Religions: Challenges and Outreach"(Rev. Susanta Patra) 등의 주제강연이 이뤄지고 있다. (동경대회 관련기사)
서론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불교도이자 신도교도였습니다. 저의 경우와 같이 우리 일본인들은 동시에 두 개의 종교를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전형적인 일본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제한된 시간에 불교나 신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적 관점에서, 불교도들, 신도교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명시적으로 다루고 싶습니다.
1. 일본인 전도의 어려움
일반적으로, 터키 사람들을 EU에 가입할 것을 요구받을 만큼 가장 현대화된 무슬림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쉽게 복음화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을 복음화 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무슬림 전도 전문가들이 제게 말해준 바에 따르면, 터키사람들에게 이슬람과 결별하는 것은 터키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터키 사람임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와 매우 유사하게, 일본 사람들도 표면상으로는 너무나 쉽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같은데, 실상은 그들의 영혼을 얻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지난해(2009년), 일본 개신교 교회는 기독교 150주년을 기념 했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1% 미만입니다. 한국과 중국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2. 그 어려움의 이유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런 현상은 일본인 목사들이나 선교사들의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 대단히 준비된 다양한 나라 출신의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만약 자신의 나라에서 사역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큰 교회를 세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일본인을 많이 구원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역가운데서 그들 자신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아시아에서 아주 큰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한 선교사가 있는데 그가 일본에 와서는 많은 영혼들을 얻지 못했고 무척이나 상심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복음전도의 방법론 때문도 아닙니다. 현재 일본에는 적지 않은 "교회 성장 세미나”, “셀 그룹 연구”들이 개최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방법론들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1%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교단은 수적 성장이 있고, 어떤 교단은 감소추세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별 변화가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왜 일본인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인지에 대한 이유가 기독교 사역자들의 자질이나, 복음전도의 방법론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유입니까? 그 이유는 일본인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바로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중국인과 한국인은 사고방식에 있어 일본인보다는 유럽인에 더 가깝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중국인, 한국인들은 인간관계보다는 진리나 원리를 더 중시하는데, 일본인들은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매우 정확하고 중요한 관찰인데, 대중적인 의견을 조사하는 설문조사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를 들면, NHK(Nihon Hoso KyoKai)가 무작위로 천명을 선택하여 종교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기독교가 36%로 최고치로 나왔습니다. NHK는 이번에는 정치적으로 좌익그룹과 같은 극단적인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매우 평범하고 일반적인 일본인들만을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놀랍게도 70%나 되는 사람들이 가장 희망하는 종교로 기독교를 꼽았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인들은 기독교가 가장 바람직한 종교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는 나오지 않는 걸까요? 왜냐하면 기독교가 최고의 종교임을 알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가족이나 이웃관계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진리보다는 인간관계를 더 중요시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조화입니다: 일본말로 “Wa"입니다.
3. 일본의 불교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형성된 배경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는데, 자연스럽게 떠오를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불교가 중국과 한국에서는 다른 사고방식을 형성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의 불교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복잡한 불교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식견 있는 일본인들은 일본의 불교에서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쇼꾸타이시(AD 574-622)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너무나 “Wa"를 강조한 나머지 그런 정신은 일본인들의 마음가운데 깊게 파고들었고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화를 깨는 자들은 그들이 옳은 여부에 관계없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일본 사회의 모든 면에서 이런 경향을 보는데 심지어 기독교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JEMA(Japanease Evangelical Missionary Association)는 현재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는 이 천 명의 선교사로 구성되어있는데, 복음주의와 오순절주의의 장벽을 넘어서서 초교파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본교회에서는 아직 이 큰 장벽을 넘지 못합니다. 만약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어떤 목회자들이 그 장벽을 넘어서는 시도를 하면, 그들은 혐오스럽고 조화를 깨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물론 어느 곳이든지 구도자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인류학자들의 말처럼 일본인의 대다수는 진리보다는 인간관계가 중요하고 이점이 바로 많은 일본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인들과 다르게, 중국, 한국인들은 인간관계보다는 진리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이 왜 중국과 한국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이유입니다. 기독교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1982년, 제가 “생수 프로젝트”라고, 백 만권의 성경을 중국의 가정교회에 보내고자 했을 때, 세계 대전 전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Jiro Fukui 목사님이 너무나 기뻐하며 이런 말로 저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진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저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후꾸이 목사님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진리와 인간관계 중에서 선택을 요구받을 때, 인간관계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선택하지만 우리 일본인들은 진리를 희생할지라도 인간관계를 선택합니다. 중국인과 똑같이 한국인도 진리를 선택합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일본은 “인간관계 중심적 사회”이고, 중국과 한국은 “원리 중심적 사회”라고 말합니다. 인간관계 중심적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원리 없이도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원리 중심적인 사회에서는 원리나 진리 없이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이 십 년 이상, 저는 성경을 보내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중국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접하고 교제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중국에서는, 무수한 젊은이들이, 마오쩌뚱 사상과 현대주의 사이에서의 헤게모니 쟁탈과 같은 정치적인 혼란으로 말미암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삶의 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그들이 기독교 안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원리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교회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왔습니다. 현재 중국에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공산당 당원의 숫자를 웃돕니다. 중국 공산당 당원의 숫자는 현재 대략 오천만 정도인데,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그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큰 도시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도 커다란 예배당들이 많습니다. 일본과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이유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일본인들은 인간관계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명백한 이유는 일본 불교 때문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조화(Wa)가 일본 불교에서 진리에 비해 너무나 강조되었습니다. 동시에,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절대주의는 외면되고 상대주의가 높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무수한 일본인들은 “저는 기독교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장하는 절대성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 불교가 강조하는 조화와 상대주의에 대한 강조는 일본인들에게 복음의 걸림돌입니다. (물론 약간의 예외도 있는데, 니찌렌 불교는 진리와 절대주의를 높게 평가합니다).
