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G. 아펜젤러(H. G. Appenzeller)는 1885년 내한 이후 44세의 나이로 1902년 순직하기까지 방대한 선교 기록을 남겼다. 그중 1887년 1차 선교 탐방부터 1898년 원산~서울 여정까지 이어진 7차례의 국내 선교 여행 일기 가운데, 전문(全文)이 발굴·번역돼 공개된 것은 1·5·6·7차뿐이다. 필자는 아펜젤러의 국내 선교 탐방 여행 일기 총 7편의 현황과 특성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또한 기존 연구에서 혼선을 빚어 온 제5차 선교 탐방 ‘경기도, 강원도 순행 일기’에 나타난 오류를 학술적으로 비평하고 올바르게 고찰·정립하고자 한다.
3. 3차 선교 탐방 여행(1888년 10월 16일~11월 15일)
아펜젤러는 새로 임명된 닌드 감독(Bishop Ninde)에게 한국 지역 감리사로서 보고한 1889년 연례보고서에서 그의 선교 여행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889년 연례보고서 말미에 쓴 아래의 아펜젤러 보고서 내용은 필자가 발굴 번역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보고서 내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다른 분야의 활동 보고 보다 축소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서울 밖으로 1,830마일을 이동하며 선교 사역을 진행했으며, 그중 1,400마일 이상은 말을 타고 이동했습니다. 1888년 10월과 11월에는 해주를 방문했고, 1889년 2월에는 공주를,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조선의 8도 중 6개 도를 방문한 셈입니다. 시골 사람들은 이방인을 친절하게 맞아주며 결코 방해하지 않았습니다.”3)
3차 여행은 1888년 10월 16일부터 11월 15일까지 송도~소래~평양~의주~평양~해주~서울 일정으로 여행했다. 스크랜턴 의사와 함께 의주를 순회하며 초가집 한 채를 사 예배 처소로 사용케 했고 1명의 세례인과 14명의 학습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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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4월 칙령이 내려진 지 불과 5개월 반 만에 아펜젤러는 파울러(Charles Henry Fowler) 감독의 승인을 받은 후4) 1888년 10월 16일 의주와 평양을 다시 여행하였다. 그는 레오나르드(Leonard)에게 “조선 정부의 조서에 대한 의지를 시험하는 것에 대하여 선교사들이 주저하는 것에 대해 나는 결코 동조하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사역을 맡았다”라고 생각하며, 이 일을 하여야만 한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하였다고 편지를 쓰고 있다. 아펜젤러는 의주와 평양을 방문하는 31일간의 여행에서 32명의 예수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 16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한 명을 정식으로 교회에 입회시키고 의주에 예배 장소를 확보하였다. 1888년 11월 15일, 아펜젤러는 말을 타고 700마일을 여행하고 서울로 돌아왔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그 여정에 대하여서 기록하였다.
“조선 정부가 내가 무엇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고 내가 무엇을 하였는지를 모두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습니다. 긴 여행에서 다소 지쳐있지만 이 어두운 땅, 조선에서 그렇게 훌륭하게 복음의 문이 열려 진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5)
4. 4차 선교 탐방 여행(1889년 2월 18일~?) 서울 ↔ 공주
1889년 연례보고서 말미에 쓴 아래의 아펜젤러 보고서 내용은 필자가 발굴 번역한 아펜젤러 선교 여행기에 있는 연례보고서 초안 내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다른 분야의 활동 보고 보다 축소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닌드 감독(Bishop Ninde)에게 한국 지역 감리사로서 보고한 1889년 연례보고서에서 1889년 상하반기에 다녀온 두 차례의 선교여행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게 소개했다.
“1889년 2월에는 공주를,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전반기 2월에 올링거와 공주를 다녀온 여행을 아펜젤러의 4차 여행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 계획은 부산까지 가려고 하다가 공주에서 계획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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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2월 18일(월) 배재학당에서 사역하던 아펜젤러와 올링거(F. Ohlinger)는 조선에서의 새해 휴가로(역주: 음력 1월 1일은 양력 1889년 1월 31일 목요일이었다) 1885년 4월 2일 아펜젤러가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항구 도시인 부산으로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올링거가 150마일 정도 가는 동안에 240마일 정도를 나아갔는데 그는 주로 조선에 대하여 선교 정보를 얻는 마음으로 여행하였다.”6)
이 여행에 관해 데이비스는 아펜젤러가 보고한 연례보고서와 출발 날짜는 비슷하지만, 목적지 공주를 적시하지 않고 4차 여행 목적지를 부산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두 사람의 90마일이나 차이 나는 순행 거리와 여정에 대한 자료 인용 전거가 없어 그의 기술을 이해하기 힘들다.

