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23세 청년인 저는 명동과 충무로를 활보하며 귀금속 액세서리 사업을 했습니다. 고객이 쓸만한 제품을 소개하고, 주문받은 제품은 금은세공 공장에 제작 의뢰하여 고객에게 다시 제품을 공급하는 외무 사원으로 일하고 있었지요.
당시 회현동 남산 3호 터널 근처엔 적산가옥이 많았습니다. 그곳에 새로 생긴 '수(秀)미용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원장님은 저를 환한 미소로 반겨주며 다정하게 금은세공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클래식 가수, 영화배우 등 당시 어느 정도 인지도 있던 유명인을 많이 알던 원장님은 본인도 세 편의 영화에 출연한 클래식 가수였습니다.
원장님은 저를 "동생! 동생!"이라 부르면서 들를 때마다 커피와 음료수도 주고, 친동생처럼 살뜰히 챙겨주었습니다. 저도 "누님"이라 부르며 따랐지요. 점포 월세와 운영비, 직원 두 명의 월급까지 미용실 영업만 신경 쓰기에도 바빴을 텐데, 누님은 저와 고객의 가교역할까지 자처했습니다. 덕분에 미용실 고객들도 귀걸이, 목걸이, 머리핀 등 액세서리에 관심을 보였고, 비즈니스가 곧잘 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동생, 내일 오전에 다른 할 일 있어?"
"아니요. 없어요."
"좋아. 내일 아침에 꼭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는데, 10시까지 와 봐. 점심도 사줄게."
그날로 저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누님은 제가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 봐 일부러 연락해서 같이 교회에 가주고, 예배 후 식사도 사주면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예배당에 앉기만 하면 졸던 저도 어느 날부턴가 말씀이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부흥강사이신 오관석 목사님께서 목회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얼마 후 누님은 미용실 문을 닫고 월남으로 떠난다 했습니다. 누님의 지인들이 미용실에 모여 조촐한 환송식을 갖는 자리에 저도 초청받았습니다. 누님이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동생, 기도 부탁해도 될까?"
기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씩씩하게 "커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두들 깔깔깔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저도 멋쩍게 따라 웃었지만, 고마운 누님을 더는 뵐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 한쪽이 먹먹했습니다. <계속>
이장우 일터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