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도행전 28:11-31
요절: 사도행전 28:30, 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 찬양드립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크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60년 전에 우리 모임을 이 땅에 세우시고 캠퍼스 제자양성을 통한 세계선교를 흥왕하게 이루어 오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시간 사도행전 28장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과 비전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에 와서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암살 모의 때문에 가이사랴로 호송되었고, 거기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약 2년간의 가이사랴 구금생활을 마친 후에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A.D. 60년 가을 무렵이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아드리아 해에서 광풍을 만나 큰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배는 파선하였지만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 안착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섬에서 독사에 물렸지만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이런 그를 신으로 여겼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바울은 그 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또한 마침 그의 부친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병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 섬의 많은 병든 사람들이 바울에게 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28:7-10) 바울이 그렇게 그 섬에서 겨울을 나며 지낸 기간이 석 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압비오 가도를 걸어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압비오 가도(Via Appia)는 로마에서 시작하여 남동쪽의 풀리아(Puglia)주의 브린디시(Brindisi)까지 이어지는 잘 정비된 길이었습니다. 이 도로는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건설된 길로 도로의 여왕으로 불렸습니다. 로마인들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이 도로를 통하여 나아갔습니다. 개선장군들은 그 길을 통해 팡파르를 울리며 로마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복음을 들고 로마를 정복하기 위한 영적 개선장군으로 이 도로를 통해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로마 제국에 놀라운 혁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들어갔을 때 재판 당국으로부터 특별한 호의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공공 감옥에 다른 죄수들과 함께 갇히지 않고,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아직 죄가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요, 또한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의 목숨도 구해주었기에 특별한 선처를 해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였습니다. 바울이 머문 곳은 "셋집"이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뜻하신 바울의 로마 선교여행의 목적지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의 셋집에서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들이 왔을 때 바울은 그들이 들었던 루머에 대해 겸손히 해명합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을 배척하였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자기를 심문한 로마인도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그를 석방하려 하였지만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임을 알렸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오해도 불식시키고자 겸손히 조근 조근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가 황제의 재판을 받게 된 이유를 말합니다. "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0)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과거의 다윗 왕국과 같이 강대하고 부강한 나라를 회복할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참 소망은 그런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스라엘의 소망은 잠시의 세상 복락이 아니라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는 참된 소망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멸망할 인생들을 부활시켜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들이시는 소망이었습니다. (행24:15)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믿음으로 얻는 이 참된 구원의 도리를 힘써 증거하였습니다. 이 구원의 복음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주시는 것이요,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참된 소망을 증거하였기에 세상적 메시야를 고대하는 유대인들이 그를 박해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매인 바 된 것입니다.
이런 바울에 대해 유대인 지도자들은 말하기를 그들은 유대에서 그에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그에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아는 바는 바울이 따르는 파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다는 사실뿐이라고 하였습니다. (21,22) 이에 그들은 날짜를 정하고 바울이 머무는 집에 많이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였습니다. 그가 강론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하여 권하였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영적이었고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한 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25b-27) 이는 본래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위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내게로 돌아오라! 내게로 돌아오라!", "Turn!" "Turn!" 호소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그들을 고쳐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돌이키지 않음으로 바벨론에게 비참하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것을 안타까워 여기며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믿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28) 그는 구원의 복음을 거절하는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지는 것을 영접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들을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힘써 한 일이 무엇입니까? 30,31절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에 대한 재판은 무려 만 2년이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바울을 고소한 자들이 증거부족으로 재판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그의 셋집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다 영접하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들레지 아니하고 조용하지만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심었습니다. 셋집에서 온 이태를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바울은 셋집이라는 자기 한계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셋집은 그 안에서는 약간의 자유를 누렸지만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그는 물리적인 한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의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대필을 해야 할 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시와 같은 육체의 질병도 있었습니다. 동족들은 지금도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러한 한계 상황에 갇혀 "나는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상황이 좋아지기를 기다려야지. 그저 제가 빨리 석방되도록 기도해주세요." 라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긍정적인 관점을 가졌습니다. 그랬을 때 셋집은 아주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셋집에서 천막을 깁는다는 등 어떤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풀타임으로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에서 알아서 먹여주고 재워주었습니다. 군인 한 사람씩 교대로 지키게 함으로 그의 신변도 든든하게 보장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핍박을 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주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양들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양들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무엇보다 정시에 교대하는 간수들은 그의 고정 양들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좋은 면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열심히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였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자유민이든 노예든 다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셋집이라는 자기 한계를 뛰어 넘어 만 2년 동안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둘째, 바울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지만 그가 전한 말씀은 밖으로 나갔습니다. 바울은 일찍이 에베소 개척 시에 밖에 나가지 않고 오직 두란노 서원에 거하며 두해 동안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어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은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행19:10) 그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도 정복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행19:21) 그는 디모데후서 2:9절에서도 말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는 자기는 매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음을 확신하고 그의 셋집에서 줄기차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는 셋집에 있으며 그 유명한 옥중서신들 곧,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써서 보냅니다. 그의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간수들을 통하여 온 시위대 안과, 가이사 황제 집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빌1:13, 4:22)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은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회심하고 기독교를 공인합니다. AD 391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합니다. 바울이 셋집 안에서 전파한 말씀은 밖으로 나가 로마제국을 정복하였고 로마제국을 통해 전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습니다.
