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 연동교회 목사
본문: 잠언 8:1-4, 고린도전서 2:6-8
서론
제가 오래 전 학생 때의 경험입니다. 그 당시에는 은사집회라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 방언도 하고, 병도 고치는 그런 유의 집회였습니다. 하루 저녁에는 모두가 통성기도하며 여기저기에서 방언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어떤 아주머니가 이상한 방언을 하였습니다. 그 때 강사목사님이 내려오셔서 막 야단을 치면서 그 아주머니에게 마귀방언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데 욕심으로 달라고 하니 마귀가 주었다”고 하시며 회개하라고 촉구하며 등을 치셨는데 잠시 후에 잠잠해지고 다시 기도가 계속되었습니다. 은사가 중요하지만 그 은사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마귀도 하나님의 은사를 가장해서 인간에게 살짝 주고 갑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을 분별하는 은사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은사가 어떤 영에게서 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영을 분별하는 은사는 곧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종교개혁은 엄청난 땀과 피의 열매였습니다. 종교개혁은 상상할 수 없는 모진 고통과 수많은 죽음으로 이룬 진리의 승리입니다. 14세기 중엽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습니다. 이 전염병으로 유럽인구 3분의 1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흑사병으로 죽은 것을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벌이라고 하여 로마교회에서는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군을 동원하고 원정하는데 군비로 사용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돈을 모아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일이었습니다.
체코의 얀 후스(Jan Hus)는 이런 교황청에 극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면죄부를 파는 교황을 가룟유다라고 칭하였습니다. 이 일로 후스는 1415년에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전 100년 전에 있었던 종교개혁의 불씨였습니다.
당시에는 후스만 화형시키면 교회가 조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 후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자 파문시켰습니다. 루터만 파문하면 프로테스탄트가 이 땅에서 소멸 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남부 프랑스의 액상 프로방스 지방에 가면 개신교도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여실히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박해로 개신교인들이 무수히 순교를 당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가톨릭교도들은 이교도 이상으로 극악하게 개신교도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소멸되지 않고 불처럼 전파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니까 그렇습니다. 참 복음이니까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개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런 찬송을 작곡 작사하여 만들었습니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진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파하다 잡혀 공회 앞에 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율법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었습니다만 “이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이전에 드다라는 사람이 일어나 사람들을 유혹하였는데 400명이 따랐지만 그가 죽자 다 흩어졌습니다. 갈릴리에서는 유다라는 사람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따랐는데 그가 망하자 다 흩어졌습니다. 이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버려두라.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무너뜨릴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께 대적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관원들은 사도들만 죽으면 복음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인들이 사자 밥이 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대중 앞에서 교수형으로 죽임을 당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모두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사람에게로부터 왔는지를 분별하는 능력은 참 지혜이며, 영적 지혜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아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지혜로 온전한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온갖 지혜를 모아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이 지혜를 얻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첫째, 세상의 지혜는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고린도전서 2:6에는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반쪽 지혜이며, 없어질 지혜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닙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지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입니다. “이 세대의 지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세상의 관리나 통치자들은 무지 중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인간의 무지입니다. 인간은 무지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고, 인간은 그 무지를 해결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알아야 인간의 무지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지식과 과학으로 세상을 가늠하고 해석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인간의 머릿속에 제한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하나님을 말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하나님을 모릅니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안 보이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안 보이며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세상 지혜로는 그것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것도 많이 있고, 우리의 마음도 영혼도 다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구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1961년에 우주에 올라가서 “이곳에 어떠한 신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가가린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러시아 공군 아카데미의 교수인 페트로프는 유리 가가린이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믿음의 뿌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이 누군가가 조작한 말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의 출처로 여러 사람을 거론하고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유력한 출처가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후르시초프라고 합니다. 세상 통치자의 지혜란 이런 정도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그의 책 ‘위대한 설계’에서 “우주를 관측한 결과 우주 탄생에는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는 “과학은 신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라고까지 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과학자라고 하는 자의 지혜의 한계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세요.
고대 교부이며 대학자인 털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지식의 조건이 된다”고 하였고, 중세의 학자 안셀무스는 “신앙은 지식을 더 찾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식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야 참 지혜입니다. 신앙을 떠난 지식은 지혜가 아닙니다. 세상의 지혜란 신앙을 떠나 있으므로 어리석음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눈에는 전혀 지혜가 아닙니다.
