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도전한 분야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넣는 가방에 필요한 금속 부속품과 액세서리를 제작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청계천 주변과 평화시장이 있던 자리에는 가방 공장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가방에 들어가는 금속 부속이 꽤 많았기 때문에, 집 뒷마당의 20여 평 텃밭에 새로 작은 공장을 지었습니다. 동력 프레스도 여러 대 구입하고 기술자를 고용해 금형을 만들었습니다.
겨울철 청계천 일대를 지나다니다 보면 순대국밥 집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습니다. 방금 잘 먹었어도 돌아서면 배고플 20대 후반의 청년이던 저는 허기가 져도 돈이 없고 시간이 없어 식당 앞을 그냥 지나쳐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밤낮없이 물건을 납품하다 한두 끼밖에 식사를 챙기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과로와 영양실조 때문에 코피가 주르륵 흐르는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래도 쉬는 것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것보다도 월급일을 앞두고 수금이 안 되면 그것보다 괴로운 일이 없었습니다.
어느 해는 구정이 코앞인데, 수금에 차질이 생겨 6~7명의 직원에게 도저히 급여를 챙겨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도저히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밤늦게 집 근처에 다다라 언덕 위에 올랐습니다. 시골 마을의 고즈넉한 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토록 평화로워 보이는 세상에서 저 자신만 홀로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칠흑 같은 밤, 언덕 위에 홀로 우뚝 솟은 전봇대의 불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소리 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전봇대를 붙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큰일 났습니다. 이 어려움을 잘 헤쳐나갈 길을 주세요.' 다행히 이튿날 어머니께서 이웃에게 고금리로 급전을 빌리셔서, 저는 급여를 제때 줄 수 있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계속>
이장우 일터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