셋째, 바울이 가르친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고자 하시는 가장 좋은 선물이요 복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참된 영적인 복에 눈이 가려져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 따라 살며 세상에서의 성공과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일시적인 것이요 결국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들입니다. 결코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그 나라만이 고통이 없고 죄와 죽음이 없는 영원한 평강의 나라, 생명의 나라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우리의 참된 소망으로 이 나라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1:3,4)
우리 주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영원한 파멸에 처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주십니다. 이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의 주요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주요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천하 사람 중에 예수 외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십니다. (행4:12) 우리가 영원히 썩지 않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붙들고 살며, 힘써 이 참된 소망을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우리는 셋집에서 말씀을 가르친 바울을 통해 가정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바울의 셋집은 성전이나 예배당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주거 공간이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식사를 하였고 잠을 잤습니다. 말씀 연구를 하였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셋집에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며 그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House Church 역사를 섬긴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전 세계에 400개 이상의 지부가 있습니다. 규모가 큰 지부도 있지만 대부분이 하우스 처치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 지역에는 한 가정만 있기에 양들을 돕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 선교 동역자들이 모여 있어서 함께 양들을 섬기면 제자양성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한 가정만 있다고 하여 이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가정교회의 목자로서 자기 집에 양들을 초청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고 깨는 중에 자라 점점 확장되어 나아갈 것을 믿고 양들의 심령에 말씀을 깊이 심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섬김에 있어서 그의 셋집은 최적의 환경이었습니다.
저는 1993년에 영국 런던에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개척역사를 섬겼습니다. 제가 다녔던 해운회사의 런던 주재원으로 그곳에 나아갔습니다. 처음 수년간 영국에 저의 가정만 있었기에 저의 집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일대일을 하였습니다. 캠퍼스 학생을 일대일 공부나 예배를 위해 집에 초청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캠퍼스 피싱을 나갔지만 처음 온 이태 동안 한 명의 학생 양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1995년 봄 어느 날 한 런던대 미대 학생을 저희 집에 겨우 초청하였습니다. 그가 저희 집에 와보니 집안 분위기가 단순하고, 제 아내가 영국 음식을 맛있게 준비해주고, 또 두 딸아이들이 기쁨으로 환영해주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이 확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린 딸들은 의심 많은 학생들에게 우리가 그를 가족으로 영접하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하우스 처치가 도리어 양들의 마음에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고 사랑을 나타내주는 좋은 환경인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저의 셋집과 같은 방 두개짜리 작은 아파트 거실에서 매주 한 번씩 하는 일대일 공부는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희 집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 처음 3년 동안 예배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저는 다른 양이 없었기 때문에 이 형제 한명을 마음을 다해 말씀을 깊이 준비하여 집중적으로 섬겼습니다. 일대일을 3년간 꾸준히 했을 때 그의 마음에 심겨진 말씀은 그를 변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저희 집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에도 나오게 되었고 양을 치는 목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지금은 한 지부를 개척하는 교수목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런던 UBF 책임자인 폴 리지 목자를 비롯하여 여러 영국 목자들을 세워주시고 현지인 리더십을 확립해주셨습니다. 저는 그와 처음 일대일을 한 1995년 이후 지금까지 지난 26년간 매주 그와 말씀공부를 하며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목자들, 선교사들도 이 나라가 다시 한 번 위대한 목자의 나라가 되는 비전 가운데 길게 보면서 줄기차게 말씀을 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셋집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심은 말씀은 250년 후에 로마제국을 정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역사는 하우스 처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가정교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오직 말씀의 능력을 의지하여 꾸준히 일대일 역사를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셋집에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는 진행형으로 끝납니다. 본문은 지금도 바울이 어느 셋집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바울의 후예들을 통하여 사도행전 29장을 써 가는 중이십니다. 특별히 주님은 한국과 전 세계의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60년 전에 우리 모임을 세우셨습니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세계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나라에 하나님은 이사무엘, 마더 배리 선교사님들을 우리 공동체의 설립자요 우리의 영적 부모로 세우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가난과 운명 가운데 있던 한국 캠퍼스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소망과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들이 한국과 전 세계를 먹이는 목자요 선교사들이 되며, 또한 한국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는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하나님의 위대한 비전에 사로잡혔습니다. 가난과 운명의 돗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세계선교 제자양성의 부르심을 영접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런 보장도 없이 이역만리 선교지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을 통해 지금까지 전 세계 100여개 국가에 1,800 명이 넘는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선교사님들이 전 세계를 섬기기 위해 나아간 이 일은 우리나라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임을 믿습니다. 이 놀라운 일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강권된 역사, 불같이 휘몰아치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귀한 생명의 역사에 쓰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연약하고 비천한 우리들을 이와 같이 귀히 사용하여 주신 것을 인하여 이 시간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지난 60년을 돌아볼 때 앞으로도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과 같이 일대일 말씀 공부를 통한 전 세계 캠퍼스 제자양성임을 믿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코로나로 인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우리가 자고 깨는 가운데 스스로 성장하고 확장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십니다. (사55:11)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거듭나게 합니다. (벧전1:23) 말씀은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정적인 마음, 자족하는 마음, 미지근한 마음을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힘써 캠퍼스 제자양성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 마음을 드리고 힘을 다하여 말씀 전파에 헌신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진심을 드리는 것이요, 우리의 몸부림이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하는 기도, 행동하는 믿음인 일대일 전투를 받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구체적으로 각 가정교회마다, 또한 지부마다 간절히 기도하며 주일 예배수의 두 배수 일대일에 도전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디 이를 축복하시고 다시 한 번 우리 가운데 강력한 성령의 역사,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주시옵소서! 2041년까지 1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사 미개척 140개국과 전 세계 233개국 캠퍼스 개척을 이루어주옵소서! 이 모든 일을 통해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아멘!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