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청년시절 한신대에는 세 분의 큰 학자들이 있었디. 조직신학에 박봉랑(1919-2002), 신약학에 전경연(1916-2004), 교회사에 이장식 교수가 계셨다. 필자는 신앙적 교훈을 추구하는 청년으로 교단은 달랐으나 학덕(學德)이 높으신 세 분을 개인적으로 뵈인 적이 있었다. 박봉랑 박사와는 그의 집 서재에 가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분은 깊은 학자적 양심과 신앙적 경건을 갖추신 학자였다. 정경연 박사도 그러했다. 두 분은 2000년 초에 소천했으나 혜암(惠岩)은 2021년까지 한국교회에 영향을 끼치셨다. 혜암은 필자가 숭실대에서 봉직(1978-2012) 초창기인 1980년대 정기적으로 채플과 기독교과목 초청강사로 모신 적이 있다. 그 당시에 이분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분이 가지신 열린 온화한 성품, 학문적 박식과 신앙적 경건은 필자와 학생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혜암(惠岩)은 엄청난 신학적 저술을 하였고, 제1세대의 신학자로서 후학들에게 신학의 기초를 교과서로 제공하면서 한국신학의 교과서적 기초를 마련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의 아들 이철(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도 부친에 대하여 회고하기를 “부친께서 가진 섬세한 기억력이 크나큰 교회사의 저서를 쓰도록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혜암은 세계교회사와 아세아교회사, 한국교회사, 기독교신학사상사, 고대교회사, 기독교 사관의 문제, 연구 방법론, 어거스틴, 주기철, 본회퍼 연구의 교회사 인물론, 정통주의 합리주의 등 교회사를 중심으로 깊고 넓은 신학 연구활동의 초석을 놓았다.
1. 한국교회 보수와 진보 사이에 대화의 공간을 마련한 교량의 신학
혜암은 한국 신학자 가운데는 가장 장수한 신학자요 100세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연구와 활동을 하셨다. 그의 신학은 진보와 보수를 포용하는 신학으로서 한국교회와 신학에 대화의 처소를 만드는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신학은 보수와 진보 사이에 대화의 공간을 마련한 교량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신대에서 은퇴 후 70세 고령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 받아 케냐 동아프리카 장로교신학대학 교수로 14년 동안 교육 선교에 헌신했다. 특히 귀국 후 2014년에는 진보와 보수 신학을 아우르는 '혜암신학연구소'를 설립, 마지막까지 한국 신학계의 포럼을 이끌었던 큰 별이었다.
혜암연구소를 설립할 때 필자에게 연락을 주셔서 보수 진영의 열린 신학자들을 추천하였고 이에 필자는 보수진영 신학자로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 총장), 오성종 교수(전 칼빈대 신대원장),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명예), 박찬호 교수(백석대)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진보 진영은 서광선 교수(이화여대 명예),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 김균진 교수(연세대 명예), 강원돈 교수(한신대) 등이 참여하고 있다.
2. 중도적 복음주의적 개혁신학: 보수와 진보 사이에 대화의 공간을 마련한 교량의 신학
혜암은 그의 노년에 특히 혜암 신학연구소를 통하여 보수와 진보 신학자들이 대화하고 상호 소통하는 대화의 공간을 마련했다. 이런 배경에는 그의 신학사상 보수와 진보를 다리놓은 중도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있다.