존스(Jones)와 서울에서 출발해 지평~양평~원주~충주~문경~상주~진두~선산~대구~밀양~청도~남천~부산까지 방문 여정으로, 아펜젤러의 일기 중 가장 늦게 공개되고 가장 늦게 번역되어 알려진 것이 제5차 선교 여행이다.
5차 여행에 관해 아펜젤러는 1889년 연례보고서에 이렇게 단 한 문장으로 보고를 끝냈다.
“8월에는 대구를 거쳐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므로 아펜젤러 사후 연구자들 역시 내한 선교사로서 제일 처음 내륙 지방을 탐방 여행한 아펜젤러와 존스의 선교 여행 일기에 크게 관심도 연구 성과도 보이지 않았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중·남부순행 일기는 존스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9년 8월 16일 서울에서 출발해 8월 31일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16일간의 선교 탐방 여행기이다. (여행 출발지인 서울에 되돌아온 9월 7일을 기준으로 하면 23일간의 여행이었다.)
1889년 당시 미국 공사이던 딘스모어(Mr. Hugh Dinsmore)는 외부(外部)로부터 여행허가증인 호조(護照) 발급을 도와주는 대신 여행 중 설교와 선교 활동은 하지 말고 단지 1달간 전국 어디나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요즘은 8월의 더위가 예전보다 더하지만, 존스와 아펜젤러가 남부 탐방 여행하던 기간인 8월 16일~8월 31일 역시 한국의 불볕더위 기간이었다. 존스의 일기에 따르면 순행을 위해 그들 거주 구역의 중국인 총괄 집사 유(Major Domo Eu Steward)에게 6달러를 주고 이동 침대와 모기장을 준비해 출발했다.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가 여행을 마친 지 2년 후인 1891년 정리한 탐방 일기를 거의 40년 가까이 지나 KMF(Korea Mission Field) 1928년 11월호와 1929년 1월호에 노블(William Arthur Noble, 魯普乙) 선교사가 “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라는 제목으로 발췌 편집해서 실은 것이다.
아펜젤러가 1902년 순직할 때까지 국내 선교여행을 한 것은 모두 7차례였다. 그러나 존스 선교사와 함께 여행한 5차 탐방 여행에 관한 아펜젤러의 일기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2021년 2월까지 전문이 번역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아펜젤러 순행 일기에는 당시 부산에서 날씨가 험해 배가 뜰 수 없던 몇 일간 출항을 기다리며 아펜젤러가 작성한 향후 ‘조선 선교 구상’과 1889년도 감리교선교회 연례회의에 보고할 보고서(초안)를 연례회의를 주관하러 올 앤드루 감독(Bishop Andrews)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9월 3일 일기에 쓰여있다. 이는 기존에 전해오는 1889년도 연례회의 자료와 비교함으로써 선교사(宣敎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고, 또한 기존 보고서에는 들어 있지 않은 부산 선교 용지를 택하는 과정, 조선 선교 책임자인 앤드루 감독과의 개인적인 편지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선교 비전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이다.
아울러 강산이 13번이나 바뀐 그 시대의 옛 지명을 아펜젤러가 한글로 표기한 것을 보는 즐거움도 있고, 이 땅에 복음 씨앗을 뿌리러 탐방한 두 분의 선교 활동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라 생각한다.
여기에 아펜젤러가 순행 일기에 쓴 옛한글 단어들을 일기에 적힌 순서대로 소개해 본다.
“원쥬, 대구, 지병, 경긔도, 량근, 강원도, 츙쥬, 경샹도, 문경ᄉᆞᄌᆞ, 문경, 병안도, 경샹도, 함참, 샹쥬, 션산, 진두, 지금 와소, 다 잘잇소, ᄅᆡ일 ᄯᅥ나오, 아부인, 쳥도, 남쳔, 미령, 낙동”
이렇게 중·남부 선교 탐방여행에 관한 아펜젤러의 일기 원본을 필자가 2020년 10월에 기독일보와 선교신문에 편역해 공개하기 이전, 교회사학계의 저명한 교회사학자와 연구자들은 검증되지 않은 아펜젤러의 중·남부 선교 탐방여행에 관한 자료를 책이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러한 연유로 후학들은 그들의 기술을 아무런 의심 없이 인용해 오류 자료가 확대 재생산되어 굳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논고 Ⅳ장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비평하고자 한다. <계속>
[미주]
3) 1889년 감리교 연례보고서, 아펜젤러 선교사 보고 내용
4) 파울러 감독은 1888년 9월 24일 내한하여 한국의 선교 상황을 시찰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감리교 감독은 닌드 감독이었기에 파울러 감독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5) 다니엘 데이비스(김낙환, 김영훈),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의 생애와 사상, 배재대학교 출판부, 301.
6) Ibid, 301-302.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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