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이끄는 삶’에 열광하는 이유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쓴 두 권의 책이 기독교계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바로 ‘목적이 이끄는 삶’과 ‘목적이 이끄는 교회’이다. 두 책의 공통점은 ‘목적’이란 단어가 키워드이다.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의 삶과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지고한 목적에 근거하여 그 목적을 이루는 일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왜 개신교 교회들이 이 책에 대해서 열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두 책이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목적’ 내지 ‘존재’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계몽주의 철학이 제거한 목적론
인류의 철학을 현대주의(modernism)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의 시대를 전 현대주의(Pre-modernism), 그 이후의 철학을 후기 현대주의(Post-modernism)으로 나눈다. 철학의 기본 요소는 존재론, 윤리론, 방법론, 논리론 등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철학이 발전하면서 방법론이 부각되게 되었다. 계몽주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실증이 이성적으로 접근하여 증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됨으로 상대적으로 존재론은 약화되기도 했고 고의적으로 존재론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했기 때문에 계몽주의 철학이 중심 철학이 된 이후에 세계는 존재론의 약화 내지는 부재 가운데 철학을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은 기독교계에도 침투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개신교도 존재론, 목적론 보다는 방법론을 훨씬 많이 다루게 되었다. 수많은 세미나에 가보면 목적론, 존재론을 많이 다루기 보다는 방법론이 핵심인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곤 한다 교회의 존재론 내지는 목적론이 약화된 것이 계몽주의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회들이 당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여진다.
선교와 목적론의 관계
선교적 교회 운동은 그 동안 제대로 된 방향성이 없어도 교회가 성장하면 된다는 ‘교회 성장학의 방법론 중심의 폐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대로 방향을 결정하고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영어 제목이 ‘Purpose Driven Church’인데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Mission driven church(선교가 이끄는 교회)’ 정도가 될 것이다. 목적이란 단어와 선교란 말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원래 미션은 헬라어의 ‘아포스톨로스’(보내심을 받은 자, 사도)를 라틴어의 미시오(mission)로 번역했고, 그것이 다시 영어의 미션(mission)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번역 가운데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어떤 목적을 위한 보내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요3:16) 주님께서도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구원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회의 목적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첫째는 제자 삼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제자 삼는 사역은 근본적으로 교회 성장학 측면에서 시작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시작된 주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위하여 주님께서 제시한 핵심적인 전략은 ‘제자 삼는 것’(disciple making)이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제자도에서 성장해 갈 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 삼는 일에도 헌신된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우주적으로 확장하도록 한다. 마치 누룩의 비유처럼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 삼는 일은 먼저 교회가 위치한 지역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교회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므로 주님의 공동체에 편입하는 이웃들이 늘어가야 한다(행2:47). 이러한 현상은 주님의 공동체가 건강하게 제자 삼는 사역을 행하고 있다는 매우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제자 삼는 사역은 자민족과 타민족을 포함하여 동시에 진행한다. 이러한 사역은 또한 국내외에서도 동시에 진행된다. 국내에서도 자민족 사역과 타민족 사역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서 ‘선교가 이끌어 가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국내외적으로 자민족과 타민족을 제자 삼는 일을 최우선 순위로 삼는 교회를 의미한다.
둘째는 증거하는 공동체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사도행전 1장8절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청사진을 제시하셨다. 제자 공동체는 주님의 증인(witness)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그 근간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모인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이 상실되었을 때 그 공동체는 더 이상 주님의 공동체로서의 건강성을 잃어버린 공동체이다. 소금이 맛을 잃은 경우와도 같다.
