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가 전해주는 것
선교사는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 사명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복음 자체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오히려 미련하게 보입니다(고전 1:21~22). 그래서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은 그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의 신실성으로 복음을 평가하기 마련입니다. 선교 역사를 살펴볼 때 사회적 지위가 선교에 영향을 미쳤던 사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의사나 교사들의 헌신이 그 삶과 함께 복음 증거가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어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교사의 학력, 교양, 사회적 신분이 복음의 결과로 인식되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선교사가 누리는 특권(?)들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올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행 14:13~15).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에 대해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여겨 제사하려던 사람들을 말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창조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모든 종교는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진노를 피하고 복을 얻어내려는 인간들의 노력을 담고 있지만, 복음은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죄를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와서 섬기고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복음은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죽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문인 선교사는 복음의 본질적 가치에 대하여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 없는 열정이 위험한 이유
1.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때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교인 하나가 생기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3:15).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교에 헌신하여 선교지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을 넘습니까! 많은 사람의 후원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인 하나를 얻어내서는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천국 백성의 삶을 보여주고 가르치지 못한다면, 선교 헌신은 무익한 것이 아니라 해악을 끼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잠시 사는 동안 필요한 것들-주택, 자동차, 교육, 건강 보험, 휴가-에 매이지 않게 하는 것(빌 4:12~13)입니다.
2. 사회적 부정의가 심화가 되어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양산한다.
최대의 기독교 대륙은 아프리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비율이 절반이 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목상 기독교인일 뿐, 삶에 있어서의 부정직과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여, 뇌물이 없이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종종 듣습니다. 처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복음의 능력과 함께 나타나는 삶의 결과들을 점검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 그런 기대를 가지셨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복음으로 변화된 제자는 사회적인 공의를 세우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런 공의를 세우지 못한다면 더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상과 하나님을 혼합한다.
복음의 가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왜곡된 복음을 전한다면, 예수를 이용하여 병 낫고, 사업 번창하고, 돈 버는 데 혈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주님께 인도하는 수단일 뿐 그것이 복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도리어 복음은 고난을 당하게 하고, 그 고난을 뛰어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고후 6:6~10).
선교사는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어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상두 장로(치과의료선교회 전 대표)
출처 선교타임즈
선교사는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 사명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복음 자체는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이고 오히려 미련하게 보입니다(고전 1:21~22). 그래서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은 그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의 신실성으로 복음을 평가하기 마련입니다. 선교 역사를 살펴볼 때 사회적 지위가 선교에 영향을 미쳤던 사례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의사나 교사들의 헌신이 그 삶과 함께 복음 증거가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어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교사의 학력, 교양, 사회적 신분이 복음의 결과로 인식되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선교사가 누리는 특권(?)들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올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행 14:13~15).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는 기적에 대해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로 여겨 제사하려던 사람들을 말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고 창조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방의 모든 종교는 신에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진노를 피하고 복을 얻어내려는 인간들의 노력을 담고 있지만, 복음은 스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죄를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와서 섬기고 죽으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복음은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죽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문인 선교사는 복음의 본질적 가치에 대하여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 없는 열정이 위험한 이유
1.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때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교인 하나가 생기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23:15).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교에 헌신하여 선교지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난관을 넘습니까! 많은 사람의 후원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인 하나를 얻어내서는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천국 백성의 삶을 보여주고 가르치지 못한다면, 선교 헌신은 무익한 것이 아니라 해악을 끼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세상을 잠시 사는 동안 필요한 것들-주택, 자동차, 교육, 건강 보험, 휴가-에 매이지 않게 하는 것(빌 4:12~13)입니다.
2. 사회적 부정의가 심화가 되어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양산한다.
최대의 기독교 대륙은 아프리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비율이 절반이 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목상 기독교인일 뿐, 삶에 있어서의 부정직과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여, 뇌물이 없이는 일이 되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종종 듣습니다. 처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복음의 능력과 함께 나타나는 삶의 결과들을 점검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해 그런 기대를 가지셨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복음으로 변화된 제자는 사회적인 공의를 세우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데, 그런 공의를 세우지 못한다면 더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상과 하나님을 혼합한다.
복음의 가치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왜곡된 복음을 전한다면, 예수를 이용하여 병 낫고, 사업 번창하고, 돈 버는 데 혈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주님께 인도하는 수단일 뿐 그것이 복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도리어 복음은 고난을 당하게 하고, 그 고난을 뛰어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고후 6:6~10).
선교사는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어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상두 장로(치과의료선교회 전 대표)
출처 선교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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