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세계선교협의회(대표회장 강승삼, 이하 KWMA)와 한인세계선교사회(KWMF) 주최로 열리는 제5차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에서 가장 큰 관심은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한국적인 선교 모델입니다. 여러가지 한국적인 선교 특징 가운데 이현정 목사(UBF 한국대표)는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란 주제를 갖고 2일(금) 오전 전체강연을 전합니다. 본지는 한국선교의 역사적인 기점이 되는 이번 대회에서 전해지는 소중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NCOWE V 관련기사)

들어가는 말

내가 부탁(명) 받은 주제는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이다. 하지만 UBF의 선교를 “한국형 모라비안 선교”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내가 38년간 전임 사역자 중 한 사람으로 섬기고 있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는 어떤 선교의 모델을 본받아서, 혹은 어떤 선교신학적 이론에 근거해서 선교를 시작하거나 계속해온 것이 아니었다. 대학생 복음운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선교가 시작되었고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도 없다.

UBF 선교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우리는 모라비안 선교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우리의 선교형태가 그들을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거슬러 보면 이는 사도 바울의 선교 모델을 닮은 것이었다. 이후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선교 모델이나 모라비안 선교의 모델을 스승과 같이 생각하고 공부한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오늘날 급변하는 선교의 상황에서 모라비안 선교는 21세기 선교의 좋은 대안적 모델을 보여주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고 본다. 나는 모라비안 선교와 UBF 선교를 개관하고, 두 선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UBF 선교에 대해 좀 더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UBF 선교가 보완해야 할 점을 말한 후에 글을 맺고자 한다.

I. 모라비안 선교개관

18세기 유럽의 모든 교회가 자체 내의 문제에 얽매어 있을 때, 모라비안 선교회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실천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회였다. 모라비안 선교회의 전신인 형제회는, 1457년에 보헤미야의 쿤발트에서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들은 많은 박해와 핍박으로 인해 1722년부터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인 베르셀스도르에 들어와 자유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정착지를 “주님의 집”이란 뜻의 “헤른 훝”(Hern Hut)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이곳은 2세기에 걸쳐 세계선교 본부센터의 역할을 했다.

모라비안 선교회에서 파송된 첫 선교사는 1732년 서인도 제도로 파송된 레오나르드 더버 라는 토기장이와 데이빗 니치만 이라는 목수였다. 당시 토마스 섬이나 크르와 섬 같은 서인도 제도는 네덜란드령으로, 사탕수수나 코코아 농장을 위해 매년 10만 명 정도의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해 왔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이 흑인 노예들을 대상으로 선교했다. 대농장의 주인들은 흑인들이 크리스천이 되면 일하는 데 방해가 되고 또 반역을 일으킬까봐, 선교사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역으로 생활비를 벌면서 희생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리하여 17년 만에 2,000여 명의 신자를 얻게 되었고, 1879년에는 41개 지부, 78명의 선교사와 36,698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다.

1754년에는 재단사 대네, 귀트너가 남아메리카 수리남에 파송되었다. 이후 사업, 제빵업, 시계 제조업을 하는 동역자들이 합류했다. 이들은 회사를 세우고 현지 주민들을 고용했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선교사들의 실제적인 도움과 헌신을 통해서 855명의 인디언과 59명의 니그로, 그리고 731명의 노예들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린랜드에는 묘지 관리인인 크리스천 데이빗을 지도자로 세 명의 선교사가 개척자로 나갔다. 그들이 그린랜드 행 배를 타기 위해 코펜하겐에 갔을 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고 조롱했다. “무식한 평신도가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런 얼음 땅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에스키모인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굶어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키모인들과의 거래를 통해서 번 수입으로 생활을 했다. 그들이 얻은 첫 신자는 카이아나크라는 사람이었고, 그의 전도로 온 가족이 세례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듣고 북쪽 지방의 과격한 에스키모인들이 쳐들어와 그의 처남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생명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한편 에스키모인들은 고기를 잡을 수 없는 연약자나 병자, 노인들을 버리는 악습이 있었는데, 선교사들의 복음전파로 인해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사라졌다. 그린랜드로 파송된 선교사들 가운데는 항해 중에 배가 좌초되어 죽거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순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881년까지 19명의 순교자들이 나왔지만, 이들의 희생을 통해서 1,545명의 에스키모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다.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는 1736년 조지 슈미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헤른 훝 본부로부터 아프리카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지 7일 만에 네덜란드를 거쳐 아프리카 최남단 호텐토트 지방으로 갔다. 그의 믿음과 수고로 1742년 세례명이 윌렘인 사람이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크리스천이 되었다. 당시 아프리카 식민주의자들은 돈벌이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선교활동을 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 1754년부터는 보어인들이 주기적으로 아프리카 토착민들을 학살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위축되지 않고 복음을 전했고, 1882년에는 동부와 서부 두 지역에만 25개의 학교와 250명의 학자, 14개 지부, 11,704명의 세례교인을 얻게 되었다.