제자 공동체는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하는 지리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전략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제자 공동체가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이미 그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는 공동체이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지 않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잃어버린 공동체야 말로 짠 맛을 잃은 소금이다. 이런 소금들은 밖에 버리게 되고 사람들에 의해서 밟힌다. 지금의 교회들이 바로 세상에 의해서 밟히고 있다. 교회들이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짠 맛을 세상 가운데 골고루 치는 것이다. 주님의 공동체가 ‘선교가 이끄는 교회’인지에 대해 살펴보려면 교회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증거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균형을 가진 공동체이다. 주님의 교회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교제하기 위하여, 훈련하기 위하여 모이는 기능이 있다. 교회의 모임이 끝나고 흩어진다고 해서 교회의 기능이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성도들 가운데 함께 하시며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성도들이 교제하는 것처럼 교회의 정체성은 흩어졌을 때에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흩어진 교회는 가정과 직장이 대표적이다. 또한 성도들의 일반적인 사회에서의 삶이 예배와 교제의 연속선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장소의 제약을 받으시지 않는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공간적, 시간적인 측면에서 연속성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주님의 교회 공동체는 가정과 직장에서도 여러 섬김의 기회들을 통하여 주님을 섬겨야 한다. 사도 바울을 골로새서, 에베소서, 디모데 전후서 등에서 성도들의 삶의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인 가정과 직장 환경 가운데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적용점으로 제시하며 결말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는 공동체에 못지 않게 자신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기며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의 공동체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서로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주 중의 삶의 현장에서의 인도하심 때문에 교회에 모여 주님을 찬양하게 되고 또한 교제를 통하여 격려를 받게 됨으로 흩어지는 교회의 현장에서 더 좋은 사역의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러한 순환을 통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성장하고 견고해지게 된다(엡4:12~13).
선교가 이끄는 교회
교회들은 다시 실종된 교회의 존재론, 목적론을 회복해야 한다. 누룩의 비유나 겨자씨의 비유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장은 주님께서 분명히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교회의 목적을 상실한 채 성장만 추구한다면 교회도 역시 현대주의가 범한 우를 계속해서 반복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방법론에 집중해 있는 세상을 향하여 존재론,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조명하게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목적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교회들이 이 땅에서 죄로 인해 얽매인 것들을 총체적으로 풀어가는 ‘선교 공동체로서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로서 그 사명을 다해가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가 세상에서 계속적으로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교회의 정체성은 마땅히 ‘선교가 이끄는 교회’여야 한다.
송기태 선교사(인터서브코리아 교회관계팀)
선교타임즈 제공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쓴 두 권의 책이 기독교계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바로 ‘목적이 이끄는 삶’과 ‘목적이 이끄는 교회’이다. 두 책의 공통점은 ‘목적’이란 단어가 키워드이다.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의 삶과 주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지고한 목적에 근거하여 그 목적을 이루는 일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왜 개신교 교회들이 이 책에 대해서 열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두 책이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목적’ 내지 ‘존재’에 대해서 잘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계몽주의 철학이 제거한 목적론
인류의 철학을 현대주의(modernism)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의 시대를 전 현대주의(Pre-modernism), 그 이후의 철학을 후기 현대주의(Post-modernism)으로 나눈다. 철학의 기본 요소는 존재론, 윤리론, 방법론, 논리론 등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철학이 발전하면서 방법론이 부각되게 되었다. 계몽주의 철학은 존재에 대한 실증이 이성적으로 접근하여 증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됨으로 상대적으로 존재론은 약화되기도 했고 고의적으로 존재론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했기 때문에 계몽주의 철학이 중심 철학이 된 이후에 세계는 존재론의 약화 내지는 부재 가운데 철학을 다루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은 기독교계에도 침투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개신교도 존재론, 목적론 보다는 방법론을 훨씬 많이 다루게 되었다. 수많은 세미나에 가보면 목적론, 존재론을 많이 다루기 보다는 방법론이 핵심인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곤 한다 교회의 존재론 내지는 목적론이 약화된 것이 계몽주의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교회들이 당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여진다.
