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아버지의 태도는 모순적인 면이 있었다. 그렇게 여자가 공부하는 것을 반대하시면서도 언니는 대학을 보내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언니는 공부를 그리 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니에게 경제나 회계 관련 공부를 하면 좋겠다 생각하셨다. 그래서 언니를 경제 관련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억지로 학교 교장 선생님 등과 뒷문으로 사업을 하며 뇌물도 건네주었다. 당시 러시아 빵이 귀했는데 그 빵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대학 입학권을 하나 따내고, 언니는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한 가운데 무리해서 시험을 봤던 언니는 결국 시험을 망치고 말았고 입학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을 겪고 나자 아버지는 분이 나셔서 '에잇, 여자는 공부시키는 게 아니야' 하고는 나를 공부시키려고 하지 않으셨다.
결국 내가 대학 갈 때가 되자 집에서 논란이 있었다. 부모들은 항상 나를 제외하고 남동생과 언니 위주로 챙긴다는 생각에 나는 더 반항적으로 행동했고, 부모님은 나를 대학 보낼 생각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갈등은 더 깊어졌다. 그래도 대학은 꼭 가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유치원 교사가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대학 지망을 쓸 때도 1~3순위 모두 교원 대학을 썼다.
사실 점수를 생각하면 1순위에는 더 좋은 학교를 써야 했다. 보통 평양이나 수도권 대학은 1순위, 지방 주요 도시의 저명한 대학은 2순위였고, 내가 가려고 했던 지방 교원 대학은 3순위 정도였다. 그러니 선생님께서도 1~3순위를 왜 다 같은 곳을 썼냐며 의아해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하게 어린이 교사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학교를 지원하고 교원 대학 시험을 보았다. 약 1주일 동안 면접을 포함해서 시험을 보았다.
그렇게 시험을 보고 왔더니 아버지는 출장에서 돌아오셔서 교원 대학 시험을 봤다고 나에게 화를 내셨다. "여자 대학생들이 다 그렇지만, 그중에 선생이 제일 입이 여물고 고집스럽다"고 하시면서 나를 나무라시고는 평소 입버릇처럼 "대학을 졸업해도 팔자 안 풀린다. 시집을 잘 가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버지께서는 출장을 다니시면서 해안지역의 처자들이 염전에서 소금 밀차를 끌면서 고생하시는 것을 보셨는데, 그 여자들이 다 대학 졸업한 여자였다고 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보다 결혼을 잘해야 하는데, 괜히 많이 배워서 입이 모질면 좋은 혼사 자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북한에서는 여자가 대학을 졸업했어도 결혼하면 직장이 배치되지 않고 가정을 돌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결혼을 잘해야 한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학 시험을 보고 온 딸 앞에 그런 말밖에 할 수 없는 것인가?' '결혼은 나중에 잘하면 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대학에 합격했다. 교원 대학에서도 소학교 교사가 아닌 유치원 교사 공부를 했다. 학업기간 2년에 훈련 6개월까지 총 2년 6개월의 대학생활이었다. 북한은 대학 등록금은 없었다. 대신 학교 기숙사 밥이 형편없어서 늘 배고팠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같이 지내는 친구들 중 농사짓는 시골이 고향인 친구들은 주말에 집에 갔다 오면 군것질거리로 옥수수나 콩 볶은 것을 한 움큼씩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그것을 숙소에서 나눠 먹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집에서 챙겨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갔다 올 때마다 나는 그 조그마한 간식거리를 가져가지 못해서 그냥 울면서 왔다. 염치가 없어서 애들이 간식 나눠 먹을 때 공부만 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도 많이 못 만들었다. 이렇게 1년을 지내니 나중에는 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머니께서 조금씩 간식과 용돈을 챙겨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내가 대학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