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에 펜윅 목사가 송천에 내려와 일 년이 못 되어 본국에 다녀온다 하고 다녀온 후에 원산(元山)에 가서 자리 잡고 일하자고 하여 나는 솔권(率眷, 집안 식구를 데려감)하여 서울로 가서 가권(家券, 집문서)을 형님댁에 두고 단신으로 원산에 내려가서 전도하며, 틈틈이 신자의 요긴한 책이라 하고 성경 구절에서 택하여 번역하는데, 펜윅 목사의 서투른 조선말대로 고집하니 나는 그 말대로 못한다고 하여 피차에 쟁론(爭論)만 되므로 할 수 없어 작별하고, 상경하였다가 도로 송천으로 내려오니, 펜윅 목사는 돈이 없는 사람이라. 수륙(水陸) 간 왕래에 내 돈으로 썼으니 이러므로 내가 빚을 지게 된 지라.

송천 내려오기 전에 마삼열 목사가 말씀하기를 지금은 펜윅 목사와 서로 헤어졌으니 부산에 내려가 배 목사와 같이 일하기를 청하거늘 허락하고 집으로 내려 오니라.

1893년 봄에 고윤하가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가는 윤선(輪船, 증기선)을 같이 타고 부산에 내려가서 수삭(數朔, 몇 달) 동안 있다가 전도하러 베어드 목사와 같이 양산으로, 대구로, 용궁으로, 안동으로, 전의로, 경주로, 울산으로, 동래로 돌아오는데, 대구에서는 영(令)27) 때라, 책 몇 권이라도 배포했으나 전도는 할 수 없더라28).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설립역사
▲1925년 10월 『신학지남』에 게재된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설립역사’ 글 첫 페이지 ⓒ『신학지남』
지명은 미상(未詳) 하나 부산에서 믿기로 작정한 한 사람을 찾았으니 이름은 김기원(金基元)29)이라. 종처병(腫處炳)30)이 심한 것을 보고 위로를 하고 섭섭히 떠나니라. 상주에서 4~5일 묵으며 전도하는데 하루는 향교에 가서 재장(宰匠)에게 전도하고 덕혜입문 한 권을 주고 왔더니, 그 이튿날 도로 가지고 와서 잘 보았노라 하고 도로 주고 가더라.

경주에서도 4~5일 묵었는데 전도는 잘할 수 없고 구경꾼의 욕설과 관인들의 놀림감만 되고 돌아오니라. 돌아온 후로 별안간 집으로 올 마음이 나서 회심(回心)할 수 없는지라. 배 목사는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되 듣지 아니하는데 마침 마삼열 목사가 내려와서 간절히 권하되 듣지 아니하고 떠나는데, 윤선(輪船)으로 인천까지 와서 목선으로 송천에 돌아오니라. 이해 겨울에 서울에 가서 한 달 동안 사경회에 참석하는데, 한석진(韓錫晋)도 처음으로 참예하고 양전백(梁甸伯)31)은 구경만 하고 가고 우종세는 몇 날 공부를 하고 가니라.

사경을 마친 후에 마삼열 목사와 리눌셔(李訥瑞)32) 목사와 같이 전도하러 공주에 내려가니 마침 영(令) 때라. 며칠 머무르며 책은 팔 수 없고 달력만 많이 판지라. 재미없이 떠나 청주로 갈새 가는 길 동안 점심때에 한 장터에서 ‘장군의 계책’을 많이 팔고 청주에 가서 책을 죄다 팔고 상경하니라. 이때는 전도 길이 많이 열려 전도할 만할 때라.

