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포럼(대표 이정익)은 6일(목) "출산, 왜 아기를 낳지 않으려 하는가?"라는 주제로 '저출산 문제'에 대해 제26회 신촌포럼을 개최했다. 이 날 행사에서는 전재희 장관(현 보건복지부 장관)과 방연상 박사(연세대 선교학교수)가 각각 "이거, 국가의 존망문제 아닌가?" "그 해결의 방법은"이란 주제로 발표했다. 다음은 방연상 박사의 발표 전문.

들어가는 글

지난 4월 21일 삼성경제연구소에서는 “저출산 극복을 위한 긴급제언”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지속적인 저출산으로 한국은 인구감소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1984년의 합계출산율이 인구대체 수준인 2.1명 이하로 떨어진 이후 2009년 현재 1.15명으로 OECD 선진국 평균인 1.75명의 65.6%에 불과한 수준이다”라고 보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당장 2010년부터 노동시장의 중핵 취업연령인 25-54세 인구가 감소할 것이다. 또한 2100년에는 한민족의 총 인구가 2010년 인구의 50.5%에 불과한 2,468만 명으로 축소되고, 2500년에는 인구가 33만 명으로 줄어 민족이 소멸될 우려가 있다” 고 우리나라 인구감소의 심각성을 보고한다.

한국사회에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결혼연령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으며, 기혼여성이 출산을 기피하고 있는 현상이 일상화되고 있다. 저출산 문제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면서 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에 기반한 목소리들이 힘을 얻고 있다. 국가의 인적 자원의 효율적 관리를 목표로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인구의 감소는 곧 노동생산성과 소비시장의 감소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이는 국가경영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게 될 중점과제라는 사실을 상식 선에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출산 문제가 고령화의 문제와 동시적으로 진행되면서 이와 같은 위기의식은 더욱 심화되고, 이에 따른 국가 차원의 체계적 관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들도 더욱 정당성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적 손실뿐만이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회구성원들의 노령 인구를 대체할 새로운 인구의 탄생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이른바 ‘민족적’ 정체성의 위협을 받게 될 것 또한 예상된다. 이미 다문화가정이 농촌결혼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성원의 감소/교체는 한국을 더 이상 단일민족적 정체성을 지닌 동질적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저출산 문제는 다문화가정에 따른 농촌인구변화와는 달리 근본적인 도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다문화가정에 따른 변화의 경우 한국적 정체성의 기반 위에 이들을 ‘외국인’으로 수용하는 다양성에 초점이 놓여있었다면, 저출산과 함께 진행되는 인구구성원의 변화는 한국적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재구성 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0년 후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인’, ‘한국적인 것’이 더 이상 ‘한국적인 것’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저출산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짙게 배어있다. 나아가 이 같은 변화는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소위 탈민족적 시각에서 객관화해야 하는 부담을 지니는 것으로 종래의 주권과 영토개념의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동아시아의 강대국에 흡수/통합되어 한반도의 주권이 전적으로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 위기의식으로까지 확장된다. 이처럼, 저출산에 따른 한국적 정체성의 위기는 비단 국가경영상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문화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총체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중요한 사안임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저출산 문제의 위기의식에 공감하는 것과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논의 사이에 필연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저출산에 대한 위기의식과 해결책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위기의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토대에 대한 사유를 통해 위기의식을 그 근원에서부터 성찰하고자 한다. 저출산 문제에 교회와 신학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저출산의 위기에 대한 신학적 공감은 국가기관에 대한 정책적 동의보다는 인간성을 도구적 가치로 환원하는 세속적 문화에 대한 성찰 곧, 비인간화를 통해 교환가치로 자리매김한 인간성을 초월적 사유의 관점에서 회복시키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저출산 문제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인간성, 특히 여성성의 도구화에 대한 면밀한 이해와, 현대사회의 지배적 담론에 대한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성찰을 요청한다. 신학이야말로 비인간화가 일상화된 현실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신학이 무엇보다 교회를 섬기는 학문으로, 세상을 위한 학문으로 부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신학이 교회와 세상을 ‘긍정’하는 도구적 담론의 역할에 그쳐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신학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선교적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제 역할을 다하도록 끊임없는 비판적 담지자가 됨으로써 ‘말해질 수 없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아도르노적인 의미에서의) ‘부정’의 역할을 해야 한다.

신학이 한국사회를 성찰한다는 것은 근대성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관련이 깊다. 한국사회가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근대화의 기획을 선구적으로 실행하며 근대적 가치의 보급에 힘써 온 기독교가 근대화의 이면에 대한 성찰에 있어서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자세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가치관의 생산과 매개의 역할을 해 온 한국교회가 그 존재기반이었던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것은 신학과 교회의 자기성찰과 관련된 과제이다. 한국사회를 무지와 야만의 늪에서 건져 풍요와 발전의 낙원으로 인도할 것이라 여기며 근대화 기획에 앞장섰던 기독교 지성들이 이제는 “근대화의 기획이 왜 우리를 또 다른 상태의 야만에 빠지게 했는가?”를 물어야 할 때이다. 또 다른 형태의 야만이란 바로 인간성의 도구화에 다름 아니며 이것이 저출산 문제의 내부적 가치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출산은 선택인가 의무인가?

