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 한국에 이슬람이 다가온다’는 이슬람 포비아(Islamophobia) 바람이 선교계에 화두였다. 한국 이슬람화 전략에 얽힌 논쟁이었다. 일부 선교계는 강경파(매파)와 온건파(비둘기파)의 대립으로 보기도 했다. 강경파든 온건파든 소모적인 흑백논리는 반대한다. 핵심은 이슬람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슬람의 해석과 적용엔 온건과 강경의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문제는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어떤 문제나 사건을 접근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사실과 진실은 논의의 출발점이 분명해야 한다. 결론은 이슬람 포비아 논의가 불확실한 출발점에 있었다는데 있다.
몇 해 전만 해도 한국교회 안팎의 이슬람 논의엔 관심이 거의 없었다. 이유는 하나다. 이슬람은 위협적인 종교이고 무슬림은 만만히 봐서는 안 될 존재라는 공감대 때문이었다. 이런 이상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쪽에서는 강경하게, 다른 한쪽에서는 온건해야 한다는 식의 갑론을박이었다.
진리는 진실 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가상의 이미지로 특정 집단과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인종 편견·인종 차별·인종 혐오는 범죄 행위이다. 한국인의 독특한 순혈주의는 타 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우월감으로 표현되곤 한다. 단순화하면 한국인들은 서구인보다 동남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 국내 외국인 노동자들, 재미동포보다 재일동포나 재중동포(조선족)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무슬림이라는 이유 만으로 눈 밖에 난 사람들이 되어선 안 된다. 한국교회 안팎에 불고 있는 이슬람 포비아(이슬람 혐오증)현상은 이슬람 선교를 가로막는 행위이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한국인으로선 건강하지 않는 태도다. 민족과 족속과 열방과 나라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이 가져야할 태도가 아니다.
필자는 지난 26년간 무슬림 사회에서 살았다. 필자가 만난 무슬림들은 보편적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단적으로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 보다 종교적 열심과 선행적으로 비교우위다. 대학교수, 변호사, 사업가, 수퍼마켓 주인들은 종교관이 달라서 였지 보편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들었다. 필자가 고국으로 가려고 짐 정리하고 있었다. 무슬림 친구들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자기 집에 초청하는 일이 기독교인 보다 많았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차이가 있을 뿐 주위에 무슬림들은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필자는 어느 날 시골에서 길을 잃었다. 외국인 가족이 길 잃은 것을 보고 한 무슬림 청년이 15킬로를 자기 차로 데려다 주었다. 이슬람 종교와 무슬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무슬림이 두려운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선교에 도움이 안 된다.무슬림 사역의 첫 단추는 편견이 없어야 한다. 이슬람 종교와 무슬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변화하는 이슬람 선교를 하기 위해선 3 가지를 읽어야 한다.
첫째, 기다림의 선교를 배워야 한다. 이슬람 사역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무슬림들을 당대의 회심(Conversion)으로 끌어오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지난 이슬람 선교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슬림을 당장 개종시켜 복음의 일꾼으로 만드려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만약 당대의 회심으로 일꾼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을련지 모르지만 재생산은 어렵다. 필자가 사역하며 아쉬움은 대부분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당대 예수 믿고 끝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부자 운동(Insider Movement)도 당대 회심으로 끝나는 위험성이 있다. 무슬림지역에서 사역자들이 배워야 할 점은 기다림의 선교를 배워야 한다. 한 무슬림이 움마 공동체에서 회심하려면 최소한 10-20년 걸린다. 필자는 한 무슬림인이 기독교인이 되기까지 10년을 기다렸다. 한 무슬림이 움마 공동체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 쉽지 않다.
무슬림 지역에서 사역자들의 종종 실수하는 것은 당대에 무언가 결말을 보려는 데 있다. 당장 성급한 열매는 오래가지 못한다. 무슬림 지역 사역자들은 무슬림 한 사람이 개종하고 돌아오기 위해 기다려 줘야 한다. 사역자들이 무슬림이 개종하면 성급한 나머지 급조된 리더를 만드려다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역자가 자기 사람을 만드려다가 생긴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의 조금함과 기다림은 사역자가 결정해야 할 과제이다.
둘째, 도시화 현상이다. 세계가 도시화 현상으로 몸살을 하고 있다. 무슬림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슬람 지역도 청년 일차리 창출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세계 10 무역 수도 중 하나인 이스탄불은 인구가 1,700만 명을 상회한다. 이곳 대 도시에 유입되는 유동 인구까지 합하면 2,000만명을 상회한다. 코스모폴리탄인 이스탄불 도시는 다 민족들이 다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세계가 도시화 현상으로 중동 사회도 무슬림의 근간인 움마(Umma)공동체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시골엔 무슬림 움마 공동체의 결속력이 강하지만 도시는 상황이 다르다. 도시는 시골처럼 공동체가 약하다. 대형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관심 밖이다. 분주한 일상에 젖어있다. 핵가족으로 자기 가족 챙기기에 바쁘다. 직장과 일터에서 종일 일로 피곤해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도시화 현상은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개인주의로 변하고 있다. 무슬림인들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익명성이 보장된 사회를 원한다. 도시화 현상의 대표적인 실례이다. 향후 무슬림 사회 도시화 현상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셋째, 산업화 현상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조어를 알고 있다. ‘링반데룽(Ringwanderung)’이라는 용어다. 등산을 하다 길을 잃고 방향을 찾지 못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길 잃고 주변을 뺑뺑 도는 ‘환상방황’이 링반데룽이다. 이것은 등산에서 뿐 만 아니라 개인이나 단체가 한 목적으로 정한 어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교착상태에 빠져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을 링반데룽이라고 한다.
최근 경제상황을 놓고 국내에서 벌이는 위기냐 아니냐 축소냐 부풀리기냐로 갈라지는 논쟁의 핵심도 ‘링반데룽적 요소’가 숨어 있다. 북한을 놓고 벌이는 성격과 대처 방식의 논쟁에 나타나는 첨예한 갈등의 핵심에도 동일하다. 행정수도 이전이니 천도니 하는 숨가쁜 논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링반데룽 현상이다. 한국 선교는 위기냐 기회냐가 찬반론이 엇갈리고 있다. 방향을 잃고 헤매는 난파선과 같다. 바다에서 링반데룽이 바로 난파요 표류다. 끝없이 계속되는 표류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지만 오늘날 한국선교의 혼돈도 산업화 진통과 무관하지 않다.
중동의 민주화으로 이슬람 블럭의 도미도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일이다. 이슬람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이 보여준 현상이다. 청년 일자리 창출은 없고 소비현상만 나타나는 현상에서 비롯되었다. 가진자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데서 일어난 현상이다. 빈부격차가 심각해 지면서 산업화 현상은 링반데룽으로 맴돌고 있다.
일련의 이슬람 사회가 교착상태에 있을 때 복음의 호기임을 인식하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틈새를 보고 전략을 세워야 호기를 맞을 수 있다. 이슬람의 공백(자스민 혁명)을 이용해 복음의 수용력으로 끌어내야 한다. 이슬람에 대한 환멸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슬람 포비아처럼 비본질적인 일로 아군과 싸우지 말고 선교 본질을 찾는데 해법이 있다.
조용성 GMS 선교훈련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