평양은 우리나라 대도시라. 마삼열 목사와 리길함(李吉咸)33) 목사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양서(兩西)에 전도하기 위하여 나와 같이 의논하고 같이 가기로 작정한 후 그날 밤에 또 가기 싫은 마음이 생겨 마음을 돌릴 수 없는지라. 날이 밝은 후에 마 목사한테 가서 가기 싫은 마음을 말하고 한석진을 거천하니, 리길함 목사는 한석진과 같이 평양으로 내려가고 나는 송천으로 내려오니라. 이때 나는 내 마음도 알지 못할 것은 부산에서 아무 연고 없이 집으로 오고만 싶고, 평양 가려 할 때도 아무 연고 없이 가기 싫은 마음만 났으니 후에 생각하니, 내가 부산에 있었던지 평양에 갔더라면 내가 송천에 있지 못하였을 것이오. 내가 송천에 없으면 맥킨시(맥켄지)34) 목사가 오지 아니하였을 것이오. 그러면 송천에 영광의 교회가 일찍이 서지 못하였을 것이오. 송천에 교회가 먼저 되지 아니하였으면 해서(海西)에 여러 교회가 일찍이 되지 못하였으리라. 범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려니와 범사에 기회가 있고, 사람이 기회에 하지 아니하면 모든 일이 되지 못할 줄 아노라.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설립역사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설립역사’ 끝 페이지(우) ⓒ『신학지남』
이하는 송천교회설립(松川敎會設立) 된 역사라.

1894년 계사(癸巳) 12월 회일(晦日, 그믐날) 한 키 큰 외국 사람이 조선인 한 사람과 같이 내 집을 찾아온지라. 맞아들여 문답한즉 영국 가나다(영국령 카다나) 사람 맥켄지라, 한문으로 번역하여 김세(金世)라. 평양으로부터 마삼열 목사의 편지를 가지고 온지라. 뜯어보니 내 집에 있으며 조선말 공부하기를 청하였거늘, 이에 허락하고 같이 있으며 말을 공부하다가 갑오년(甲午年, 1894년) 여름에 서울에 갔다가 가을에 도로 송천에 내려오니라.

이때 청일전쟁이 일어나 송천 10리쯤 바다 위에 일본 병선 수십 척이 둔취(屯聚)35)하니 인심이 소동하다가 병선이 간 후에 동학당이 또 일어나니라. 이해 겨울에 그 당이 크게 일어나 기고(旗鼓)와 총판(銃鈑)을 가지고 장연읍을 치고 군기를 탈취하며 방백(方伯, 관찰사)과 군수(郡守)를 사로잡고 무법한 세상이 되어 민간에 집곡 집전과 득도를 시킴으로 각 동에 남자는 태반이나 동학당이 된 지라. 이때 내 집에 수십 명이 모여 예배를 보는데 더러는 동학에 다니며 매 주일 같이 예배를 하는 것이 좌우를 관망하는 모양이라. 이때는 동학의 세력뿐이라. 송천에 양인(洋人, 서양인)과 서경조를 죽인다는 소리가 하루도 그치지 아니하며, 그 위험함을 견딜 수 없는지라. 김(맥켄지) 목사와 같이 피난할 방책을 의논하나 수륙 간 10리를 피할 데 없는지라.

하루는 김 목사와 내가 죽기로 작정한 후에는 두려움 없이 담대히 전도를 하니라. 하루는 해주 일 포가 우리를 죽이러 온다는 소리가 부절(不絕, 끊임없음) 하더니 황혼에는 30리쯤에 왔다 하는지라. 내가 한 사람과 같이 등불을 들리고 마조36) 가미동에 가니 가미동은 송천에서 10리 되는데, 황해도 내에 세력이 많은 대포(大包)37)라. 괴수자들과 내가 좀 아는 사이라. 저희들 모인 가운데 들어가 인사 후에 해주 포가 나를 죽이러 온다 하는 이유와 여러 가지로 문답을 하니 저희가 가니 굴한지라.