한국사회는 지난 40년 동안의 산업화 과정을 지나면서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출산억제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정부의 정책 방향이 출산장려정책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출산억제와 마찬가지로 출산장려는 국가주도의 출산개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성 개인의 선택에 대한 사회적인 압력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출산장려 혹은 출산억제라는 표현과 언어 속에는 여성의 몸을 여성의 주체적 시각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몸을 출산을 위한 대상 혹은 도구로 인식하는 생각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성 출산 저하에 따른 사회적인 우려의 목소리는 우리나라만 뿐 아니라 서구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서구에서도 저출산은 인구학적인 현상으로 인식돼왔고 또한 저출산이 수반하는 결과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사실 서구 국가들도 이미 경험했듯이 출산율 저하는 노동력 구조를 변화시켜 부양인구비를 상승시키며, 노령인구의 증가는 연금, 건강보험 등의 재정 악화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저출산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정부의 정책대응의 모색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정부의 정책 담론 속에 출산의 주체인 여성과 여성성에 대한 성찰보다는 인구 고령화와 노동인구감소, 그리고 이에 따르는 “국가 경쟁력 저하”에 초점이 맞추어져 여성을 “재생산의 도구”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과거 가족계획사업이 저출산에 미친 효과는 명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모성의 사사화와 도구화 경향이 한국 여성들로 하여금 손쉽게 피임과 낙태를 실천하도록 만든 것은 분명하다. 생산과 노동에 비해 재생산과 보살핌의 가치가 폄하되고, 또 생산과 노동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재생산을 도구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한,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출산과 피임은 여성의 몸과 여성의 자유 혹은 권리에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고유한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에서 여성의 독자적인 힘과 자율성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피임과 재생산에 대한 것은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여성의 권리를 회복하는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다. 왜냐하면 임신과 출산은 여성만이 경험 가능한 것이므로 출산에 대한 권리는 여성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출산은 여성의 몸과 직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성의 생애주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며, 노동자 혹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삶의 기회를 형성하거나 제약함으로써 가족생활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국 저출산에 대응하는 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는가에 따라 여성들이 삶에서 직면하는 기회구조의 성격도 달라질 것이므로, 저출산 문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분석은 매우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급격하고 압축된 근대화 과정에서 시행된 가족계획은 모성의 도구화와 사사화 그리고 탈 정치화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대신 탈취에 의한 축적을 통해 부를 불균등하게 재분배하는 체제이다. 탈취에 의한 축적은 민영화와 상품화, 금융화, 위기관리와 조작, 그리고 국가재정의 재분배 등을 통해 발생하며 이 과정에서 모든 영역들에서 경쟁과 상품화가 촉진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직접적인 경제적 삶의 세계는 물론 교육, 보건, 복지와 같은 종래 사회적 삶의 세계로 생각되었던 영역을 모두 기업화할 뿐 아니라 그 속에서 개인 역시 자기를 통제하는 기업가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져 가게 된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가족의 과부하 현상은 가족단위의 생존전략과 계층상승이동을 책임져야 하는 어머니들에게 과중하고도 모순적인 부담을 안겨준다. 이러한 부담 하에서 ‘성공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모성과 유급노동을 조절하거나 선택하는 전략과 협상이 요구되며, 결국 자녀를 적게 낳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하여 푸코(Michel Foucault)는 근대적 주체를 역사적인 지식과 권력을 통해서 만들어진 산물로 규정하고, 특정한 지식의 배치나 권력의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주체성에 대해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계몽적인 이성의 능력확대를 통해서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가 증진된다는 칸트(Kant)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서양의 주체는 권력과 지식의 작용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인간인식의 선험적인 조건을 밝히려는 것과는 다르게 푸코는 특정한 시기에 어떤 권력의 작용을 통해서 자기를 주체화하는지를 분석한다.[1] 이것은 서구적 근대적 주체가 지식과 권력이 결합되는 담론을 통해서 어떻게 권력의 주체가 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푸코는 이러한 과정의 물적 구조가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하는 ‘주체화’ 과정에 주목한다. 푸코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어떻게 모든 개인이 기업가적 주체 또는 기업가적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개인, 집단, 조직, 사회체로 주체화시키는가에 주목한다. 노동자들은 시장의 자유로운 운영이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경제제도이며 인간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것이 사회에 가장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신자유주의적인 주장이 대두되는 상황 속에서 여성과 여성성의 도구화는 심화되었고 여성의 여성성은 지배적 권력의 그물망에서 통제되어 왔다. 가족계획은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적 개입’일뿐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 모성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임신과 출산을 사적인 일, 어머니들이 감수해야 할 일로 수용하는 소극적 태도, 다시 말해 모성의 탈정치화와 사사화를 초래하였다. 산업화와 가족구조의 변화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모성에 대한 문화적 규범 또한 달라지기 마련인데, 국가가 주도하는 출산통제 담론은 한국 사회의 모성인식에 하나의 밑그림을 제공한 셈이었다. 그 결과 모성은 도구화, 주변화, 탈정치화되었고, 한국의 모성이란 지극히 사적인 역할에 국한되었다. 경제성장을 위해 총력 동원을 해야 하는 한국 사회에서 생명, 보살핌, 살림 등은 공적인 목표가 될 수 없는 낙후된 전근대적 가치에 불과하였고, 여성들은 이러한 전근대적 가치에 젖어있는 존재로써 근대적 훈육과 지도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가속화 될수록 가족생활에 미치는 시장의 힘이 정부 정책의 힘보다 커질 것이고 가족 재생산의 위기는 더욱더 심화될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저출산의 해결책을 단지 신자유주의 자본이론과 방법으로 찾으려는 시도, 즉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면서 정책생산을 시도한다면 그 정책의 현실적인 실효를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저출산에 관한 “출산장려” 정책은 단순히 근시안적인 출산율 증가를 목표로 하기 보다는 출산할 자유와 권리가 있는 주체로써의 여성의 여성성과 요구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부의 정책이 인간의 특히 여성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면서 여성의 입장에서 출산과 관련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가족 노동의 문제를 재 점검하여 구조적인 장애 없이 노동과 출산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정책설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책을 위한 제언 : 보살핌의 사회적 책임의 원리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가속화될수록 가족내의 사회적 경제적 갈등은 더욱 증폭되고 이에 따라 저출산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성과 보살핌의 가치를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핑스 안데르센은 가족내의 긴장과 갈등의 악순환을 벗어 나기 위한 방법으로 모성과 보살핌의 가치를 새롭게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미래 복지국가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여성의 취업과 가족(노동과 출산 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와 ‘새로운 젠더 계약(gender contract)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있다고 한다(Esping Andersen 1996: 26; 2002).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보살핌에 대한 사회적 의미가 어떻게 제도화되느냐 하는 것이다. 즉 보살핌을 사회적인 권리로 인정하는 것이다(보살핌을 받을 권리, 보살핌을 제공할 권리, 그리고 보살핌의 의무로 짓눌리지 않을 권리간의 균형과 조절). 미래지향적 사회정책의 원칙으로서 보살핌(care)의 사회적 가치는 재조명되고 있으며(Fraser 2000; Daly & Rake 2003), 저출산 정책에서도 ‘보살핌을 받을 권리’, 즉 노인수발과 아동보육의 사회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의 결과 보살핌을 받을 사람은 늘어나는데 생산노동력을 담당할 인구가 줄어든다는 점만 우려하는 것은 매우 편파적인 시각이다. 현실적으로 보살핌을 담당해 온 아내, 딸, 며느리 역시 줄어들며, 빈곤한 여성일수록 유급노동의 압박으로 인해 보살핌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부족하다. 저출산의 원인 진단이나 대응정책 마련이 지나치게 부계중심 가족 위주로 진행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으며, 이 과정에서 모성의 의미를 재해석해야 하고 모성의 젠더 정치를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 보살핌을 사회정책의 새로운 원리로서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보살핌을 권리의 차원에서 재조명하고 또한 소외되고 도구화ᆞ사사화된 모성의 사회적 의미를 복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보살핌을 사재(private good)가 아니라 공적 가치(public value)로 보는 방향으로의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살핌은 우리가 가능한 한 잘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세상’을 유지하고, 지속하고, 고쳐가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종의 (인간) 유적 활동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몸, 우리의 자아, 우리의 환경이 포함되며, 보살핌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복합적인, 생명-지속적인 그물로 짜여지기를 추구하는 활동이다.”(Berenice Fisher & Joan Tronto, 1991:40)

