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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세속화였습니다. 그 한 사례가 에스라서 9~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속화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와 흐름을 따라 살아가는 성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현세에서의 번영과 물질적 안락과 정서적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속화되었다’는 것은 신앙과 성경을 내 삶의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시 하나님 백성들의 세속화의 문제는 잡혼이었습니다. 많은 남성이 그 땅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왜 죄가 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이러한 혼인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11, 12절). 이로 인해 이방인의 풍속인 우상숭배에 감염되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방백들과 고관들이 으뜸이었습니다. 에스라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이로 인해 임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를 직감했고, 깊은 슬픔과 절망에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었습니다(3절).
오늘 말씀은 신앙공동체가 세속화에 어떻게 맞서야 할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떠는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4절). 그동안은 죄를 짓고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몰랐습니다. 지도자들이 이렇게 살아가니 세속적 가치관을 당연한 듯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의 모습을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에게 몰려갔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떠는 것, 이것이 경건의 시작입니다.
마틴 루터가 수도사의 길을 결심한 것도 이런 두려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날로부터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퀘이커(Quaker)라는 교단이 있습니다. 개신교의 한 분파로 17세기 청교도운동의 급진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지 폭스에 의해 시작됐는데 퀘이커라는 말은 ‘진동하다, 떨다, 전율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듣거든 떨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옛날 모세와 출애굽 세대들도 광야 길을 가는 중에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두려움에 엎드려 떨었습니다.
기독교 대각성운동은 바로 이런 두려움에서 시작됐습니다. 1907년 평양 대각성운동 역시 그랬습니다. 이는 조선 기독교의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됐고, 절망 중에 있던 조선에 희망의 불씨가 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는 죄로 인해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어야 합니다. 이 ‘거룩한 떨림’이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라는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5~15절). 그리고 자신이 지은 죄인 것처럼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민족공동체는 탈 세속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이 한 사람 에스라에 의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는 지금 세속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배성태 목사(명선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