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공동묘지 산지기였다. 늦은 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면 사람이 죽었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말없이 지게를 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돌아와 하시는 말인즉 “너무 가난해, 관도 살 수 없어 가마니로 둘둘 말아 뒷산에 묻고 왔다”며 지게를 손질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돈도 되지 않는 산지기 때려치우고 품이라도 팔으라 불평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굶어서, 행려병자로, 질병으로 버림받아 죽은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아버지 손길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아무런 보수도 없이 죽은 이들을 거두어 주셨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필자는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때로는 무서웠지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겠기에 땅을 파는 아버지 옆에 마냥 쪼구려 않아있었다. 사는 동안의 배고픔은 다 잊고, 저 세상에서나마 배불리 먹고 살라며, 소복이 담긴 밥그릇처럼 봉분을 만들어 토닥이는 아버지를 바라볼 때 따스함을 느꼈다. 그러나 집은 하루 밥먹기도 어려운 나날이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하루 삶을 이어가기위해 공장을 전전했다. 때로는 이발사, 껌팔이, 중국집배달원, 자개공, 안 해본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하며 길거리를 전전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저주하기도 했다. 추운 겨울 얼어가는 몸을 가눌 곳을 찾아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희망은 잃지 않았다. 반드시 꿈꾸는 자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살아갈 수 있었다.

밀린 월급을 받기위해 날마다 사장을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차일 피일 미루는 거짓말에 화가나 항의하다 몰매를 맞기도 했다. 그때 못배운 설움이 가슴까지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나날이었다. 시간은 덧없이 흘렀다. 12살에 집을 나서 객지생활을 한지 8년지나 어느덧 군대 갈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병역신검을 받고 군대에 가려는 희망도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유는 학력미달이었다. 군대가 면제되어 서글픈 마음으로 가방을 둘러메고 서울로 돌아왔다.

어느 추운 봄날 교회에서 기도하던 중 공부를 하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처음 시작한 것이 한자가 빼곡이 적힌 책받침을 구입해 한자 한자 공부했다. 왜 한자를 배워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 한자공부를 마치고 남이 버린 책들을 주어 읽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세월이 흘러가며 실력이 늘어갔다. 그 결과로 인해 중.고등 과정을 검정고시로 1년만에 마치고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 4년 동안 내내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무사히 졸업하는 것이었다. 많은 어려움은 있었지만 졸업할 수 있었다. 간신히 졸업한 대학 실력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교사임용고시도 떨어졌다. 교사를 초빙한다는 공고를 보고 수없이 원서를 넣어봤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메달렸다.

어느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연락을 받았다. 면접에 오라고. 전남화순에 있는 어느 중학교였다. 막상 면접에 가려고 하니 입고 갈 옷이 없었다. 구두는 달아서 너덜거렸고, 변변한 양복하나 없기에 친구를 찾아가 양복과 넥타이, 심지어 구두도 빌려신고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이 화순 능주중학교였다. 이 학교는 하나님이 예비한 학교였다. 탄광촌마을의 시골학교였지만 정말 기적처럼 꿈이 이루어져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교사가 된 이후 자신의 과거를 속이며 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어린과거와 중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려 노력했다. 행여라도 누가 알까 두려웠다. 속이고 결혼도 했다. 아내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았다. 꿈같은 세월이 흘러갔다.

1988년에는 학교를 광주에 있는 전남여상으로 옮길 수 있었다. 전남여상의 교사가 되어 새로운 꿈을 꾸며 살 수 있었다. 과거를 가슴에 묻어둔채.

그러던 1998년 어느 화창한 봄 토요일, 평범한 영어교사로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아내와 아들이 봄나물을 캐러 가자며 졸라댔다. 그저 따스한 봄볕이 아름다워 집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어느 초라한 외국인근로자가 나의 지난날의 고단한 삶을 되돌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그동안 자신을 속이고 과거를 숨기려했던 내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초라한 나를 교사로 만든 것은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인권이 무너지고, 병들고, 밀린임금으로 고통당하는 과거의 나를 도우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그래서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병든자를 들쳐메고 병원으로 달려가기도했고, 월급을 못받아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우기도했다. 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어 타국땅에 불귀의 객이 된 외국인근로자의 시신을 붙들고 가족을 대신해 목놓아 울어주기도 했다.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학교에 찾아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무런 불평없이 도움을 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청하는 도움의 종류도 다양해 졌다.

결국 교직자선교회 회원들과 동료 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공단에 초라한 창고건물을 임대하여 외국인근로자 문화센터를 열기에 이르렀다. 이 센터에 오갈데 없는 노숙자나 다를바 없는 외국인근로자들이 모여들었다. 병들어서, 실직해서, 때로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근로자였다. 결국 이 센터는 이국땅에 나그네가 되어버린 외국인근로자의 사랑방이자 쉼터가 되어갔다. 그 후 많은 기관을 설립했다.- 외국인근로자 무료진료소, 인권상담소, 광산외국인근로자문화센터, 공단교회, 한반도사랑교회, 쉼터, 무료급식소, 새날학교등이었다.

