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씨티교회가 주관한 이번 영결식에는 유가족들을 비롯하여 송곡학원 산하 송곡여자중학교, 송곡여자고등학교, 송곡남자고등학교, 송곡관광고등학교, 송곡대학교 등 각 학교 대표들과 교사, 교직원, 학생, 지역 교계 인사들과 서울씨티교회 성도들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또 영결식장 밖 교회 복도는 물론 운동장까지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근조화환이 가득했다.
영결식은 송곡고 나용선 교감의 사회로 찬송가 245장 ‘저 좋은 낙원 이르니’ 찬송(오르간 반주 이승혜)에 이어 푸른솔송곡교회 김상민 목사의 기도, 나용선 교감의 고인에 대한 약력 낭독, 상주인 송곡대 왕덕양 총장이 추도사로 진행됐다.
왕덕양 총장은 이날 한평생 교육자로서 후학 양성에 앞장서고 기독교 건학이념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을 뿐 아니라, 근검절약을 생활화하고 신앙에서도 본을 보였던 어머니 이인해 권사 대한 기억을 회상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왕 총장은 “어렸을 때 첫 기억이 5살쯤 눈을 떠서 창밖을 보면, 설립자께서 흙벽돌을 하나씩 하나씩 찍어내셨다. 그게 마르면 학교 교실로 가서 쌓이는 모습들을 보고 자랐다”라며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교직원들과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틀이 옛날에 벽돌 한 장을 찍었던 그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송곡학원이 공식적으로 기독교 학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인께서 이북에 사시다가 넘어오실 때부터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라며 “평생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틀이 되셔서 지금 각 학교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사람을 구원하고 교육 등 여러 면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했다.
왕 총장은 이와 함께 “직접 만나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많은 것을 아끼셨다. 대학에 한 번씩 오셔서 복도에 불이 켜져 있으면 항상 끄고 다니셨고, 어렸을 때도 가정에서 용돈을 모아 축구공을 하나 사서 마당에 잠깐 놔두면 그다음 날 학교 학생들에게 주어지곤 했다. 또 어제 국기원에서 (고 이인해 권사에게) 명예사단증을 드렸는데, 옛날 성동학교의 태권도부 학생들을 학교에서 밥을 직접 다 해서 먹이셨다”고 말했다.
왕 총장은 이처럼 “평생을 교육과 함께 교육 속에서 사셨고, 제자들의 삶, 학교의 여건 개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마지막까지 사셨던 분이다”라며 “젊었을 때 어떤 손짓과 날갯짓을 하느냐, 어떤 꿈을 꾸느냐에 따라 이다음에 선한 결과물, 인류와 내 주위 사람들을 위한 이타적인 결과물로 잘 나타난다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왕덕양 총장은 “설립자라면 아주 화려하고 멋있게 살 것 같지만, 오래전부터 집이 없으시고 몇천만 원짜리 전세에 사신 분”이라며 “항상 감사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이든지 베풀며 생활하셨기 때문에 귀감이 될 만하다고 말씀드린다. 그 모든 뜻이 아름답게 계속 이어지길 원한다”라고 말했다.
조 목사는 “이인해 권사님이 바로 오늘 본문과 같으신 분”이라며 “권사님의 꿈이 이 학교들이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학교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도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래) 기독교 학교가 아닌데 기독교 학교로 정관을 바꾸는 일을 하셔서 십수 년 만에 (남편) 왕표순 장로님(송곡학원 설립자)의 허락을 받고 기독교 학교가 되었고, 제가 처음으로 이 학교의 교목으로 부임했다”며 “많은 교회도 세우셨는데, 5개 학교와 유치원까지 예배당이 있으니 교회를 세우신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지난 12월 1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 이인해 권사는 1929년 3월 7일 함경도에서 출생하여 1950년 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 작전 때 피란 왔다. 단국대학교 국문과,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48년~1955년 강원도 황지국민학교 교사, 1955년~1965년 성동고등공민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남편 왕표순 장로(2016년 소천)와 함께 1965년 송곡학원을 설립했으며, 1970년~1974년 성동상업전수학교 교사, 1974년~1976년 성동상업전수학교 교장, 1992년~2006년 학교법인 송곡학원 이사장, 2007년~2008년 송곡대학 부학장, 2008년~2012년 송곡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는 등 평생 교육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기독교 인재 양성에 앞장서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독교적 가치를 몸소 실천하며 본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