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두만강을 끼고 있는 연변주는 북한 선교에 마음이 있는 이들마다 한번은 들리게 되는 지점입니다. 연길은 그런 연변주에서 중심이 되는 도시입니다. 수많은 한국 사업가와 선교사가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이곳을 왔다 가고 있습니다. 북한 선교에 대한 마음을 품고 이곳에 온 사람들 중 더러는 조선족과 가까워지면서, 조선족 역시 같은 핏줄을 지닌 한민족임을 자각합니다. 북한만 생각하던 것에서 눈을 돌려 조선족을 둘러봅니다. 이때, 접근이 대단히 어려운 북한 선교와는 다르게 조선족 선교는 접근이 용이함을 발견합니다. 나아가, 북한 선교와 조선족 선교는 동떨어진 별개의 두 개가 아니라, 서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그런 ‘연결되어 있음’(relatedness)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비인가 가정 교회와 비슷한, 비인가 가정 고아원을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정부 승인 고아원은 탈북 아이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정 고아원은 둘 다 할 수 있습니다. 조선족 고아는 크게 세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부모가 둘 다 없는 ‘순수 고아,’ 한쪽만 있는 ‘반쪽 고아,’ 부모가 살아 있지만 같이 살지는 않는 ‘고아 아닌 고아’ 혹은 ‘부모 있는 고아’ 이렇게 셋입니다.

조선족 신문인 길림신문사의 한 기자는 7개의 조선족 중소학교(중학교,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편부모거나 부모가 없는 학생을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그 통계는 60.65%나 되었습니다. 그 중 영길현 조선족실험소학교의 경우 79.7%에 달하는 아이들이 부모가 하나 혹은 모두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은 부모님이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지역, 그 중에서도 한국으로 간 경우입니다. 이렇게 남겨진 아이들은 친밀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로 자라게 됩니다. 부모님이 모두 한국으로 가는 경우, 아이들은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맡겨집니다. 이때, 아이의 기본 자질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인격적, 지적 자질에 따라 이런 모험(?)이 아주 험난하고 불행한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문제가 아이에게 있든, 조부모에게 있든), 아이들은 부모, 가족, 친척을 놔두고 ‘고아원’으로 보내집니다.

소개

저는 조선족 원장님이 운영하는 가정 고아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아이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2010년 6월부터 관계가 시작된 뒤로, 한 해의 반이 더 지난 오늘, 일각(一角)을 붙잡고 수면 아래로 내려가니, 거대한 불의(不義)의 빙산이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고아원에는, 몇 개월에 한 번씩 수적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이전보다 좀 줄어들어 7살부터 22살까지 총 8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순수 고아’부터 ‘부모 있는 고아’까지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원장님의 손자와 손녀, 그리고 남편과 어머니도 ‘고아원’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시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방은 세 개인데, 남자 고아들이 한 방에서 자고, 원장님이 한 방, 원장님의 어머니가 한 방, 그리고 여자 고아들은 마루에서 잡니다. 현재 겨울 방학 기간을 두고 말하면, 식사는 하루에 두 끼를(어느 때는 한 끼) 합니다. 요리는 할머니가 하기도 하고, 여(女)고아가 하기도 합니다. 지난 여름에는 주로 할머니가 음식을 했고, ‘그’ 여자애는 밥상 펴기, 밥 푸기, 설거지만 했는데, 점점 변하여, 오늘에는 여자애가 식사 준비를 거의 담당하는 분위기입니다(식탁에는 영양가 있는 반찬이 없습니다). 이외에 다른 집안 관리도 하는 ‘그’ 15살 여자아이는 흰머리가 가닥가닥 올라 온지 오래고, 키는 150이 못 됩니다. 아이는 소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따로 교육을 받지 못하여, 저와 조선족 청년들이 과외 선생님을 붙여주었고, 우리도 방문하여 개인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화장실로 가면 좀 더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 그래서 아이들이 샤워를 무서워한다는 것 -은 차치하더라도, 좌변기의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만해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럼 아이들이 볼 일은 어디서 봅니까? 야외 공중 화장실을 이용합니다. 연길의 겨울 추위는 백두산보다 북쪽에 위치한 추위입니다. 한국 강원도의 추위보다도 형님입니다.

그럼 이것이 원장님이 돈이 없어서 일까요? 원장님은 한국 교회로부터 정기적 후원을 받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조선족 사역자들은 이 증언에 대해, “따로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서 후원금 없이 고아들만이 아니라 친족까지 거느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지난 1월, 고아원에 한국 교회(혹은 성도)의 후원금을 전달하고 있는 자매를 만났습니다. 이런 한국 교회(혹은 성도)가 한둘인지는 모릅니다. 액수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화장실 변기를 몇 개월간 방치해두어야 할 정도인가? 고아원을 통해 자기와 친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아이들은 ‘인질’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까지였다면 저는 굳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변신