호주 원주민들은 아내 도둑질, 아내를 공동 소유하는 군혼, 유아살해의 관습이 있었다. 이 미개한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1805년 두 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호주에 도착했다. 그들은 라마훅에 학교를 세워 복음을 전했고, 옷 입는 것, 곡물 경작하는 것 등을 일일이 가르쳤다. 병원도 세워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이런 영향으로 모든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18세기 초 개신교 교회는 세계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었다. 그러나 모라비안 선교회는 1732년부터 6대륙 개척의 포문을 열기 시작하여 1930년까지 약 200년 동안에 세계 14개국에 3,00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잠자던 개신교의 선교를 깨운 선구자적 선교 공동체로 쓰임을 받았다.

II. UBF 선교개관

UBF는 1961년 9월, 1960년의 4.19 학생혁명과 1961년 5.16 군사 쿠테타의 정치적 격변기에 전남 광주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다. UBF의 선교역사는 1969년 당시 서독에 돈 벌러 가는 세 명의 간호사들을 안수하여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이후에 해마다 간호사 선교사들이 서독 여러 도시로 파송되었다. 이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기숙사 방에서 모여 성경을 읽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로써 극한 외로움과 언어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후진국의 꽃다운 처녀들로서 감당하기 힘든 노동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동시에 사명감을 갖고 독일어를 공부했다. 독일 생활에 적응을 하고 언어를 습득해 가면서 믿음으로 캠퍼스에 나아가 독일 대학생들에게 전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서독의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역사의 결과 5년 뒤인 1974년 스위스에서 열린 제1회 서독 UBF 수양회에 165명(한국 선교사 40명 포함)이 참석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한 예로, 독일 본의 장(Chang) 선교사는 본(Bonn) 대학 박사과정 학생이었고 아내인 사라 선교사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가정을 개방하여 베르너라는 히피 독일학생을 10년간 집에 데리고 살면서 사랑으로 섬기고 성경을 가르쳤다. 서독에 파송된 UBF 평신도 선교사들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과 성령의 약속, 증인됨의 약속을 믿는 우직한 믿음으로 이렇게 했다. 그리고 무릎 꿇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현지인 대학생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예수님께 자신의 생애를 헌신하는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 독일 UBF에는 현지인 스탭 4명과 선교사들처럼 희생적으로 캠퍼스 선교를 섬기고 있는 60여 명의 헌신된 현지인 리더들이 세워졌다.

