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요, 자전거 점포에서 자전거 바퀴 펑크를 때우는 한이 있더라도 사장을 꼭 할 겁니다."
1979년 12월, 집사람과의 첫 데이트에서 저녁을 먹으며 저는 당당히 이야기했습니다. 구순열로 태어나 남과 다른 외모로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져있던 저, 결국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후 세상이 두려워 숨어 지내던 저는 이제 없었습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제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더니 어디서든 인정받게 되었고 자신감도 갖게 됐습니다.
집사람은 제 외삼촌이 묵던 월세방 주인의 딸이었습니다. 명절 연휴, 고향 가는 길에 외삼촌에게 인사하기 위해 들린 것이 인연이 되어 외삼촌이 중매를 섰습니다. 집사람은 세상 물정에 때 묻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었죠. 제 아버님도 이 사람을 보더니 정말 마음에 들어 하셨고, 혹여 집사람 마음이 바뀔세라 서둘러 결혼시켰습니다. 그렇게 한 달도 안 돼 1979년 12월 24일 우리는 약혼하고, 1980년 1월 9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처가에서는 반대가 심했습니다. 저와 집사람이 장모님을 함께 처음 뵙던 날, 제가 보는 그 자리에서 "남자가 없어 저런 남자한테 시집가려고, 나 모르게 서울까지 갖다 왔니. 눈알이 뒤집어진 것 아니냐"며 집사람의 뺨을 때리셨습니다. 저는 "왜 그러십니까. 따님을 행복하게 해드리면 되지 않습니까"라며 말렸고요. 수모를 당하면서도 집사람은 저를 따라왔습니다. 지금 장모님께서는 제게 정말로 잘해주십니다. "김 서방은 뒷모습 보면 멋있는데, 앞모습 보면 실망한다"는 농담도 하시면서 살갑게 대해주십니다.
이처럼 어렵게 시작한 관계였건만, 저는 집사람 속을 무던히도 썩였습니다. 그러다 1980년 추석이 다가올 무렵 사고가 터졌습니다. 원리원칙대로 작업했어야 했는데, 제 생각대로 일하다 기계에 장갑이 말려 들어가면서 오른손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절단됐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임신 6개월이던 집사람은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유산했고, 조금만 늦었더라면 집사람도 죽었을 겁니다. 그때 제가 빨리 병원에서 검사받게 하여 한 생명을 살린 사실 하나로, 집사람은 이후 제 마음대로 세상을 살아도 다 이해해준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주위 친구들도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저런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났냐"고 칭찬하는데, 제가 생각해도 집사람은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천생배필입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제가 교회 일꾼으로도 부름 받아 섬기고 있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남선교회 회장, 성가대장, 재정 담당을 맡았고, 2014년 무극장로교회로 옮겨서는 구역 인도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교인이 600여 명인 무극장로교회는 총 30여 개 구역이 있는데, 구역별로 보통 5~7명이 모입니다. 그러나 제가 속한 구역은 10~12명이나 모입니다. 이장우 3G테크놀러지 회장님은 늘 제게 "어떻게 예배 인도를 하길래, 구역원들이 제일 많이 모이느냐"고 기뻐하시고 격려해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장 11절)
김홍섭 3G테크놀러지 사내 협력업체 성창공업 대표(6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