윤리적 책임 : 보살핌

현실 문제의 핵심인 전체성과 폭력성의 전통적인 사고에 대안적인 신학 그리고 윤리학적인 성찰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인식론과 인간주체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의 철학적 명제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이 철학적 사고는 인간 주체를 사고와 인식의 중심에 놓고 주체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상정하고 주체 밖의 모든 것을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객체에 대한 주체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관점이 근대철학과 지식이론의 기초가 되었으나 이러한 사고 구조는 인간을 주체성으로 축소시켰고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함몰시켰다. 그리고 존재는 주체의 지식 안에서만 의미를 갖게 되었고 인간 주체는 다양성을 단지 사고하는 주체에 친숙한 것으로 환원하고, 그것을 주체의 합리적인 구조에 따라 질서화 및 동일화된 지식을 창출한다. 이렇게 지식과 권력을 통해 주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비판은 근대 이성의 발전이 개인의 자율성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사고 틀에 이의를 제기한다. 지식을 통해서 형성된 권력, 혹은 권력에 의해서 창출된 지식은 이상화하는 사회를 위하여 개인을 길들이고 규정 및 통제한다. 인간은 규정되고 무엇인가를 위해서 길들여지고 있다. 개인의 독특성은 사라지고 보편성의 이름으로 차이와 다름을 억압하며 세계의 질서가 형성되게 된다. 따라서 플라톤 이후 데카르트, 헤겔과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서구철학에서 인식론적 존재론과 인식론적 주체의 형이상학이 타자와 타자성을 나와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지배로 발전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 주체의 지식에는 인식적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 홀로코스트와 식민주의, 인종말살(ethnic genocide) 등과 같은 반인륜적 범죄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전통적인 철학적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비폭력적인 사고가 가능한가? 혹은 비폭력적인 인간 주체가 가능한가?