한편 1971년 이후에는 미국에 이민의 문이 열려 의사, 간호사, 봉제공, 그리고 유학생들이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71년 본국 여름수양회에서 고 이사무엘 선교사는 10년 뒤인 1981년에 미국 나이아가라에서 200명이 참석하는 수양회를 갖자는 기도제목을 제시했다. 이는 미국에 세 명의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했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기대하기 힘든 기도제목이었다. 그러나 그 해부터 전국의 모든 회원들은 이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도록 열심히 기도했다. 그 결과 5년을 앞당겨 1976년에 미국 학생 203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이아가라 제 1회 UBF 여름수양회”가 열리게 되었다. 현재는 미국인  스탭 20여명을 비롯해서 100여 명의 헌신된 현지인 리더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미국과 영국 UBF의 리더십이 현지인 지도자로 계승되었다.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제8회 세계선교 보고대회”에서 고 이사무엘 선교사는 향후 10년째가 되는 1995년까지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에 선교사를 파송해 주시도록 기도하자는 비전을 제시했고, 이후 회원들은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 결과 소련과 수교도 되기 전인 1990년에 88올림픽 이후 맨 먼저 문을 연 헝거리를 통해 첫 평신도 선교사가 3일 비자를 갖고 구소련의 모스크바에 들어가게 되었다. 1991년에는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30여 명의 UBF 평신도 선교사들이 모스크바에 파송되었고, 그 해 8월에 102명의 구소련 학생들이 참석한 “제1회 UBF 소련 수양회”가 빼쩨르부르크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필자는 주제 3강, 요21장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제목으로 전했는데, 공산주의 유물론의 철의 장막 안에 가려져 있던 구소련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울려 퍼졌던 그 수양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또한 1992년에는 중국에 첫 평신도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렇게 하여 1994년에는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1,000명 파송기념(72개국에 1,003명 파송) 선교보고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1996년에 14개국 146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UBF 아프리카 수양회”를 개최했다. 연도별로 보면, 1960년대에 서독, 1970년대 미국, 과테말라, 뱅글라데시, 1980년대에 카나다, 멕시코, 아프리카 말라위, 아르헨티나, 프랑스, 필리핀, 스웨덴, 홍콩, 일본, 인도, 이태리, 오스트렐리아, 볼리비아, 베네주엘라, 리비아, 파라과이, 말레시아, 스페인, 스위스, 타이완, 영국, 헝거리, 네델란드,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케냐에 개척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한국에서는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가 논의도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목회자 선교사 파송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던 1980년대에 이미 UBF는 30개국에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수백 명을 파송하여 현지 대학생 전도 및 제자화의 열매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에는 인도네시아, 쿠웨이트, 도미니카, 중국, 소말리아, 수단, 불가리아, 러시아, 스리랑카, 체코, 나이제리아, 벨지움, 이집트, 나미비아, 루마니아, 브라질, 수리남, 그리스, 유고, 몽골,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벨로러시아, 카자흐스탄, 우간다, 남아공, 덴마크,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파키스탄, 태국, 슬로바키아, 베트남, 가나, 네팔, 트리니다드 토바고, 몰도바, 터키, 이란, 예멘, 잠비아, 아이랜드, 이스라엘, 핀란드, 요르단, 짐바브웨, 레바논, 싱카폴, 카타르, 피지, 카메룬, 페루, UAE 포르투갈, 룩셈부르크에 개척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1990년대 10년은 가장 활발한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파송이 있어 이 10년 동안에만 앞에서 언급한 56개국에 전문인 자비랑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던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파나마, 탄자니아,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아프카니스탄, 루마니아, 칠레, 노르웨이, 에티오피아, 우루과이, 보츠와나, 스페인, 마케도니아, 쿠바,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파나마, 푸에토리코, 에콰도르, 베네주엘라, 크로아티아, 타지키스탄, 벨리즈, 라오스 등에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를 파송했다.    

한국 UBF는 2009년 말까지 92개국에 3,092명의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이 중에 1977년도에 한 그룹이 SBF(후에 ESF로 개명)라는 단체로 분리되었고, 2001년도에 다시 한 그룹이 CMI라는 단체로 분리되었다. 이로써 현재 UBF 소속으로 사역 중인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들은 1,700여명이다. 이들은 92개국 300여 지역에서 다양한 직종의 일터에서 일하여 자립하면서, 1대1 성경공부를 통한 현지 대학생 전도와 제자화의 사역을 섬기고 있다.