어느 날부터, 고아원을 방문하는 손님이 부쩍 늘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족 기독 청년들보다 더 자주 고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들만 오면 고아들은 그나마 하나 있는 자기들만의 방을 내어주고, 마루나 할머니 방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들로, 성경책을 들고 다닙니다. 거룩함이나 친절은 없고, 대신 수상함과 무관심이 있습니다. 저와 다른 일꾼들은 이들이 조금씩 미심쩍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듣고 나니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S단체(편집자주 : 한국에서 이단으로 규정 받은 단체) 였습니다. 원장님은,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S단체에 빠진 뒤로는, S단체의 “루디아”급(비교.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행16:15)으로 모임 장소를 내어주고 있었습니다. 또 원장님이 지난 여름(2010년 6월), 자랑하면서 제게, “고아 중 큰 애 두 명은 지금 신학 공부를 하고 있어요. 나중에 선교사나 목회자가 될 거에요”라고 했는데, 이 신학교는 바로 S단체 무료 성경원이었습니다. 어느 새 가정 고아원은 S단체 집결지로 변신했습니다. 아이들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갈 곳이 없어 고아원에 온 아이들은 고아원에서도 버려졌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현재 원장님은 고아들을 고아원에 방치하고 있는 윤리적 결함만이 아니라, 이단 사상을 동조 및 유포하고, 심지어 고아들까지 그쪽으로 인도하는 종교적 범죄의 중심에 있습니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후원금을 받고 있다면, 이 아이들은, ‘S단체에 인질로 잡힌 천사들’ 입니다.

저와 조선족 기독 청년들은 여전히 인질 잡힌 천사들을 찾아갑니다. 원장님은 집에 없거나, 집에 있으면 S단체 성경 모임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까지는, 생필품이나 식료품, 학습용품 등을 손에 들고 가는 우리의 방문을 제제하지는 않는 상태입니다. 후원이 끊어지면 이 고아원은 자연적으로 문을 닫을 것입니다. 그럼 천사들은 인질 상태에서 풀려나 더 나은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주의

한국 교회(혹은 성도)가 조선족을 통해 어떤 사역을 할 때, 간단하게 실용적인 차원에서, 두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성급한 후원, 냄비식 후원, 그리고 일회성 후원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급한 후원이란, 한국 교회가 현지 조선족과 동역(同役)할 때, 동역자가 신뢰할만하다는 확신이 있기도 전에 어려운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 혹시, “우리는 중국 선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를 주의하여 점검해야 합니다. 냄비식 후원이란, 처음에는 열정적으로 조선족 사역자를 후원하다가, 금새 마음이 식어 후원을 중단해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조선족 사역자들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잠깐 뜨거운 열심이 아니라 지속적인 작은 관심입니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뜨겁다가 금방 식는 한국 교회’란 문구가 왜 나오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회성 후원이란, 현지 고아원 아이들을 보면서 긍휼함이 동하여 원장님이나 아이들에게 돈을 한 번 주고 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연락은 없고, 인간관계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회성 행위가 혹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별히 잘못되지 않은 것일지라도, 받는 사람(원장님, 나아가 고아들까지)의 입장에서는 양면적입니다. 일단 물질을 받아서 삶이 조금 더 평탄해진다는 점은 좋지만, 자기들도 모르게 점점 외부인의 후원에 입맛이 길들여지고 있음이 위험입니다. 그래서 원장님만 초심으로부터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받는 것에 익숙해지고, 결국 당연해지니, 감사함을 느낄 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둘째, 한국 교회(성도)는 ‘뜨거운 열심의 잠깐’이 아닌 ‘작은 관심의 꾸준함’으로 현지 사역에 책임감을 보여야 합니다. 후원금을 보낸 뒤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아이들은 어떤 상태인지, 인터넷으로 보고(報告) 받는 것만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현지를 방문하여 살펴보며 상관(相關)해야 합니다. 이것은 현지인에게 ‘횡령의 유혹’을 막아주고, 한국 교회에게는 ‘관심의 냉각’(이것은 곧 후원금의 냉각을 불러오고, 결국 쌍방의 관계에 상처를 남깁니다)을 막아줍니다. 혹 지금, S단체에 빠진 원장님의 고아원을 후원하는 한국 교회가 있다면, 무책임한 관리로 인해 자기의 후원금이 S단체 전파를 촉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떨까요?

가정 고아원의 경우에는, 직접 원장님에게 물질을 보내기보다 중간에 신실한 현지인을 두어 그를 통로로 의지하는 것이 더 안전할 것입니다. 아니면 교회에서 사람을 파송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후원은 책임감을 가지고 시작 및 유지해야 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을 통해 전달 및 보고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는 한국 교회(성도)가 늘어날 때, 오늘날까지 쌓인 한국 교회 – 조선족 그리스도인간의 상처가 아물고, 서로 화해를 이루어, 사랑과 존경의 발걸음으로 함께, 하나님 나라의 선한 사업에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북한 선교로 이어집니다.

기도

의와 평강과 전능의 하나님, 물질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려는 마음을 회개합니다. 후원금을 보냈으나 관리는 하지 않는 무책임함을 회개합니다. 상대방이 믿을 만한가 제대로 살펴보는 번거로움을 피하는 게으름을 회개합니다. 사진 찍기 위한 일회성 후원으로 현지 사역자를 후원금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회개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이전의 실패와 잘못을 거울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소원과 기대를 가지고 한걸음씩 꾸준히 나아가게 하소서. 세상에서 버림 받은 고아 친구들을 돌보아주시고, 각처에 더 많은 신실한 일꾼들을 일으켜주소서. 아멘.

2월 연길에서 C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