이러한 폭력적인 인식론과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철학의 기본 명제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성찰이 필요하다. 즉, 우리에게는 대안적인 주체, 인식과 이해를 넘어서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 레비나스는 자아중심적인 존재론, 즉 타자와 타자성을 자아와 동일성으로 환원하려는 전체주의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타자를 존중하고 환대하는 “타자의 철학”을 주장하였다. 레비나스는 자아의 외부에 엄연히 존재하는 타인의 존재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새로운 철학의 방향을 제시한다.

레비나스의 책임윤리

레비나스는 타자를 인간주체를 구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설정한 철학자이다. 그의 사상은 서양철학 같이 항상 본질적인 것 그리고 이성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존재론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고 또한 주체의 이성만이 실재하는 진리를 사고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다는 사고와도 다르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적인 주체성으로부터 윤리적인 주체성으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전통적인 철학은 전체성을 추구하는 철학이었고 모든 것을 자기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형이상학적 환원주의를 기초로 하는 지식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다름(difference)을 존재론적인 구조를 통해서 제거한다. 즉 다른 것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동일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이성주의는 초월성과 다름을 제거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환원주의적 이성주의의 정치적인 의미를 강조하면서 정치적 전체주의는 존재론적 전체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존재론적 전체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존재(Being) 안에 있고 이 존재 안에서는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없고 반대도 할 수 없음을 가정한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1906년 1월12일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서 전통적인 유대가정에 출생했다. 1923년 스트라스부르그(Strausbourg)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을 만난다. 그 후 1928-29년 프라이버그에서 후설과 하이데거 밑에서 수학한다. 1930년 프랑스로 귀화한 후 제2차 대전 중 전쟁포로수용소에 감금된다. 그 후 여러 유수한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1973년부터는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특히 레비나스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세 가지의 요소는, 첫 번째로 러시아의 작가들이다.[2] 두 번째로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서, 특히 탈무드와 랍비의 주석이었다. 세 번째로 러시아로부터 프랑스로의 이주의 경험,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그리고 홀로코스트(Holocaust)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유대인으로서 겪은 경험이 깔려 있다. 그 자신이 전쟁 포로 생활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리투아니아에 있던 그의 부모와 두 남동생이 나치에게 학살되는 아픔을 안고 있었다. 특히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사건은 그의 철학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경험이었다.[3]

레비나스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그 자체가 만들어낸 참사라고 생각한다: “전쟁가운데서 스스로 내미는 존재의 얼굴은 서양철학이 지배하는 전체성이라는 개념 속에 고착되어 있다.”[4] 그러므로 레비나스 사상의 중심에는 현대적 사고에 도전하는 윤리가 있다. 근대 철학은 대 황폐를 가져다 주었다. 진리의 통일성, 자아의 통일성, 세상의 통일성 그리고 이성의 통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의 철학전통은 근대 역사의 현실과 정치적 이론들에 의해서 훼손을 당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이성은 정치와 폭력의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으며 또한 이념의 졸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지금까지 서양 문화와 철학은 대체로 도덕과 윤리를 이야기해 오면서도 실제로는 끊임없이 타자를 제거하는 전쟁의 문화요, 전쟁의 철학이며 전체성을 통해 개인의 인격 성을 제거해 버렸다는 생각에서 출반한다. 서양 철학은 도덕과 윤리를 말하면서도 인간을 역사의 산물로 또는 자연의 일부나 사회 구조의 한 계기로 봄으로써 전체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체성의 이념과 대항해서 전체성과 대립되는 무한성의 이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인격성과 주체성을 변호하자는 것이 그의 철학의 목표였다.

임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질문은 특히 홀로코스트 이후 그는 과연 유대인들이 참담한 사건 이전으로 돌아가서 사고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과연 유대교가 유대인들에게 이 처참한 사건을 통해서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제공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서양철학과 기독교 문화가 지켜주지 못한 유대인들의 생명에 대한 문제에 대한 고뇌에서 그의 사상이 출발한다. 그는 폭력성의 상징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근본적인 유럽의 철학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근본적인 철학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점검 없이는 그의 목표는 가능하지 않다고 사고했다. 그는 이 사건을 서양 철학의 붕괴로 선포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극히 유대교적인 사고를 제시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박해의 고통이 사람들을 절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자신에게 새로운 요구를 하도록 환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떻게 “나의 고난의 잔인함과 불타는 느낌과 나의 죽음에 대한 고뇌를 나의 이웃의 생과 사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전환시키느냐”가 그의 관심이었다. 이에 대해 데리다(Derrida)는 “Violence and Metaphysics"에서 레비나스의 사고를 화산 분출로 비유하면서 그의 사고는 그리스의 로고스중심사상보다 더 오래된 화산을 보여준다고 평가한다[5].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의 로고스는 물론 철학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고 철학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윤리라고 말한다. 사실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윤리를 철학의 한 가지로 보지 않고 모든 철학의 기본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윤리를 제일철학이라고 부른다. 윤리는 존재론적인 보편적인 이성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도덕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지고, 도덕적인 의무 혹은 책무는 이해와 의식의 작용 이전에 형성되는 것이다.