III. 모라비안 선교와 UBF 선교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공통점

(1) 뜨거운 선교열정
모라비안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언제 어느 곳이라도 자원하여 선교사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가족과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언제라도 순종하여 나아갔다. 그들의 뜨거운 선교열정은 본국의 신자와 선교사 비율 12:1로 나타났다. 당시 유럽의 개신교의 이 비율이 5,000:1이었다. 어떤 경우는 같은 가계에서 5세대에 걸쳐 선교사가 나오기도 했다. 인구 600명 정도밖에 안 되는 헤른 훝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호주를 제외한 전 대륙에 개척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모라비안 선교회는 약 200년(1732-1930)에 걸쳐 3천여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모라비안 선교에서 놀라운 것은 이들 중 상당수의 선교사들이 자송( ��을 했다는 점이다. 그 일례로 어떤 선교사는 사탕수수 밭에 있는 노예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스스로 몸을 노예로 팔아, 그곳에서 일하면서 선교사역을 즐거이 감당했던 무서운 열정이 있었다. 또한 오지에서 사역하다 순교한 자와 질병 때문에 순교한 자들이 허다했지만, 그 선교사들의 빈자리를 채울 후속 선교사들이 줄을 이었다. 소렌손이라는 사람은 “라브라도르에 선교사로 나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구두 한 켤레만 준비된다면 바로 출발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목숨을 바쳐 선교전선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UBF의 선교열정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한다. 1980년대 초 캐나다 개척 선교사 23명은 현지 봉제공장의 봉제공들로 취업하여 들어갔다. 인력개발원을 통해 봉제공 모집 정보가 광고되었을 때, 선교의 소명을 받고 기도하고 있던 회원 100여명이 지원을 했다. 그들 중에서 30명을 선발하여 재봉틀 20대를 사서 3개월간 봉제훈련을 시켰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학사들이고, 석사 자격증을 가진 자매도 있었다. 집중 봉제 훈련을 통해 봉제공 자격증을 따서 선교사로 나아갔다. 어떤 분들은 닭의 목을 따는 도계공으로 지원하여 선교사로 나아갔다. 아무도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쳤다고 했다. 사람이 시켜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선교명령에 순종하고자 이렇게 했다. 그들은 현지에 가서 낮에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영어를 공부했다. 캠퍼스에 가서 학생들을 전도했다. 후에 그들은 자립하면서 공부하여 직업을 바꾸어 주류 사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문인 자비량 선교를 섬기는 사역의 형태는 같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남미에도 개척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이(Lee) 선교사는 한국의 대기업 파견 직원으로 인도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많은 대학생들을 전도하여 결실을 맺었고, 제자로 세우게 되었다. 경건 생활에 힘쓰면서 믿음으로 회사 일도 감당했다. 그는 실적이 좋은 주재원으로서 신임을 받았다. 세 번이나 체류를 연장할 수 있었다. 이제 임원으로 진급이 되어 본사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고민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본사에 돌아가면 장래가 보장되고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사역의 열매로 자라고 있는 현지 대학생들과 리더들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는 회사에 사직을 하고 현지에 남기로 결단했다. 그의 실천적 삶을 보고 현지인들이 감동을 받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선교사는 이후 공장을 차려 현지인들 수십 명을 고용한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선교사가 3명 나왔고, 현재는 인도에 네 개의 대학생 예배 공동체가 탄생되어 네 명의 현지인 리더들이 교수 목자로서 사역을 섬기고 있다. 이들 중에는 힌두에서 개종한 자들도 많이 있다. 이 선교사는 수 백 명의 현지인 리더들을 양육하며 뒤에서 섬기고 있다.

김(Kim) 선교사는 사시를 패스하여 검사를 하다가 큰 로펌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선교의 소명을 받고 미국에 가서 수년간 신문배달과 아파트 제니터 일을 하며 캠퍼스를 개척했다. 물론 후에는 변호사 일을 했다.
 
