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본문
사무엘상 15장 17~23절

서론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우신 장면은 참 감격적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가장 작은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 전,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다니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택하셨습니다. “네가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머리로 삼지 않았느냐?”(삼상 15:17)

하나님은 사울의 겸손한 태도를 보셨고,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끌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울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백성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겸손했던 그가 교만해졌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던 그가 ‘부분적 순종’이라는 이름의 불순종을 선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결정적인 순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아말렉 진멸 명령 앞에서, 사울은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본론

1. 하나님은 ‘부분적 순종’을 순종으로 보시지 않는다

사울이 내린 결정은 겉으로 보기엔 절반은 순종처럼 보였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렀고, 아말렉을 공격했고, 많은 것을 멸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순종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왕 아각을 살려두었고, ‘좋은 양과 소’를 선택적으로 남겼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사울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백성이 그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남겨두었습니다.”(삼상 15:15) 이것이 바로 자기합리화(Self-rationalization)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자기합리화는 자신이 잘못한 선택이나 행동을 ‘도덕적 이유’로 포장하여 내면의 죄책감이나 외부의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방어기제입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제사드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사무엘 앞에서는 그럴듯한 이유를 댑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말하는 이 기만은 오늘날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도 “그건 시대적 배경에 맞춘 말씀이야”,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이건 현실적으론 안 돼”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사울처럼 순종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불순종일 때가 많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회개는 없습니다. 기도는 하지만 고집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아멘으로 받지만, 행동은 내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사울의 부분적 순종은 사실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

핵심 메시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분적 순종은 결국 불순종이며, 인간적인 판단이나 사람의 눈치를 따라 진멸하지 않은 죄는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초래합니다.

2. 왜 사울은 선택적 순종을 했는가?

사울의 선택적 순종은 단순한 욕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인정욕구와 불안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사무엘이 늦게 도착하자 제사를 직접 드렸던 것도, 백성들이 자신을 떠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아말렉 전투에서도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백성들의 반응과 시선을 더 의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보다 사람의 칭찬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 우리 신앙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면서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방식, 경험, 계산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왜 진멸하라는 명령을 일부만 따랐을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전리품을 제사로 바치기 위함이라 했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사람을 의식하는 마음이 하나님보다 앞섰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위치와 권위가 백성들의 지지를 통해 유지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고, 하나님의 명령도 ‘백성의 동의’가 있을 때만 따르려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나이다.”(삼상 15:24) 이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이 더 크게 들렸다’는 뜻입니다.

둘째, 자신의 이성과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전리품 중에 ‘좋아 보이는 것들’을 남겨 제사드리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속내에는 ‘내가 보기엔 이게 더 나아 보인다’는 자기 기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적인데, 그는 그것을 조건부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 지점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결정적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제사가 아니라, 전적인 순종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우리는 스스로 판단합니다. “이건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좀 무리야.” 십일조는 드리지만 용서는 유보합니다. 주일성수는 하면서도, 직장에서는 정직을 포기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택적으로 순종하면서도,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분적 순종을 불순종으로 여기십니다.

적용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 삶에 ‘진멸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 끊어야 할 불신앙의 관계를 여전히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 내 안의 분노, 죄책감, 수치심을 묻어두고 방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 버려야 할 교만, 자기중심성, 이중적 신앙생활을 여전히 ‘능력’이나 ‘개성’으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다 진멸하라.” 그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죄를 남김없이 처리하라, 불순종의 뿌리를 제거하라, 말씀이 닿는 곳마다 즉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온전한 순종을 통해 우리를 다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택적으로 순종하면서도,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분적 순종을 곧 불순종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순종, 조건 없는 신뢰, 머리끝까지의 복종을 원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이 말씀은 단순한 형식의 우열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경고입니다. “나는 무엇을 진멸하지 않고 붙잡고 있는가?” 하나님이 끊으라 하신 것들을 나는 아직도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요? 끊어야 할 유혹의 관계를 ‘인간적인 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려놓아야 할 교만, 경쟁심, 비교 의식을 ‘내 능력’이라 착각하며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버려야 할 죄책감, 분노, 상처를 그냥 방치한 채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라고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리해야 할 습관적 죄, 음란, 탐욕을 ‘한 번쯤은 괜찮겠지’ 하며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울은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좋고 나쁘고를 네가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내 판단을 얹는 순간, 불순종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선택적 순종은 ‘부분적 충성’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자기 의를 위한 조작된 신앙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나뉜 자가 아니라, 온전히 따르는 자, 끝까지 신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마무리 기도

“주님, 제 안에 남겨둔 아말렉의 잔재가 무엇입니까? 제가 스스로 판단하여 순종을 조건화했던 순간들을 회개합니다. 사람을 더 의식했고, 내 판단이 더 옳다고 여겼던 교만을 내려놓습니다. 주님, 제가 끝까지 순종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머뭇거리지 않게 하시고, 부분이 아닌 전부로, 조건이 아닌 전적으로 주 앞에 순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