자유를 넘어오는 책임성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설정할 뿐 아니라 자율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 자유는 이성의 도덕적인 법에 순종하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자유의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체와 무한』에서 그는 과연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자유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하는데 동의 하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같이 살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우리는 자유라는 이념에 의혹을 갖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자유는 사실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사실 도덕성은 자신의 자유에 대해서 죄의식이 일어날 때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의 이웃이 자신의 자유를 갖고 나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이에 도전하지 않고 나를 억지로 서로 해를 미칠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에 의해서 형성된 자유라는 것은 제멋대로 될 수 있고 폭력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자유의 개념에 대한 견해와는 다르게 도덕성은 타율(heteronomy)에 의해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웃은 이러한 타율성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도덕성은 이성적인 혹은 합리적인 의지와 자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즉 내 자신의 생명보다도 이웃의 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이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자유라는 것은 외재성(exteriority)에 의해서 주관되는 것이고 이 외재성은 곧 하나님의 외재성이고 이웃의 외재성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가지고 있는 히브리 전통의 가장 중심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자유인은 그의 이웃에 담보 잡혀 있다.”[6]  그러므로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자유는 자율성과 같은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자유는 항상 계속적으로 타자의 타자성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타율성(heteronomy)은 주체(subject)가 다른 사람을 의식하게 하고 또한 인간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타율성은 피조물인 인간을 어려운 자유(difficult freedom)로 인도한다. 즉 인간 주체란 다른 존재의 부름에 대답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창조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물으시는 부름을 듣게 하는 기적이고 주체의 의미는 이 부름에 대한 대답에 있다는 것이다. 즉 주체의 유일성은 자신의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부름으로의 대답(answer)이 자신을 유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타율성은 인간을 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는 것이고  ‘자유인은 그 이웃에 담보로 잡혀있다’라는 말은 상충되는 말이라기 보다 이러한 어려운 자유(difficult freedom)는 선택 받았다는 의미이고 또한 종교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그러므로 율법은 사랑을 하게 하는 장치이고, 또한 명령들로 엮어진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령 없이는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7] 그러므로 종교적인 선택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책무가 주어졌다는 것이고, 자유이전에 책임성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책임이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관적인 나의 말과 행동을 뜻한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책임보다 자유가 우선이라는 사고를 부인하고 자유보다 앞서는 무한책임성을 강조한다. 즉 개인의 자유에 앞서 그리고 너머에 있는 책임성에 묶여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8] 그는 이에 대해 인간이 원하지 않을지라도 인간은 책임성에 쌓여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책임 있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성에 속해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책임성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임은 마치 운명과 같은 것이어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수동성(passivity)이라 할 수 있다. 즉 이웃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의해서 혹은 그의 요청에 의해서 내가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책임감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다. 즉 책임감은 주체의 삶을 분석함에 있어 핵심어이며, 그것은 나중에 설명될 선택사상(election)과 연결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인간주체는 무엇인가? 『존재와는 다르게 Othewise than Being』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주체에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주체 안에서의 존재발생(essence)에 앞서는 사건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헌신으로 결과될 자유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I)라는 말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책임지는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Here I am)를 뜻한다. 타인들에 대한 책임감은 우리 자신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동일성의 한계가 지속될 수 없는 격앙된 수축이다.[9]

그러므로 책임성이라는 것은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오는 집념이다. 이러한 책임성은 자아가 원하지 않는 것을 자아가 책임지는 것이고 타자를 위하는 행동이다.[10] 인간은 이러한 타자를 위한 책임성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 라고 대답할 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간에게 자율성이 아니라 책임성이 있음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형제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8)라고 하신 물음 속에 가정되어 있는 의미는 그가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의 운명에 대한 책임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 형제를 지키는 자이고 또한 이웃에 대한 책임성이 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지만 또한 타자들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에 인간은 모든 고통 받고 죽어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벨인 것처럼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즉 여기서 책임은 절대적 타율성이고 책임은 나의 자유의 한계를 초월하는 무한 책임이 있다.[11]

새로운 주체성과 선택(Election)