일본 개척자들은 대부분 유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새벽에 신문배달, 낮에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인쇄소의 야간작업, 접시 닦기, 사무실 청소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립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박사가 10명 넘게 나왔다. 그리하여 대학교수, 강사, 연구원, 카운슬러로서 대학생들을 전도하고 제자 양육하는 선교사들이 나왔다. 

(2) 평신도 전문인 선교
모라비안이 서인도 제도에 간 선교사는 토기장이와 목수였고, 그린랜드 개척자는 묘지 관리인이었다. 당시 무식한 평신도가 무슨 선교를 할 수 있겠느냐는 조롱과 무시를 많이 받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전파의 열성이 있었으며,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사용하셨다. UBF 선교사들은 99.9%가 평신도 전문인들이다.

(3) 자비량 선교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모두 한 가지 씩 자기 기술과 직업을 갖고 있어서 언제 어느 곳에 떨어져도 먹고 살며 자립 선교를 했다. 의료사업이나 교육사업 또는 꼭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각 교회별로 선교기금을 모아 은행에 예금해두고 그 이자로 선교비를 지원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많은 돈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필요한 곳에 적절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할 수 있었다. UBF 선교사들은 99.9%가 자비량 선교사들이다. UBF도 꼭 필요한 경우는 선교비를 지원한다. 예컨대, 선교 오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자녀 교육비, 질병 치료비 등을 지원한다. 필요할 때에는 선교기지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좀 다른 것은 은행이자가 너무 적기 때문에 이자로 하지 않고 본부에서 선교기금을 모아서 지원하는 것이다.

(4)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UBF 선교사들도 본국에서부터 전문직을 얻어 해외로 파송되는 선교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도착해서는 청소, 신문배달, 점원 등 할 수 있는 일부터 자립을 시작한다. 동시에 대학에 들어가 어학을 연마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전문직을 얻어 그 사회에 들어간다. 직업의 종류는 교수, 컴퓨터 전문가, 개 미용사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직업은 대략 62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5) 파송 받은 선교지가 선교의 오지일지라도 뼈를 묻을 결단을 하고 헌신한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남아공에 초기에 파송된 이(Lee) 선교사는 26년째 사역하고 있다. 물론 자비량하는 전문인 선교사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안식년을 가질 수가 없다. 평소의 휴가는 현지에서 갖는 수양회나 제자양육에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선교사는 몇 년 만에 1주 혹은 2주 정도의 휴가로 본국에 와서 건강검진을 받거나 재충전을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물론 이런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본국의 전인 사역자들이 수시로 선교지를 방문하여 영적 재충전을 돕는다. 우간다의 유 선교사는 한국에서 의대교수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버리고 우간다에서 19년째 사역하고 있다.
 
(6) 작은 지부도 선교사를 파송한다.
출석교인 500명이 되어야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다. 전적으로 선교비를 지원하는 선교사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UBF에서는 30명이 모이는 작은 지부에서 10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를 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잘 훈련만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지역교회가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면 작은 개척교회도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다.

2. 차이점

(1) 모라비안 선교는 전도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UBF는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한 철저한 제자양성과 현지 지도자 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점이다.

(2) 모라비안 선교가 선교의 대상에 보편성을 갖고 있었다면, UBF는 전도 대상을 현지 대학생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3) 모라비안의 선교후보자들은 교인들의 훈련을 통해 일어났다면, UBF는 캠퍼스 비신자 전도 및 10여 년의 제자훈련 과정을 통해 자체 생산된 UBF맨들 중에서 선교후보자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UBF는 “전 회원 제자화” “전 회원 선교사화”의 방향을 갖고 사역하고 있고, UBF 맨들은 모두가 선교사 후보생들이다.

(4) UBF의 목표는 선교지 마다 현지인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다.
현재 독일, 미국, 캐나다, 영국, 인도, 몽골, 중국, 중남미 여러 나라,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경우 현지인 지도자들이 세워졌다. 또한 많은 현지인 출신 성경선생들이 탄생했다.