괴수자 김원삼이 동학 대전(大典)이라 한 책을 내어놓고 나더러 보라 하거늘 내가 한 장 반을 보고 덮어 놓으니, 왜 아니 보고 본 것을 알겠느냐 하거늘, 사람이 만든 책을 사람이 알지 못하리오 하니, 김원삼이 내가 본 중에서 아양숙기(兒養淑氣)38) 일구(一句)를 보이며 이 구절을 알겠느냐 하거늘, 이때 나는 무심히 보았으나 나는 임기응변으로 저희들을 꺾으려고 생각하고, 나는 알았으니 먼저 관해(貫解)를 듣고자 하노라 하니, 김(金)이 모든 사람을 가르치며 저 사람들은 다 알지 못하되 나는 알았으니 “갓난아이의 맑은 기운을 그대로 기르라” 한 말이라 하거늘, 내가 크게 웃고 이같이 무식하느뇨, 자고(自古)로 갓난아이의 맑은 기운을 그대로 기른 자는 누구뇨? 성인이 요순으로부터 공자에 이르러 능히 그러하뇨? 사람이 능히 못 할 글은 유불여무(有不如無)39)라 하니, 김이 그런즉 어떻게 해석하느뇨? 내가 천천히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람의 맑은 기운을 갓난아이 보양하듯 하라” 한 말이라 하니, 김이 가만히 듣고 무릎을 치며 과연 대선생(大先生)이로다, 천도(天道)하는 대선생이로다 하고 식물(食物, 음식)로 대접하며 해주포는 염려 말라, 내가 가는 길에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리라 하니, 이날 밤에 이 일은 장래 교회의 큰 관계라.

이튿날 인근 각 동 접주에게 지휘하여 송천에서 양인과 서경조를 극히 보호하라 한지라. 이튿날 내가 또 가미동을 가서 종일 담화하다가 석양에 작별하고 나오니, 괴수 두 늙은이가 들 밖으로 전송할 새 내가 걸어 나오며 말하며 차차 인도하여 한 숲 머리에서 두 늙은이의 소매를 급히 잡으며, 이것이 웬일이요? 무리를 많이 모으며 막중 군고를 타파하며 군기를 탈취하며 기를 받고 중북을 울리며 총검을 가지고 인민의 전곡40)을 늑탈하니 장차 어찌할 모양이오? 하니 두 늙은이가 12월 석양한풍(夕陽寒風)에 전신을 떨더니 내 말을 듣고 놀라는 빛으로, 왜양(倭洋)을 배척하고자 하노라 하거늘, 내가 왜양(倭洋) 지피지기(知彼知己)라야 필승 하나니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지피호(知彼乎) 아 부지(不知)라 하거늘”41), 내가 오합지중(烏合之衆)42)이 가령 1만이라 하고 양일병(洋日兵) 20명이면 진멸하리라. 지금 일본 병과 강화 병이 임의 출발하여 각 요로를 막았으니 부중지어(釜中之魚)43)라. 멸문지화(滅門之禍)44)를 당할 터이니 친한 사이인데 앉아서 볼 수 없노라 하니 두 늙은이가 내 말을 듣고 얼굴빛이 누렇게 변하며 내 손을 잡고, 어찌 아느뇨? 내가 신문을 보니 10일 전 일은 아노라 하니 두 늙은이가 그런즉 어찌하리오?
동학의 일은 내가 생명으로 보호하리니 우리의 생명을 구하여 달라 하거늘 이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오니 듣는 대로 알게 하여 줄 터이니 추운데 들어가라 하고 돌아오니라.

이튿날 김 목사와 같이 가서 존경함을 많이 받고 오니라. 차후에는 그 전에 동학에 착명(着名, 이름을 올림)하고 예배에 참예하던 사람들도 동학에 가지 않고, 아주 믿기로 작정하며 동학에 참여 아니하고 동정만 보고 있던 동중 사람들도 다 같이 와서 예배하니 매 주일 3~40명이 되더라. 이때 본군(本郡)에서 병대(兵隊)를 조직하여 동학을 토벌할 새 각 동에 작폐(作弊, 폐를 끼침)가 불소(不少)한지라.

본 군수와 교섭하여 근동에 동학에 참여 아니 한 사람과 같이 예배하는 사람의 명하에 물침(勿侵)45)하라는 문권을 얻어 주고 백씨(伯氏)께서 서울 법부대신 서광범 씨에게 열명(列名, 여러사람 이름을 나란히 적음)한 완문(完文, 관아에서 발급한 증명서)을 내어 경병을 막게 하였더니, 본군 병대 영장 노성학은 의주 사람으로 그 전에 심양 라(John Ross,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요, 나와도 친한 사람이라. 내게 편지하기를, 병대를 거느리고 귀동에 들어가면 분요할까 하여 가서 뵈옵지 못하고 강변으로 돌아가오니 용서하라 한지라. 이때 동학에 유명한 자들이 송천을 피난처로 알고 많이 모여드니 매 주일 80여 명이 예배하니라.