이러한 책임이 나의 자유스러운 선택의 결과가 아닌 타율성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레비나스는 election(선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12] 나는 특별한 사람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의미가 우선권과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보다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성과 의무를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기억하기도 전에 나는 타인을 위한 인질로 그리고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짊어진 자로 선택 받았다는 것이다. 마치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선택을 받았고 이를 피할 수 없듯이 나도 이러한 책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13] 즉 내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임을 지시한다. 그리고 나는 타인을 대신해 책임을 지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부름에 “Here I am”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여기서 Here I am이라는 주체는 그것이 책임성인 안에서 주체성이 된다. 이러한 주체성은 자율성 가운데서의 자기정립의 방식으로 결정되는 자아의 동일성을 통한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나의 주체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정된다.[14] 이러한 관계는 책임성으로 맺어지는 것이다. 책임성은 주체 안에서 자발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다. 특히 레비나스는 이러한 상황을 가까움 혹은 근접성(proximity)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간접성은 타자를 완전히 자신의 인식의 대상으로 상대화하고 자기화하는 통합이나 완전한 분리와는 다른 방식의 관계성이다. 이러한 타자의 가까움은 타자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고, 또한 자기의 동일성 속에서 편안히 거할 수 없이 타자의 어려움과 이웃의 고통을 방관할 수 없어야 하는 자아성을 설명한다.

주체와 타자는 합의를 통한 상호 호혜적인 관계가 아니며 주체는 아무 조건 없이 타자를 대신해서 타자의 끝없는 요구에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레비나스는 이를 대속(substitution)으로 설명한다. 대속은 나와는 무관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행한 것에 대하여 또한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을 책임지고 그들의 책임까지 내 책임으로 진다는 철저한 수동성을 말한다. 여기서 주체가 생기고 그런 주체 안에서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 책임은 끝이 없고 아무도 나를 대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참다운 정체성은 책임성 안에서 생긴다.[15] 주체는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도 대속하기까지 하는 한계 없는 무한 책임 속에서 타자를 위한 종속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면에서 대속은 레비나스가 말하는 윤리학의 기초이다. 

사실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신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은 실천보다는 이론에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론을 실천보다 더 가치 있게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인 구성을 통해서 실천적인 면들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이성의 범주 안에서 규정하고 인간의 이해의 영역으로 동일화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자체에 대한 관심인 하나님의 신비를 증명하려는 노력 때문에 하나님이 항상 이웃들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언급을 회피한다. 왜냐하면 본성을 논한다는 자체가 존재론으로 회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전통적인 철학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논의의 대상으로 구성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Supreme Being)로 만드는 것이고 여기에서 존재론적인 논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실 레비나스는 존재론적인 사고는 무신론적이라고 비판한다. 레비나스는 하나님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을 거부하고 또한 인간이 이성을 통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는 거부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를 거부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유신론(theism)적 신학 구조 속에서는 하나님을 전지 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신을 추상적이고 이론 속에 제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신론은 윤리와 인간의 존재적인 면을 잊어버렸다. 유신론의 신은 하브라함의 하나님도 아니고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의 길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이성중심의 철학적인 사고로 되는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는 여기서 윤리적인 입장에서 혹은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ity)인 면에서 신학적인 질문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인 신학적인 사고에서 윤리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신학적인 사고의 시작점은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재고로부터 시작된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주체성에 대한 재고는 윤리적인 재고(reconsideration)이다. 이러한 윤리적인 성찰은 – 타인과 함께하는 인간의 삶은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신학적인 성찰(theological reflection)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아무도 자연적으로 선할 수 없고 아무도 타자 없이는 선하게 될 수 없다. 선이라는 것은 존재론적인 구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 너머의 윤리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고독한 자아는 자연적으로 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선은 타자에 대한 책임성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16]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것은 타자를 보지도 않고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도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17] 이 말은 다른 사람과 같이하는 삶의 장소에서만이 주체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타자와 함께하는 삶에서라야 주체를 자신의 폐쇄공간(self-closure)로부터 구속하게 되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발견되고 나타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신학을 형이상학적인 윤리적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즉 타자의 얼굴은 우리의 의식으로 파악되지도 그리고 파악할 수도 없는 무한자(infinite)와 같다. 그리고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응답과 책임을 요구하며 비대칭적이다.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은 절대적인 타자, 규정 불능의 타자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타자의 윤리적인 요구는 주체의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하게 하고 타자를 위한 책임의 주체가 되게 한다. 이러한 책임성 안에서만이 윤리적인 주체가 구성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주체는 타자에의 노출을 통해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서 주체성은 타자로부터 온 것이고 또한 타자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18]