혜암은 자신의 100세 기념회고집에서 자신의 100세 인생을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회고하고 있다: "하나님이 내가 백세가 되도록 만족할 만큼 오래 살게 하셨는데(시91:16) 그 긴 세월의 전반부를 회고하고 싶다. 실로 그 세월은 먹구름과 폭풍우가 몰아친 밤과 같은 것이었지만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 그 세월이 값진 것이었다. 그 때 하나님이 나를 옛 욥에게처럼 등불로써 내 머리 위를 비추시고 인도해 주셔서 내가 어둠 속을 활보할 수 있었고(욥 29:2,3) 시편의 옛 시인에게처럼 가을비로 내 삶의 샘을 가득 채워 주셨고(시 84:6), 또 은혜의 이슬로 때때로 나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잠 19:12). 그리고 종당에는 나의 부르짖은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내가 바란 항구로 인도하여 주셨다(시 107:23~30)."(베리타스, 한국교회 최초 100세 신학자의 탄생. 교회사가 혜암 이장식 박사 17일 백세 생일 맞아, 김진한 기자 (jhkim@veritas.kr), 입력 Apr 17, 2020 09:56 AM KST)
혜암은 자신을 백세까지 살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의 전반부를 회고하며 먹구름과 폭풍우가 몰아친 밤과 같은 인생길에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가을 비와 은혜의 이슬 같이 생기가 되어 그를 소망의 항구로 인도해주셨다고 회상하고 있다.
혜암은 개혁신학자요 중도적 복음주의 사상을 가진 교육자요 그의 신학사상은 교회친화적이고 종교개혁정신에 입각하여 교회를 향상 개혁하고자 한 개혁지향적이며, 종말론적이라고 특징지워진다. 혜암은 자신을 설교하는 목사보다는 “가르치는 목사로 한평생 보낸 것”은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일로 알고 감사할 뿐이다”고 피력하였다. 혜암은 자신의 신학의 순례를 회상하면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나의 정신은 연구하고 저술하는데 더 많이 쏠려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도 세상 사람의 탓이 아니라 “섭리자는 나를 버리지 않고 이끄신 것이었다”(이장식, “나의 신학의 순례” in; 『아담아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글마당, 2007, 242)고 고백하고 있다.
3. 만우(晩雨)의 “성빈”(聖貧), 순교적 신앙과 장공(長空)의 진리애, 정신적 자유 계승
혜암은 그의 신학 사상과 삶에 있어서 만우(晩雨) 송창근의 “성빈”(聖貧), 교회중심, 순교적 신앙과 장공(長空) 김재준의 “정직성, 진리애, 정신적 자유, 교회의 덕”을 이어 받고 있다.
헤암은 송창근 목사에 대하여 다음같이 회고하고 있다: 조선신학교 학장이었던 송창근 목사는 생전에 신학교 예배시간에 학생들에게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신학교 정문에 묻고 그 위를 밟고 다녀주기 바란다”고 말씀했다. 송창근 목사는 교부 오리게네스와 성 어거스틴의 순교를 찬양하는 글을 썼고, ‘죽음은 안식이다”고 말씀했다. 6.25사변시 납북되어 북한의 중강진에 도달했을 때, 북한 기독교연맹의 김창준 목사가 납북자들을 환영하러 왔을 때 송창근 목사가 그를 보고 ‘이 배신자여 물러가라’고 호통쳤다.(이장식, “순교자 만우(晩雨) 송창근 박사를 추모하여” in; 『아담아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글마당, 2007, 216-220.)
혜암은 장공 김재준 목사에 대하여 다음같이 회고하고 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았다. 높고 넓은 하늘 같은 마음이었다.” “그를 힘들게 하고 괴롭혔던 한국교계 인사들이나 그를 해롭게 한 정치세력들에 대해서 악담 한 마디 하시지 않았다, 사람들이 장공을 존경은 하겠지만 닮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공은 일평생 동안 청빈한 생활을 하셨고, 신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장(長)자리를 탐내지 않으셨다.”(이장식, “유한과 무상. 장공 김재준 목사를 회고하며” in; 『아담아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글마당, 2007, 221-227.)
혜암은 그의 노년에 특히 혜암 신학연구소를 통하여 보수와 진보 신학자들이 대화하고 상호 소통하는 대화의 공간을 마련했다. 이런 배경에는 그의 신학 사상이 보수와 진보를 다리놓은 중도적인 복음주의 신학이 자리잡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혜암께서 남겨놓은 혜암신학연구소가 그 분의 취지에 따라서 교회와 신학적으로 대립과 갈등이 심한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 열린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기독교 신앙의 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하면서 학문적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좋은 점을 배우고 화합하며 발전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학문적 포럼이 되기를 바란다.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