선교와 목적론의 관계
선교적 교회 운동은 그 동안 제대로 된 방향성이 없어도 교회가 성장하면 된다는 ‘교회 성장학의 방법론 중심의 폐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대로 방향을 결정하고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영어 제목이 ‘Purpose Driven Church’인데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Mission driven church(선교가 이끄는 교회)’ 정도가 될 것이다. 목적이란 단어와 선교란 말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원래 미션은 헬라어의 ‘아포스톨로스’(보내심을 받은 자, 사도)를 라틴어의 미시오(mission)로 번역했고, 그것이 다시 영어의 미션(mission)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번역 가운데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어떤 목적을 위한 보내심’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요3:16) 주님께서도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구원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회의 목적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첫째는 제자 삼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제자 삼는 사역은 근본적으로 교회 성장학 측면에서 시작된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시작된 주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위하여 주님께서 제시한 핵심적인 전략은 ‘제자 삼는 것’(disciple making)이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제자도에서 성장해 갈 뿐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 삼는 일에도 헌신된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우주적으로 확장하도록 한다. 마치 누룩의 비유처럼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 삼는 일은 먼저 교회가 위치한 지역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교회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므로 주님의 공동체에 편입하는 이웃들이 늘어가야 한다(행2:47). 이러한 현상은 주님의 공동체가 건강하게 제자 삼는 사역을 행하고 있다는 매우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제자 삼는 사역은 자민족과 타민족을 포함하여 동시에 진행한다. 이러한 사역은 또한 국내외에서도 동시에 진행된다. 국내에서도 자민족 사역과 타민족 사역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서 ‘선교가 이끌어 가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국내외적으로 자민족과 타민족을 제자 삼는 일을 최우선 순위로 삼는 교회를 의미한다.
둘째는 증거하는 공동체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사도행전 1장8절의 말씀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청사진을 제시하셨다. 제자 공동체는 주님의 증인(witness)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그 근간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모인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이 상실되었을 때 그 공동체는 더 이상 주님의 공동체로서의 건강성을 잃어버린 공동체이다. 소금이 맛을 잃은 경우와도 같다.
제자 공동체는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하는 지리적, 문화적인 측면에서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전략을 제시해 주신 것이다. 제자 공동체가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이미 그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는 공동체이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지 않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잃어버린 공동체야 말로 짠 맛을 잃은 소금이다. 이런 소금들은 밖에 버리게 되고 사람들에 의해서 밟힌다. 지금의 교회들이 바로 세상에 의해서 밟히고 있다. 교회들이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짠 맛을 세상 가운데 골고루 치는 것이다. 주님의 공동체가 ‘선교가 이끄는 교회’인지에 대해 살펴보려면 교회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증거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의 균형을 가진 공동체이다. 주님의 교회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교제하기 위하여, 훈련하기 위하여 모이는 기능이 있다. 교회의 모임이 끝나고 흩어진다고 해서 교회의 기능이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성도들 가운데 함께 하시며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성도들이 교제하는 것처럼 교회의 정체성은 흩어졌을 때에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흩어진 교회는 가정과 직장이 대표적이다. 또한 성도들의 일반적인 사회에서의 삶이 예배와 교제의 연속선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장소의 제약을 받으시지 않는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공간적, 시간적인 측면에서 연속성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주님의 교회 공동체는 가정과 직장에서도 여러 섬김의 기회들을 통하여 주님을 섬겨야 한다. 사도 바울을 골로새서, 에베소서, 디모데 전후서 등에서 성도들의 삶의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인 가정과 직장 환경 가운데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적용점으로 제시하며 결말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는 공동체에 못지 않게 자신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기며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의 공동체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서로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주 중의 삶의 현장에서의 인도하심 때문에 교회에 모여 주님을 찬양하게 되고 또한 교제를 통하여 격려를 받게 됨으로 흩어지는 교회의 현장에서 더 좋은 사역의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러한 순환을 통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성장하고 견고해지게 된다(엡4:12~13).
선교가 이끄는 교회
교회들은 다시 실종된 교회의 존재론, 목적론을 회복해야 한다. 누룩의 비유나 겨자씨의 비유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장은 주님께서 분명히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교회의 목적을 상실한 채 성장만 추구한다면 교회도 역시 현대주의가 범한 우를 계속해서 반복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방법론에 집중해 있는 세상을 향하여 존재론,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조명하게 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되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목적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교회들이 이 땅에서 죄로 인해 얽매인 것들을 총체적으로 풀어가는 ‘선교 공동체로서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로서 그 사명을 다해가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가 세상에서 계속적으로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이기 때문에 교회의 정체성은 마땅히 ‘선교가 이끄는 교회’여야 한다.
송기태 선교사(인터서브코리아 교회관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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