그리고 윤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타자를 위한 분리가 성립이 되어야 한다. 즉 타자가 나와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면 나는 타자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고 이곳에서는 윤리적인 관계가 가능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는 타자가 나를 볼 때 내 자신이 볼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바라본다. 타자는 나보다 높다.[19] 타자와의 만남이 내가 가르침을 받는 장소가 되고 타자와 마주쳐서 보고 있을 때 타자는 높은 곳에서 도덕적인 권위를 갖고 나에게 질문하고 비판한다.[20] 즉 이러한 관계는 초월을 향하게 하는 곳이 되고 나의 전체성 지향적인 사고에서 구멍을 발견하게 한다. 이러한 공간은 윤리적인 공간으로 타자와의 간격을 줄여나가는 것이 전체성과 합일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타자로 향하는 방향성(the approach)을 설정하는 곳이다.[21] 즉 다른 사람이 있을 때만이 인간은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타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타자의 나에 대한 요구는 점점 커지게 되고 타자를 향한 책임성이 점점 더 커진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관계 속에 하나님의 흔적(trace of God)이 있다고 말한다. 즉 무한자(the Infite)로서 하나님은 나를 나의 이웃들에게로 가까이가게 명령한다.[22] 여기서 신학적인 것이 윤리적인 힘이 되어서 나를 이웃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므로 신학적인 의미는 타자와의 윤리적인 만남 속에서 시작된다. 타자를 위한 원초적인 책임성은 인간관계에서 경험되고 또한 성경에서 명령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성 안에서 주체의 각성 혹은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근원적인 타자와의 윤리적인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한 나의 책임성에 대한 근원적인 각성이 이루어진다. 또한 이러한 인간으로써의 새로운 각성은 인간과 신과의 관계성 속에도 연결된다. 이러한 근원적 윤리적인 사건이 첫 번째 신학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윤리는 이성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경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자와의 윤리적인 관계가 이성이 작동하는 배경이다. 즉 윤리는 이성적인 영역으로의 진입로이다. 이에 대해서 코헨(Cohen)은 Nine Talmudic Readings 의 서론에서 레비나스가 추구하는 것을 새로운 인도주의 혹은 성서적 인도주의라고 부른다.[23] 사실 탈무드의 본문과 주석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구약성서(Hebrew Bible)가 얼마나 윤리적인 면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성경에서 많이 언급하는 율법은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명령이고 인간의 삶을 격려하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윤리적인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Hebrew Bible)가 말하는 종교는 윤리적인 종교이고, 토라 역시 윤리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인간의 길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이 의미는 신학에 있어서 윤리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윤리가 첫 번째 철학(first philosophy)만이 아니고 첫 번째 신학(first theology)이라는 것이다.

전통적인 유신론과는 다른 유일신론(monotheism)이 의미하는 것은 인류 모두가 형제이고 인류 모두는 서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는 서로서로에 대한 책임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일신론의 하나님의 의미는 이 세상 아무도 이러한 유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또한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고 무한 책임을 갖고 있는 무한자의 책임성은 우리로 이웃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것을 명령한다. 즉 여기서 가까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단지 하나님과 인간과의 전적이 차이를 조화시키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편에서 볼 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행동이지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해석된다. 즉 하나님께 간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 이웃들에게 가까이 간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타자와 함께하는 것이고, 타자를 위한 책임성을 최선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인 틀에서, 하나님을 공동의 선이라는 입장에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역할을 하는 개념을 축소하기 보다는 타자를 위한 책임성의 실천 속에서 나타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많은 세상의 정의를 위한 보증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선험적인 도덕성을 통해서 알려지는 분이 아니라 항상 나중에 경험된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점으로서 경험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질문(question of God)은 이론(theism)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실천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즉시, 항상 책임/반응과 책임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인간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웃/타자는 어떠한 것들보다도 중요하다. 즉 나는 이웃에게 묶여있다. 이러한 면에서 레비나스는 인간 주체를 새롭고 어려운 길로 인도한다. 인간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지는 한에서 인간주체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며, 만일 그가 인간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물론 언제나 그렇지는 않지만,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레비나스는 이런 책임감이 인간주체인 인간의 삶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한다. 즉 타인에 대한 돌봄은 자유선택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주체성을 규정하는 바로 그 구조이다.