(5) UBF는 현지인 대학생들을 제자화 할 뿐 아니라, 제 3국에 자비량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도록 돕고 있다. 이로서 선교의 소명을 받고 제 3국으로 파송되는 현지인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재생산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현재 30명 정도가 일어났다. 이 역사를 보면서 세계 각 국에서 현지인 출신 선교사들이 일어나 전방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어 세계 복음화를 섬기는 환상을 보게 된다. 그 중 몇 사람의 예를 들겠다. 멕시코에서 UBF 전문인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영접하고 제자훈련을 받은 에프라인이 페루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한국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영접하고 제자훈련을 받은 블라드미르는 터키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고 있다. 수단에서 한국인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영접하고 제자훈련을 받은 오요르 모세가 이집트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고 있다. 미국의 단 쿠퍼 가정은 미국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버리고 아르헨티나에서 사역하고 있다. 미국의 쟌, 마리아 피스 가정은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인도에서 한국 선교사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훈련 받은 마태오는 포르투갈에서 선교사로 개척역사를 섬기고 있다.

(6) UBF는 많은 유학생 선교사와 이민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좋은 결실을 보고 있다. 특히 유학생 선교사들은 현지 언어의 습득, 용이한 현지인 지성인 접촉, 졸업 후 전문직을 얻어 자립선교사가 되는 유리한 점이 있음을 체험했다. 이민 선교사들은 비교적 빠른 기간에 현지에 정착하여 자립하며 선교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7) 현재 UBF선교사 파송은 본국의 회원 대 선교사의 비율이 2:1이다. 40년 동안에 3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훈련된 2천여 명이 언제, 어디로든지 자립 선교의 길만 열리면 선교사로 나가고자 대기하고 있다. 2041년까지 10만 명의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는 것을 목표로 전 세계의 회원들이 기도하고 있다. 본국의 회원 대 선교사 비율이나, 3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기간, 선교사 파송 대기자 등을 단순히 비교한다면 UBF는 모라비안을 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선교의 열정을 단순한 수치로서 비교될 수 없으리라고 본다. 나 개인적으로나 우리 공동체는 모라비안의 열정을 계속 배우는 입장이다. 특히 자송의 정신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IV. UBF의 선교사 동원
    
1. 제자양성

선교사 동원의 열쇠는 주님께 헌신된 제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제자양성에 관심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곧 방법론이다. UBF의 제자양성 방법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1) 깊이 있는 성경공부
UBF는 성경 본문을 깊이 있게 공부한다. 먼저 비신자 대학생을 성경공부에 초대한다. 귀납법적으로 성경 본문을 공부시킨다. 예를 들면, 창세기, 출애굽기 -- 식으로 책별로, 그리고 장별로, 절별로 가르친다. 이 본문공부는 주로 일대일 공부로 진행되며, 한 번 공부에 대개 1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리더들은 그룹으로 공부한다. 책임자로부터 모든 회원들은 매주 최소한 한 번 이런 방법으로 다른 본문을 공부한다. 한 주도 거르는 일이 없이 매주 다른 본문 공부가 4년, 10년, 20년, 그리고 계속된다. 이 성경공부는 성경지식을 전달하는 공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공부이다. 또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함께 말씀을 중심해서 삶을 나누는 공부이다.

(2) 소감쓰기
본문을 공부한 후에는 그 말씀에 기초한 메시지를 듣는다. 그 후에는 본문 기초공부, 들은 메시지, 프린트된 원고 등을 가치고 그 말씀에 기초해서 매주 소감쓰기를 한다. 이는 말씀의 내면화 작업이다. 소감쓰기를 통해 말씀을 내면에 심고, 삶에 적용시킨다. 그 소감을 일대일로 혹은 또래 모임에서 서로 발표한다. 중요한 성경구절들은 암송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와 믿음을 갖게 되고,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꾸준한 성경공부와 소감쓰기를 통해 성경적인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 형성된다. 한 마디로, UBF의 본문 성경공부는 속사람을 변화시킨다. UBF 성경공부의 초점은 사람의 본질의 변화이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헌신자들로 성장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한 사람을 도우려면 적어도 10년은 걸린다. 이런 성경공부를 통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선교신앙과 선교비전을 갖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요 성경선생으로 양성된다. UBF 선교사들은 대학시절 4년, 졸업 후 직장에 취직해서 일하면서 5-6년 이런 말씀훈련을 계속 받은 사람들이다. 한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UBF에 와서 10년을 성경공부를 했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3) 공동생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하셨듯이, 학생이 예수님께 헌신을 하게 되면 핵심 리더들을 공동생활에 초청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서로 동지의식을 갖고 서로에게 격려가 되며, 세상의 좋지 않은 영향력에서 보호를 받으며, 영성훈련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공동생활을 통해 어떻게 자신을 부인하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가 하는 법을 배운다.

