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jpg수단 남부 보르(Bor)의 성공회 주교 나다니엘 가랑(Nathaniel Garang) 신부는 70대로 수단 남부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딩카(Dinka) 부족의 일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랑 주교는 딩카 부족 중에서도 먼저 기독교인이 되었고 교육을 받았던 딩카 부족의 한 분파인 보르 딩카(Bor Dinka) 부족이다. 1905년 나일(Nile) 강 상류에 세워진 보르 딩카 부족의 역사적인 성공회 성당은 수단의 오랜 내전 기간 동안 주요 공격 대상이 되어 상당히 파괴되었다. 수단 북부의 아랍계 무슬림과 남부 지역의 기독교인과 정령숭배자들 사이에 벌어진 내전은 다행히 지난 2005년에 중단되었고 보르에 있는 파괴된 성공회 성당은 다시 수천 명의 신도들이 예배를 드리러 찾아오는 예배 처소가 되었다.

가랑 주교는 내전 중에 발생했던 여러 기적들을 딩카 부족의 신실한 기독교 신앙 덕분으로 돌렸다. 가랑 주교는 딩카 부족들은 동물 제물의 피가 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가랑 주교는 다시는 내전이 발발하지 않고 이제는 전쟁 대신 일을 하고 평화와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2010년 4월 선거에서 북부의 주요 야당이 선거에 불참하였고 남부에서는 과거 반군 단체의 정치조직인 수단인민해방운동(the Sudan People’s Liberation Movement, SPLM)이 손쉽게 선거에서 이김으로 인해 북부 출신의 아랍계인 오마르 알 바시르(Omar al-Bashir) 수단 대통령은 어렵지 않게 대통령직에 유임할 수 있었다. 이제 남부 사람들은 2011년 초에 예정된 독립을 위한 국민 투표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남부 사람들은 분리 독립에 표를 던질 것이고. 독립이 성공한다면, 1993년 에리트리아(Eritrea)가 독립한 이후 아프리카 대륙에서 신생 독립 국가가 생기는 것이다.

수단 남부에 세워질 새로운 국가의 공식 명칭은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딩카 부족의 생각이 좌우할 것이다. 딩카 정치인들은 국가의 예산뿐만 아니라 문화까지도 지배할 것이다. 남부의 9백만 인구 중 최소 1/4은 딩카 부족이다. 20년 동안 남부 저항세력의 지도자였던 존 가랑(John Garang)은 가랑 주교의 친척이자 딩카 부족이었다. 2005년 헬리콥터 사고로 존 가랑이 죽자 살라 키르(Sala Kiir)가 그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살라 키르도 역시 딩카 부족이다. 최근 그는 선거유세 일정을 존 가랑의 묘에서 시작하였다. 케냐의 키쿠유(Kikuyu) 부족처럼, 딩카 부족은 남부의 다른 40여 부족들로부터 수단 남부의 국가 건설 이야기를 딩카 부족의 입맛에 맞게 고쳐왔다고 비난 받고 있다.

보르 딩카 부족의 땅은 넓고 비옥하지만 평지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물이 몇 달 동안 고여 있게 되고. 5월부터 10월까지 딩카 부족은 외부 세계와의 소통이 단절된 채 습지에 고립된다. 수수(sorghum)의 추수는 강수량에 영향을 받는다. 2010년에는 추수가 늦어 수확량이 좋지 않다. 곡식 경작은 믿을 만하지 않다. 딩카 부족은 소에 아주 많이 의지하고 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족이다. 딩카 부족에게 소는 교육이나 맑은 물 보다 더 귀한 존재이다. 딩카 부족은 소의 색깔의 이름을 따서 아이들의 이름을 짓기도 하고, 소를 이용하여 결혼 협상을 하기도 한다. 농촌 지역에서는 얼마나 많은 소를 가지고 있냐에 따라 계층이 결정된다. 딩카 부족이 다스릴 수단 남부의 이상향은 모든 사람이 초원에서 맨 몸으로 달리는 것이라고, 남 수단의 새로운 수도가 될 주바(Juba)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말했다.

남부의 다른 부족들도 소를 똑같이 귀하게 여긴다. 보르 딩카 부족은 종종 남부에서 두 번째로 큰 부족인 누어(Nuer) 부족과 전쟁을 벌여 왔으며, 특히 적은 목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르에 가까운 딩카 목축장을 예사롭지 않게 침입하는 무를레(Murle) 부족을 두려워하여 왔다. 딩카 부족은 누어 부족인이 성격이 급하고, 무를레 부족은 야만스런(mad) 부족으로 폄하하여 왔다. 딩카 부족의 장로(elder)들과 일부 외부인들은 무를레 부족이 무기와 대형 트럭을 수단 남부의 오랜 숙적인 수단 수도 카르툼(Khartoum)에 거주하는 아랍 부족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아직 증명되지는 않고 있다. 반면 북부 사람들은 딩카 부족이 남부를 지배하기 위해 오랫동안 다른 남부 부족들 사이를 분열시키고 또 이들 부족들 사이에 경쟁의식을 불러일으켜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부가 독립을 하여 공동의 적이 없어지게 되면 남부 부족들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2009년 한 해 동안 부족간 소 쟁탈전으로 2,500명이 사망하고 400,000명이 집을 잃었다. 1991년 누어 부족은 보르에서 딩카 부족을 대량 학살한 바 있다. 일부 딩카 부족은 당시 수만 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공격을 주도했던 누어 부족이자 남 수단의 리엑 마카르(Riek Machar) 부통령은 딩카 부족이 과장했다고 말했다. 보르의 딩카 부족 관리들은 대량학살을 용서했지만 잊지는 않고 있다고 말한다. 마카르 부통령은 2002년 수단인민해방운동(SPLM)의 지도부와는 화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남부 저항세력의 지도자인 키르(Kiir)는 딩카 부족과 누어 부족 사이의 경쟁의식이 다시 폭력적으로 변할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키르는 이러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누어 부족과 우간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에쿠아토리아(Equatoria) 부족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데 연방차원의 협의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키르는 지금까지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서 무마하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불만은 더욱 높아져만 갔으며 연방 군대는 엉망이 되었다. 딩카 부족들은 부적합한 누어 부족들이 과도하게 승진했다고 불평하고, 다른 부족들은 딩카 부족들이 가장 수익성이 좋은 자리를 장악하고 있다고 비난을 하고 있다.

남 수단이 번영하기 위해서 딩카 부족은 권력을 공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효과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내전이 끝나면서 200만 명의 남부 수단 출신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내전 전보다 4배 더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로 몰려들었지만 남 수단의 행정은 혼란상태이다. 외국에서 원조로 들어온 수백만 달러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남 수단 전체에서 포장된 도로는 50킬로도 채 되지 않으며, 또한 앞으로의 주요 도로 건설에 대한 계약들도 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남 수단의 수도 주바의 딩카 부족 출신 장관들은 기계를 들여와 땅을 갈아 민생고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트랙터를 운전하고 작물을 경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딩카 부족 남성들은 육체노동을 경시해 왔고 소수의 남성만이 기술을 갖고 있다. 보르에서 실제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간다와 에티오피아에서 온 사람들이다. 노동은 딩카 부족의 강점이 아니라고 딩카 부족 관리들도 인정하고 있다.

The Economist, 한국선교연구원(krim.org) 파발마 7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