20세기의 ‘제노사이드’(Genocide)를 보세요. 제노사이드란 ‘민족적, 종족적, 인종적 혹은 종교적 집단 전체나 일부를 절멸시킬 의도의 행위’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집단살해입니다. 20세기에 제노사이드로 죽은 사람이 1,400만 명입니다.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로 죽은 유대인이 600만 명이나 됩니다. 오래 전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170만 명을 죽였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보스니아내전으로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인 170만 명을 인종청소라는 명분으로 죽였습니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캄보디아에서는 폴 포트라는 악명 높은 살인마가 크메르루즈를 앞세워 캄보디아 공산혁명으로 17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지금도 기념관에 가면 사람의 해골과 뼈를 쌓아 두었습니다. 그 외에도 이런 유의 제노사이드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이런 살인이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란 인종청소를 해버리면 우리끼리 잘 살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살인은 증오와 보복만 쌓지 결코 사람의 마음처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 즉 세상 통치자의 지혜란 지금도 자기의 작은 지식을 과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자기 과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지혜로 자기를 과시하면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자기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을 계산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의 좁은 견해로 기독교를 폄훼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사울의 활동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스데반이 순교할 무렵부터였습니다. 사울은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곧 예수님을 박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면 끝날 줄 알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지혜는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2:8에는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합니다. 참 지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광의 주”로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만 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을 것을 영광의 주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영광의 주’란 “퀴리온 테스 독세스”란 말로 바울 서신에서는 본 절에만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광의 주로 아는 지혜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해야 못 박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알고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비로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지혜가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한번 보세요. 누가복음 4:34에는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합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압니다. 누가복음 4:41에는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에, 사도행전 19:15의 기록에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고 합니다. 악귀도 예수님을 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2:19에는 “네가 하나님을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도 아는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합니다. 귀신도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영적 존재입니다. 귀신은 정말 요물입니다. 귀신이 얼마나 요물인지 예수님의 신성을 알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사람들이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로마서 1:20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라고 합니다. 자연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눈이 먼 것입니다.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계절의 변화가 피부에 느껴지며, 북극의 온난화로 추운 겨울과 오랜 장마가 오는데도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님의 신성은 지식이나 기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자들도 잠시 후에는 변절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합니다. 유대인 가운데 가장 지체가 높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묻습니다. 로마의 힘을 양 어깨에 가진 빌라도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세워두고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인간 최고 지혜, 최고의 기적으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 예수님이 구세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모릅니다.
빌라도가 그의 아내만큼만 지혜가 있었더라면 자신의 당당한 권세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를 통치하려는 통치자의 욕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피에 무죄하다고 선언하고 손만 씻으면 되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던 사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거기가 한계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숨을 거두실 때에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지혜가 조금만 일찍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란 신령한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보지 못하는 영광을 보는 지혜입니다. 거룩하게 변화하는 지혜입니다.
손가락만 잘라버리면 도박을 안 할 것 같습니까? 발로도 하고 옆구리에 끼고도 한답니다. 발에 발찌를 채우면 성범죄를 안 할 것 같습니까? 발찌도 풀어버리고 다니면서 또 범죄를 저지릅니다. 감옥에 있으면 개과천선하여 새사람이 될 것 같습니까? 우리나라 교도소의 만기 출소자 재범률이 51%입니다. 최초의 민영교도소인 소망교도소는 4%입니다. 우리의 본성이 거룩하게, 경건하게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사람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영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그 안에 내재하지 않으면 결코 사람에게 변화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최고의 지혜,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자이신 것을 아는 것은 참 지혜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지혜자입니다. 지혜는 침대에서 흔들어 깨워야 하는 사람들을 방문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스스로 깨우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선물로 얻는 우리의 지혜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결론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는 로벤 섬의 감옥에서 27년을 지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인내력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젊었을 때에 아마추어 권투선수 생활을 하였고, 열심히 달린 덕이었다고 합니다. 독방은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였는데 그는 허약해지지 않기 위하여 제자리달리기,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등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27년 중 3년은 좀 더 큰 공동 감방에 있었는데 이때는 훨씬 더 긴장감을 가진 기간이었습니다. 새벽 5시만 되면 그는 좁은 감방을 빙빙 돌며 한 시간씩 달리므로 동료 재소자들을 다 깨워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단련과 인내심으로 결국 75세에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임기가 끝나는 80세까지 건강하였습니다. 현재 95세가 된 그는 병상에 있지만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백인 정부는 만델라만 없애면 흑인들의 반발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만델라만 감옥에 넣으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델라 개인도 흑인들도 끝나지 않고 오히려 백인 정권이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립니까? 세상은 세상의 지혜가 다스릴 것 같지만 세상의 지혜로는 세상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지 않는 지혜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십자가의 구원에 감격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연동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