이때 동학이 매동리 집곡집전과 동학밥 아니해 먹인 동네가 없고 병대(兵隊)의 난리 안 겪은 동네가 없되, 송천은 두 난리를 다 피하였으니 극락세계가 된 지라. 이때 내 사랑방이 좁아서 예배하기가 심히 곤란한지라. 새로 예배당 짓기 시작하고 연보를 시작할 새 우리의 예배당은 조선에 처음이니 외국인의 재물은 드리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혹은 기둥을 전당하며 혹은 연목을 전당하며 혹은 다른 재목을 당하며 혹은 곡식 섬과 혹은 돈을 내며 혹은 몸으로 역사하여 기와집 8간을 필역하니 남은 돈이 50여 원이라. <계속>

[미주]
27) 약령시(令, 매년 열리는 큰 장)
28) 이 여행은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의 경상도 2차 선교여행(1893.4.14.~5.18.)으로, 서경조는 조사, 전도인으로 함께했다. 서경조의 기록 중 충청도의 전의를 방문했다는 것은 기억의 오류이며, 베어드의 여행지에 포함되지 않는다.
29) “김기원(金基元)은 1913년 6월 평양신학교를 제6회로 졸업하고 경남 웅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그는 경남과 경북지역의 초기 목사로 활약하였고, 대구 월배교회 초창기 조사로도 활동하였다.” 자료: 성주군 기독교 110년사, 98쪽.
30) 부스럼 난 병
31) 여기 언급된 한석진(41세)과 양전백(39세)은 서경조(58세)와 함께 1907년 한국 최초로 조직된 노회에서 장로교 최초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밖의 이들은 방기창(58세), 길선주(40세), 이기풍(40세), 송린서(40세)이다.
32) 윌리엄 데이비드 레널즈(W. D. Reynolds, 1867∼1951, 한국명 이눌서), 상임성서위원회 위원으로 성경번역에 기여한 레널즈는 1910년 4월 2일 이승두, 김정삼과 함께 구약성경번역을 완료했다. 『대한성서공회사Ⅱ.』, 대한성서공회, 1994, 78쪽.
33) 본명은 그래함 리(Graham Lee, 1861~1916). 1892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1912년에 귀국하였다.
34)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 1861~1895, 한자명 김세 金世, 매견시 梅見施, 선교사 재한 기간 1893~1895),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자생적으로 설립한 솔내교회(소래교회)의 초대 목사로 1894년 2월 3일 부임해 10개월 후 열병이 걸린 후 권총으로 자살했다.
35) 한곳에 모여 있음.
36) ‘마조’는 ‘마주’의 방언형으로 그 뜻은 ‘어떤 대상에 정면으로 향하다’이다. ‘마중나가다’도 오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마조’는 원래 국어대로 ‘마주’의 방언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
37) 동학(東學)의 대단위 조직. 여기 대포의 책임자를 대접주라 부르다가 1893년에 도접주로 고쳤다.
38) 맑은 기운(氣運)을 어린아이 키우듯이 기르는 일. 네이버사전
39)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라는 뜻으로, 있으나 마나 함.
40) 원문에 한자 표시가 안 되어 錢穀 인지 田穀 인지 특정할 수 없으나 전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41) 상대방을 아는가? 물으니 모른다고 답하거늘
42) 까마귀 떼와 같이 조직(組織)도 훈련(訓鍊)도 없이 모인 무리. 네이버사전
43) 「솥 속의 생선(生鮮)」이라는 뜻으로, 생명(生命)에 위험(危險)이 닥쳤음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
44) 한 집안이 멸망(滅亡)하여 없어지는 큰 재앙(災殃)
45) 개개거나 건드리지 못하도록 함.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