(4) 목자훈련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자가 되면 캠퍼스에서 후배 학생들에게 전도를 하고,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게 한다. 목양 훈련을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거듭난 자를 재생산하는 성경선생이요 영적 리더들로 성장한다. 또한 그들을 수양회의 메신저들로 세워 말씀의 종으로 훈련한다. 졸업 후에는 직장을 얻고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훈련받도록 돕는다.

(5) 큐티와 기도훈련
새벽마다 리더들은 각 지부 센터에 모여 기도에 집중하도록 한다. 그리고 5년에 전 성경을 정독할 수 있도록 편집된 “일용할 양식” 책자를 가지고 매일 새벽 일용할 양식을 먹는다. 주어진 본문을 묵상하고 안내서를 따라 자기 노트에 소감식으로 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제자로서 개인의 영성을 기르는 법을 훈련을 하고, 성경에 기초하여 매일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다.

2. SGM 선교사 양성 및 자녀교육

(1) SGM 양성
UBF는 선교사 자녀들을 “선교사 자녀”(MK)로 부르는 대신에 어릴 때부터 “SGM, 곧 2세 선교사”(second generation missionary)로 부르며 정체성을 심는다. 대개는 부모들이 직접 매주 성경을 가르친다. 그들을 부모들의 사역에 동참하여 동역하게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개척 선교사로 헌신하도록 돕는다. 이들을 위해 현지 뿐 아니라 본국에서도 필요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도움으로서 2세들이 겪는 공통적 어려움인 정체성의 혼란과 선교지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훌륭한 사역자들로 배출되고 있다. 이들은 언어와 문화적 차이 문제가 없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더 훌륭한 현지인 사역자들이 될 수 있다. 선교사 수가 많아지는 만큼 자녀들의 수도 많아지는데 현지에서 자연스럽게 현지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현지 문화에 적응된 SGM 선교사들이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2) 한국리더들의 자녀훈련
한국의 리더들도 자녀들을 유치원생 정도일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한다. 또래 별로 공동체(EBF, MBF, HBF)를 이루어 단계적으로 훈련한다. 이를 통해 그들도 부모들의 신앙유산을 계승하며, 장차 대학생선교와 세계선교에 동참하는 사역자들이 되도록 돕는다.

3.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 양성 및 파송

(1) 처음부터 UBF 맨들은 철저한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님의 선교명령에 순종했다.
UBF는 개척초기부터 예수님의 선교명령에 순종하고자 기도를 했다. 선교의 문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했고, 문이 열리면 지체 없이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이런 믿음과 순종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 선교지가 정해지면 최종적으로 본부 훈련원에서 6주간 집중 훈련을 받는다.
훈련원의 훈련과목 중에서 성경본문 공부가 80%정도 차지한다. 매일 큐티 훈련, 사도행전 전 과목 고백적 문단나누기, 기타 성경본문 공부를 통해서 선교사로서 정체성과 비전과 믿음을 심는다. 그 외에 선교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문화적응, 신학훈련을 한다.