이 센터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그래서 후원계좌를 만들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들어오는 돈보다 써야 할 돈이 더 많았다. 결국 긴급한 돈이 필요하나 도움받을 길이 없기에 퇴직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점점 늘어가는 부채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너무 많은 도움요청에 전남여상 교사로서 직무를 감당하는데도 버거워져 갔다.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너머 죄를 짓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던 2004년 어느 근로자의 전화를 받았다. 도와 달라는 요청에 찾아가 보니 어린 아이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한국에 오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아이를 동반하고 입국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있기에 아무도 고용해 주지 않는다며 아이를 맡아 달라 했다. 결국 아이를 맡기로 하고 센터에 두었지만 아이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현직교사로서 낮에는 학교에서 일해야 했기에 홀로 둔 아이가 눈에 아른거려 쉬는 시간에 센터로 달려갔다. 아이는 갑자기 알지 못하는 나라에 왔고, 낯선 환경에 정신적 충격을 받아 아무거나 부셔댔다.

결국 버려진 아이를 주어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고아원에 맡기기에 이르렀다. 고아원에 맡기고 돌아올 때 홀가분한 마음보다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매주 찾아보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이는 정신적 충격으로 많은 고통을 당했다. 결국 아버지가 불법체류자로 단속되어 강제 귀국할 때 아이를 돌려 주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많은 아이들이 센터를 찾아왔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대안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학교를 막상 세우려 하니 아무런 돈도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무모한 일이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더 이상 마음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가 필요했다.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2007년 1월 18일 새날학교라는 이름으로 대안학교 설립식을 가질 수 있었다. 학교라고 부를 수도 없는 학교였다. 장소는 외국인센터 교실 한칸이었다. 학생도 단지 2명이었다. 그러나 이 학교를 통해 오갈데 없는 외국인자녀들이 마음놓고 공부할 장소였기에 소중하기 이를 때 없었다. 하지만 자원봉사 하겠다고 온 선생님들이 월급을 받지 못하자 다 떠나고 말았다. 떠나버린 교사로 인해 상처받을 학생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발만 동동거려야 했다.

전남여상의 현직 교사였기에 가볼 수 도 없었다. 그래서 수없이 하나님을 부르며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후 상황이 좋아져 교사들이 임명되고 학생들도 늘어갔다. 교실 부족으로 평동초등학교 빈 교실을 무상임대하여 이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규학교인 평동초등학교를 바라보며 학력도 인정되지 않는 미인가 대안학교의 서러움이 깊어갔다. 학력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늘어만 가는 학생으로 인해 더 큰 학교가 필요했다. 아무런 돈도 없었기에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멀지 않은 곳에 비어있는 학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았다. 수년동안 사용하지 않아 인적이 끊긴 폐교였다. 하지만 잘만 수리하면 마음놓고 공부할 소중한 공간이 되리라 생각되었기에 교육청을 찾아가 임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침내 입찰이 진행되어 월 100만원가량 지급하기로 계약하고 폐교를 임대받을 수 있었다.

수리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하였기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하여 수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저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자재는 사야만 했고 기술자도 필요했다. 수리비도 준비하지 않고 무모하게 공사를 시작해 놓고 보니 인건비와 자재비를 주지 못해 날마다 업자와 인부들로 부터 독촉을 받았다. 그래서 전화벨이 울리는 것이 두려웠다. 외국인근로자 체불임금을 받기위해 방문한 회사 사장님들의 난감한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폐교수리에 전념하던 2008년 10월 기도하던 중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학교를 떠나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그래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어떻게 들어온 학교인데 학교를 그만둬요. 안돼요!!! 강하게 부정했다. 또 학교를 그만 두면 금방 굶어 죽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딸은 돈이 없어 학원비를 주지못하자 혼자 집에서 공부하며 대학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졌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 둘 수없다며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더 분명하게 학교를 떠나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행정실을 찾아가 명예퇴직을 신청하고야 말았다. 동료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학교를 떠났다.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퇴직금을 받아 그동안 진 빚을 정리하고 보니 손에 쥔 돈이 별로 없었다. 이로 인해 가족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난 1년을 되돌아 보며 아내와 두 자녀와 부모님께 용서를 빌고 싶다. 무책임한 남편이자 아버지를 무던히도 원망했었다.

그러나 인생의 험로를 가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꿈꾸고 있다. 한사람의 희생을 통해 여러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이 길을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후회는 없다. 그러나 엊그제만 같던 전남여상의 교사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21년간 몸담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정든 학교를 떠나야만 했던 절박한 심정이 지금도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정년까지 근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정말 아름다운 학교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를.

현재 새날학교는 필리핀, 우즈벡, 러시아, 네팔, 중국, 남아공, 방글라데시, 일본, 몽골, 북한등 14개국에서 온 학생 83명이 재학하고 있으며, 한국어와 모국어 를 중심으로 초·중·고 과정을 교육하고 있다. 전담교사 25명에 외국어 협력교사 8명, 행정실 4명, 급식실에 조리사 3명이 근무하고 있다.

물론 학비는 무료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초· 중·고 교사들과 대학교수들, 지역사회 인사들이 십시일반 후원하여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2010년부터는 학력이 인정되는 정규학교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학력인정을 받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새날학교 학생들의 희망찬 모습을 꿈꾸어 본다. 왜냐하면 꿈꾸는 자는 망하지 않기에 말이다.

이천영 교장 (새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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