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타밀나두주 마두라이 근처의 불가촉 천민(달릿) 마을의 타작하는 사람들
▲인도 타밀나두주 마두라이 근처의 불가촉 천민(달릿) 마을의 타작하는 사람들 ⓒ위키미디어
인도 기독교 안에서 있었던 카스트 논쟁들 가운데 그 두 번째 논쟁은 1824년에 있었던 남인도 타밀나두주에 속한 탄조르에서 있었던 논쟁이다. 이 논쟁은 인도의 개신교도에 의해서 일어났던 최초의 공식적인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당시 인도 기독교인 가운데서도 존재했던 카스트 및 기타 문화적 관습을 공격한 젊은 서양 선교사들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탄조르와 기타 지역의 많은 기독교 지도자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유럽의 관습과 관행을 오만하게 적용하여 인도의 문화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유럽의 선교사인 히버 주교에게 호소하였다.

히버 주교는 카스트 분쟁이 남인도의 많은 교회에서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당시 인도 기독교인들 가운데 널리 존경받는 인도인 목사 데이빗과 상의하였다. 히버 주교가 요구한 조사에서 데이빗 목사는 카스트 관련 문제에 대해 보고하기를, 카스트가 대부분의 인도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계급 개념이지만 그 자체가 미신적인 것은 아니며, 카스트의 순위는 부나 직업에 따른 순위와는 종류가 다르다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높은 카스트에 속한 기독교인들도 낮은 카스트에 속한 목회자나 전도자들의 말을 존경하는 태도로 듣는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카스트와 관련된 관행들에 대한 문제점들은 근거가 약하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데이빗의 권고는 주교가 후배 선교사들의 성급함과 회중의 관습과 감정을 무시한 태도에 대해 질책하라는 충고였다. 동시에 개종자들에게 목회 서한을 보내 성경을 인용하여 복음에 반하는 카스트의 교만한 특성을 그들에게 설명하라고 하였다. 탄조르에 있었던 인도 기독교인들은 카스트 구별이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시민적이며, 유럽의 사회적 계급이나 경제적 계급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젊은 유럽의 선교사들이 사회 질서의 시민적 측면과 종교적 측면 사이의 구분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 문화 전체를 잘못 비판했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인도 기독교 안에서 있었던 세 번째 카스트 논쟁은 1834년에 있었던 마드라스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1834년 마드라스(첸나이)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학교에 소속된 젊은 개종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었다. 학교 설립자인 존 앤더슨은 그의 학생들 중 여섯 명의 개종자에게 카스트에 관한 다섯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들 모두는 건전한 교육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카스트를 포기하였다. 그들은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는 강력한 노선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의 주장은 기독교에 대한 놀라운 이해와 카스트와 힌두교의 진정한 본질을 모두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식민지로 살아가던 시대에 카스트 제도에 대한 두 가지 다른 태도가 인도 기독교인들 사이에 만연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낮은 카스트 출신의 개종자들은 카스트 제도를 하나의 문화적 장치로 다루는 카스트의 규칙에 집착했다. 반면에 상층 카스트 출신의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카스트를 포기했으며, 개종 당시에 행했던 카스트로부터의 단절은 그들에게 있어서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카스트 제도는 주로 힌두교와 관련된 종교 제도였다. 앤더슨과 그의 개종자들은 카스트 제도가 기독교의 핵심적인 정신인 사랑과 겸손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카스트 제도가 복음과 기독교의 전파에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유럽의 식민지 시대라는 인도교회 역사의 후대에 들어서자, 상층 카스트의 경우 개인 개종을 통하여 자신의 카스트를 포기하고 집안으로부터 쫓겨남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하층 카스트의 경우 상당수가 집단 개종을 통해 카스트의 범위 안에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인도 기독교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카스트 제도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인도 기독교 안에서 존재한 서로 다른 두 카스트 집단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yoonsik.lee201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