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정성구 박사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 주일 새벽에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3일 후 수도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피아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과 국민들이 죽어갔다. 피난민들은 남으로 남으로 몰려갔고, 대한민국은 곧 없어지고 점점 인민 공산주의 나라로 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남은 곳은 부산뿐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다부동 전투에서 칠전팔기로 피의 고지를 지켜냄으로 대구를 지킬 수 있었다. 국군은 포항과 영천의 전투에서 겨우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모든 피난민들은 부산으로 몰렸다. 말 그대로 피난민들은 처참했고, 아비규환이었다.

어찌하여 이 나라에 이런 처참하고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을까? 나라를 건국한 지 겨우 2년 만에 철저히 준비되고 계획된 북한 공산당의 침공을 받아 나라가 없어질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시간이었다. 부산으로 내몰린 피난민들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곳도 없어 하나같이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아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 대한민국은 희망을 잃고, 나라가 공산화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부산으로 임시수도를 옮긴 대한민국정부는 그 와중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외교수완으로 맥아더 장군의 도움을 받게 되고, UN의 참전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부산에 모인 피난민들은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모두 몰살되거나 현해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피난 온 250여 명의 목사들과 장로들은 부산 초량교회에 모여서 기도회를 시작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기도요청이 있었다. 그때가 8월 하순이었다. 당시 집회 강사로는 한상동 목사, 박형룡 목사, 박윤선 목사가 맡았다. 이 세분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 부산 초량교회에 모인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버리고 부산까지 흘러온 죄책감과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했던 죄악을 통회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통곡과 비명이 터지고 목사로서, 장로로서 지은 위선과 교만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집회는 두 주간 동안 성령의 역사로 밤낮없이 계속되었다. 목회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한 정치적, 사상적 혼돈 속에서 성경적 진리를 지키지 못한 죄들을 땅을 치고 회개하였다. 그러자 드디어 성령의 폭발적 역사가 일어났다.

초량교회
▲1892년(고종 29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가 초량교회의 전신 영선현교회를 설립하였다. 1967년 신축 교회당을 헌당하고, 2010년 리모델링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초량교회는 의자가 없고 마룻바닥으로 전국의 초교파 목사들은 두 주간 모두 꿇어앉아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3일 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다. ⓒ초량교회
당시 초량교회는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과거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곳이요, 그 당시는 한상동 목사님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였다. 의자가 없고 마룻바닥이었기에 전국의 초교파 목사들은 모두 꿇어앉아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평양 대부흥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상황은 절실했고 절박했다. 이런 목회자들의 철저한 회개의 기도가 있은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판도가 역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사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초량교회의 마룻바닥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종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예상치 못한 성령의 역사, 기적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부산 초량교회당에서 두 주간 동안 밤낮 없는 회개의 기도가 있은 지 3일 후에, 인간적으로
볼 때 성공확률이 5000분의 1도 되지 않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기적이었다.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 다음 날인 9월 29일 12시, 수도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의 상징인 UN의 깃발 아래서 싸우는 우리 군대는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해방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감격했다.

그 후 목사,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지켜 공산주의를 물리칠 수 있게 했음을 간증하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한상동, 박형룡, 박윤선 목사님의 강의와 설교를 들어왔다. 그리고 그분들의 감화로 1960년부터 지금까지 살아왔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러므로 부산 초량교회는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민족의 영적 센터가 되었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1977년 5월 15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제16회 전국 목사 장로기도회가 열렸다. 그때 나는 당시 총신대학교 조교수 겸 교목실장으로 있으면서 이 집회에 주 강사가 되었다.

내 나이 36세의 새파란 젊은 목사였고, 1000여 명이 모인 교단의 중진 목사들과 장로들 앞에서 시편 73편 28절을 읽고 ‘하나님께 가까이’란 제목으로 한 시간 동안 불꽃 메시지를 전했다.

목사 된지 꼭 10년밖에 되지 않은 앳된 젊은 목사가 강단에서 ‘우리 교회가 정말 개혁주의 교회가 맞는가?’ ‘진정으로 하나님 중심의 교회가 맞는가?’ ‘회개 없이는 이 어둠의 시대에 교회를 이끌 수 없다!’ 등의 내용으로 사력을 다해 외치자 여기저기서 비명과 통곡이 일어나고 울음바다가 되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이다.

집회가 끝난 후에 교단의 어른들이 모두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3년 후에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총신대 총장이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6‧25 전란 못지않다. 나라가 공산화되느냐 아니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느냐의 갈림길에 서있다. 우리는 교회를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서 지켜내느냐가 당면 과제이다. 또한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박해를 그대로 방치하느냐가 우리의 과제이다.

6‧25전란 때 가장 절박한 순간에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사, 장로들의 회개운동은 좋은 모델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주무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운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고 주인이시다.

지금이 바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는 하나님께 회개할 시간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오늘은 9‧28 서울 수복의 날로 초량교회의 회개운동이 기억난다.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