(3) 정기적인 선교보고회 및 선교지 체험, 현지인 초청 교제를 갖는다.
이런 선교보고회와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은 대략 2달에 한 번 정도로 갖고 있다. 그리고 매 5년마다는 국제적인 규모의 전문인 자비량 선교보고대회를 열고 선교사들과 그들의 열매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구체적인 사역 보고와 기도회를 갖는다. 이를 통해서 본회의 리더들은 자연스럽게 선교의 비전을 갖게 되고, 선교사로 자신을 헌신하게 된다. 학생들이나 졸업한 리더들을 수시로 선교현장에 단기로 보내어 선교사역에 동참하게 함으로 선교사로서 소명을 받게 된다. 또한 현지인 리더들이 본국에 와서 일정기간 머물면서 어학도 가르치고 교제한다. 이렇게 하여 언제 어느 곳이든지 선교의 문만 열리면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로 나아가 사역을 섬길 수 있는 선교후보생들로 준비시킨다. 매년 70-80명의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들이 파송되고 있다. 

V. UBF 선교가 보완해야 할 점

1. 섬김과 나눔, 협력

UBF는 이제 49세가 되었다. 나이로 치면 장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학원선교 단체로서, 평신도 운동 단체로서, 또한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를 양성하고 파송하는 단체로서 개척기의 역사를 지나왔다고 할 수 있다. 자립하면서 터를 놓는 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한국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나누고 섬기는 면에서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섬김과 나눔의 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작은 지체된 기관으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작은 지체로서, 한국교회를 섬기고 나누고 세워나가는데 힘쓰고자 한다. 또한 UBF가 소명으로 인식하고 추구하고 있는 사역의 방향이 캠퍼스 비신자 전도 및 제자양성,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양성 및 파송이라는 특수하고 좁은 영역이다 보니 보편성을 가진 지역교회 공동체에서 볼 때 자칫 배타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스스로 배타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우리가 받은 특수한 소명을 지키면서 동시에 거시적인 안목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도록 교계와의 연합사역을 적극적으로 섬기고자 노력하고 있다.

2. 전략적 파송

UBF 선교는 철저하게 자립선교의 원칙을 좇다보니 92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어도 비교적 자립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유럽이나 미주 지역으로 더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이제는 꼭 선교사가 필요한 미전도 종족 지역의 대학에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물질을 지원하는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를 선발해서 파송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런 지역에 유학생으로 가는 것도 방법이다. 이렇게 전략적 파송을 통해서 개척하면서 현지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고 만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급변하는 세대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초창기 보다 선교열정과 희생정신 개척정신이 약화되고 있는 약점이 있다. 우리는 이에 문제의식을 갖고 기도하고 있다. 이 외에도 약점이 많을 것이다. 약점들을 찾아 보완하며 성장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맺는 말

21세기의 선교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첫째, 선교사의 파송 비율은 세계의 인구증가 비율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 둘째, 목회자(성직자) 선교사의 입국을 제한하는 폐쇄지역이 증가하고 있다. 셋째, 종족과 문화의 장벽이 높아지고 있으며, 자국의 고유한 종교를 지키려는 종교정책을 강화하는 추세이다. 넷째, 선교사의 증가에 따른 선교비,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비, 선교사들의 건강관리 및 노후 대책 등 막대한 선교지원금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상황들은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 뿐 아니라,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하며 선교하는 “자비량 선교사” 양성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은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의 좋은 모델이다. UBF가 처음부터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 사역을 섬기게 된 것은 은혜요 복이라고 본다. 목회자 선교사 파송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급변하는 선교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과 세계 교회는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를 정책적으로 전략적으로 시행하는데 보다 적극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 전문인 자비량 선교의 모델이 된 모라비안 선교는 사도 바울의 모델을 본받았다면, 사도 바울은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던 예수님의 삶의 모범을 본받았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선교란 자기 부정이요, 자기희생이요, 자기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비량하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요 1:14절 말씀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UBF의 선교의 원리는 예수님이 성육신의 도리를 본받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겸손, 낮아짐, 자기부정, 자기희생, 자기죽음의 정신과 실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가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0.7.1)

이현정 목사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UBF 한국대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총무
선교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