4. 신도
그러면 신도는 어떤가요? 신도는 원래 일본 종교인데 매우 복잡합니다. 인종학자 마사키 수가타는 신도에 관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책 중에 한 권은 신도의 신들의 이름을 수록했는데 무려 22페이지나 할애합니다. 신도는 완전히 다신교이며 매우 애니미스틱 합니다. 애니미즘에서는 어떤 것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산, 강, 동물, 심지어 사람등. 어떤 신사에서는 여우를 섬기고, 다른 곳에서는 뱀 따위를 섬깁니다. 그러나 많은 신도교의 전문가들에 따르면 원래의 신도는 다신교가 아니라 일신교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사기(Kojiki)에서 “아메노미카누시”는 “하늘의 중심에 앉은 바로 그 신”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창조주에 대한 이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관점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왜 그런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관점이 일본인들의 마음에 심겨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다신교적 영향력이 일본인에게 들어왔는가? 아마도 신도는 후손들에게 일신교적 사상을 심어주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현재, 신도는 애니미즘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해 있습니다. 그리고 신도의 애니미즘은 일본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는 바대로, 진화론의 전제를 따르면, 태초에 다신교가 있었고 점차적으로 진화되어 일신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태초에 유일신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인간은 다신교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신도는 일본인들에게 유일신 사상을 전수해주는데 전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신도와 구약성경의 유대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코지 쏘마씨가 그의 웍샾에서 분명하게 다룰 것입니다).
5. 애니미즘 세계에서의 기적
이런 상황에서, 그들 가운데 구원의 소망은 있는 것일까요? 사실, 기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갑자기 어떤 정치적 사회적 격변을 통해 무수한 사람들이 미얀마와 인도의 산간 지역에서, 그리고 인도네시야의 칼리만탄의 정글의 다약족 가운데서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복음을 외면해왔던 사람들입니다. 명백한 것은 몇 백년간에 걸쳐 뿌려온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씨앗은 생명력과 힘을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결코 땅에 헛되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누가 압니까? 어느 날 갑자기 수많은 일본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물밀듯이 나아올지? 1968년, 저는 많은 다약 사람들, 한때 식인종이었던 그들을 인도네시야의 서부 칼리만탄(보루네오) 정글에서 세례를 베풀고 많은 교회들을 세운적인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복음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랬을까요? 미국 개혁 교회가 그 일을 했습니다. 백년도 훨씬 넘게 결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너무나 갑자기, 추수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소책자를 나눠주고, 축호 전도를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사역도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등등“. 그는 복음의 씨앗의 생명력을 모릅니다. 다시한번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의 씨는 결코 땅에 헛되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할 일을 그저 합시다.
결론
이제 우리는 우리의 복음전도사역에서 해야 할 바를 압니다. 어떤 나라이든 어떤 선교지이든,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단지 순종할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도(즉, 케리그마)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초대교회와 사도 바울은 이 명령에 100% 순종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행 5:28, 19:10) 왜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세계의 마지막(마 24:14), 즉 종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계 선교에 대한 우리 과업의 성취를 말합니다. 그것이 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딤후 4:2), 옥토와 같은 선교지이든지 황무지이든지 천하에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그렇게 되면 끝은 올 것입니다. 마라타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Minoru Okuyama 목사 (Chairman, Japanese Host Committee)
번역 및 통역 : 정희경 선교사 (서울다문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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