새로운 Eucharistic 주체로서의 교회

레비나스에 있어서 윤리적 책임의 원리가 삶과 신학, 그리고 목회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학은 무엇보다도 윤리적이어야 한다. 윤리는 신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신학의 출발점은 이러한 계시 즉 타인의 부름에 대답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출발을 의미한다. 이런 책임감과 이런 느낌은 자유선택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책임적이라기보다는 이기적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아의 계약 혹은 아브라함의 계약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런 책임감에 부름 받았다. 책임감은 자유선택의 결과라기보다는, 인간이 한마디 하기 전에 인간을 선택했던 이런 계약의 양심으로부터 결과된 것이다. 타자들을 위한 나의 대속, 그러나 그것은 소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동일자 속의 타자는 대체할 수 없는 그 누군가로서의 나는 부름 받은 책임감을 통한 타자를 위한 나의 대속이기 때문이다.[24]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학이고 여기서 인간에 대한 성찰을 하는 것은 벌써 윤리적인 영역을 포함한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중요한 의미를 강조하면서 신학을 순수이론적인 경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인간들의 실천적인 영역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윤리학과 같이 실천에 대한 것이고 특히 타자의 부름(calling)에 대한 응답(answer)로 자신을 넘어가는 타자를 위해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주체성은 성례전적인 주체로 생각할 수 있다. 마치 성만찬의식은 비 대칭적인 관계에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하는 봉사인 것과 같이 성례적인 주체는 의도적으로 타자를 위한 것이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책임성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으로 정의에 대한 결심과 윤리적인 공동체 실현을 위한 노력을 위하는 주체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신을 타자로 향하게 하는 것으로 단지 한 사람에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3-26에서 성찬식의 예전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성찬은 책임의 예식이고 정의의 예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을 통해서 미래를 여는 예식으로서 “너(you)”를 위한 또한 많은 사람(many others)에게 미래를 주는 기념이다. 이 예식은 성만찬적(Eucharistic) 주체의 한 사람에 대한 책임성을 지시할 뿐 아니라 또한 많은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시도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성찬예식에는 정의와 책임의식이 깊이 연결되어 나타나 있으므로 성찬예식을 윤리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책임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과 같이 성찬예식도 사람들을 위한 구조로 되어있다: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은 너를 “위한” 것이다. 성찬식은 새로운 주체로써 이웃과 이웃의 정의를 위한 일, 그리고 타자들, 즉 외국인들과 난민과 약자들을 환대하는 일은 물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책임성을 갖도록 요구한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는 일에까지 참여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대속(substitute)은 레비나스에게 말하는 윤리적 주체의 핵(nucleus)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아로부터 윤리적인 자아로의 전환을 통해서 형성되는 주체성이다. 새로운 주체는 내 안에 있는 타자의 크기에 비례하여 타자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빵을 향유하는 주체로부터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외치는 요청에 귀를 기울여 나의 빵을 나누는 것이고 이것에 대한 윤리적 절박성과 책임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탄생 혹은 재발견은 새로운 교회의 지평을 여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본과 신자유주의 경제구조 속에서 비인간화되고 도구화되어 비인간화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인류와 사회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그리고 새로운 사회윤리로 보여질 때 교회는 또 다시 한번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하나님나라의 뜻이 보여지는 신앙공동체로 거듭날 것이고 이 세상 속에서 희망으로 하나님의 의로 보여질 것이다.

나가면서

지금까지 저출산 문제와 관련하여 가깝게는 저출산을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여성의 도구화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페미니즘적인 비판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함을 역설했고, 보다 근원적으로는 저출산의 문제가 근대성이라는 보다 큰 빙산의 일각임을 알고 근대성 자체에 대한 철학적 비판에 대해 소개했다. 존재론/인식론적인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서 근대적인 담론이 책임적 윤리로 전환되어야 하고 책임적 윤리로서의 실천이 곧 신학의 과제요, 교회 공동체의 실천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했다. 저출산에 대한 관심 자체가 인구통계학적 발상이라서 그 대책에 대한 논의 역시 인구학적, 경제학적 발상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한 측면들이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국가주의적, 경제론적 발상과 대안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보다 근원적인 해결은 그것의 ‘부정’과 ‘지양’으로부터 시작되고, 책임 윤리적인 신학과 실천으로부터 다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주체적 경제론이 타자론적으로 전환되는 그 지점에서 생명이 넘치는 하나님나라의 사건은 시작된다. 그것은 언제나 어렵고, 불가능해보인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강제적, 강박적 명령이요 지평이다.

방연상 교수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NY.,U.S.A.(철학, 종교학)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PA., U.S.A.(신학)
University of Edinburh, U.K.
2002~ 현재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AAR(American Academy of Religion) Member

[1] Michel Foucault, 『지식의 고고학』(The Archaeology of Knowledge) and 『감시와 처벌』(Discipline and Punish) 참조
[2] 특히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자주 인용하였고 특히 마켈의 말: “ 사랑하는 어머니... 분명히 주인과 종들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종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에게 하듯 나도 그들에게 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우리 모두는 서로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3] 레비나스도 독일군 포로 수용소 경험을 했고 그의 부모와 두 동생이 나치에 의해서 살해되었으나 레비나스는 프랑스 군의 통역관으로 참전했다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살해되지 않은 것은 오직 그가 입고 있었던 군복덕분이었다고 한다.
[4]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p. x.
[5] J Derrida, p. 82.
[6] Emmanuel Levinas,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Trans. Alphonso Lingis,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87, p. 149.
[7] Ibid, p. 57.
[8]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the Essence, p. 122
[9] Ibid. p. 114.
[10]Ibid. p. 114.
[11] See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p. 223
[12]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p. 223
[13]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the Essence, p. 165
[14] 콜린 데이비스, 『임마누일 레비나스 –타자를 위한 욕망』, pp. 156-157
[15] 임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양명수 옮김, 다산글방, 2000, pp. 129-132
[16] Emmanuel Levinas,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p. 52.
[17]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p. 77.
[18] 콜린 데이비스, 『임마누일 레비나스 –타자를 위한 욕망』, 김성호 옮김, 다산글방, 2001, p. 157
[19]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p. 103.
[20]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p. 171.
[21]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the Essence, p. 48
[22]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the Essence, p. 150
[23] Emmanuel Levinas, Nine Talmudic Readings, Tans. Annette Aronowicz. Bloomington, Indian University Press, p. 2.
[24] Emmanuel Levinas, Otherwise Than Being, or Beyond the Essence, p.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