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전하는 모세의 일생과 전기(傳記)를 들여다보면 그의 생애에 두 번의 커다란 전환점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의 커다란 전환점은 그 주기가 정확하게 40년이다. 두 번의 터닝포인트를 지날 때마다 모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모세의 삶은 그리스도 삶의 모형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와 속박으로부터 구원해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였다. 모세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Mary Nell Wyatt, 리진만 역)에서 발췌한 아랫글에서 독자들은 40년 주기로 전혀 다른 모습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그리스도 삶의 전조(前兆)가 된 모세의 삶에 대해 놀라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출애굽 진실에 관한 저자의 30여 년간의 끈질긴 탐구 결과물로, 지난해 12월, 발간 1개월 만에 2쇄를 발간할 만큼 한국 크리스천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익히 영어 원서 『Battle for the Firstborn』은 ‘미국 아마존 화제의 도서’로 영어권 크리스천 독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아왔다. <편집자 주>
핫셉수트와 그녀의 영안실과 연결된 고대 이집트 기록에서 발견된, 파라오가 아닌 ‘세넨무트’(Senenmut)라는 이름은 가장 놀라운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를 기대하며 큰 흥분을 느끼며 수년을 보냈다. 나는 곧 세넨무트가 모세(Moses)라는 사실에 완전히 만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수집한 모든 정보는 선물과 같았다.
세넨무트에 대한 우리의 첫인상은 세넨무트와 네페루레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조각상에서 나온다. 이 조각상은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왕실의 젊은이가 옆구리에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을 묘사한다.
비문이 잘못 번역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자 상형 문자를 검토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고대 이집트 문자를 교육받은 사람과 이야기해야 했지만,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왜 질문을 하는지 그들이 안다면 내가 찾고 있는 정직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기적 같은 기회가 생겼다. 나는 하버드 박물관 중 한 곳에서 박물관의 비석을 해독하고 있던 하버드 박사 과정 학생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에게 질문할 이유를 제공한, 오래전에 해독한 비석에 관해서였다. 나는 그녀에게 이미 해석된 것을 재해석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것은 매우 유익한 대화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대 상형 문자를 정확하게 판독하고 그 해석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물었다.
내가 이 박사 과정 학생과 이야기할 때 언급한 것은 네페루레와 세넨무트의 조각상이 있는 상황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동상의 비문을 잘못 해독할 수 있는지, 식별을 잘못 적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예, 가능합니다”였다.
이 조각상은 분명히 그녀가 매우 사랑하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유형의 조각상은 이집트 역사상, 이 특정 시점에 처음 등장하고, 모두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을 묘사하고 있기에, 이 조각상이 그녀가 사랑하는 양자인 세넨무트(모세)를 안고 있는 어린 네페루레를 상징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핫셉수트, 왕위 계승자로 선언
그의 양어머니와 함께 세넨무트의 궁전에서 초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입양 7년째 되는 해에 그의 양조부는 투트모세 Ⅰ세라는 이름으로 황제 파라오로 등극했고 이집트 왕좌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계획을 나타내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미래의 군주를 준비하기 위한 계획이 고안되었다.
투트모세 Ⅰ세는 공동 섭정이나 남성 상속인이 없었다. 그는 이제 통일된 이집트의 미래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필요했다. 여성은 미래의 왕으로서 실행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지만, 전통적으로 왕실은 왕실 딸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 나는 이것이 그가 그의 딸을 사원의 벽에 공식적으로 올린 이유라고 주장한다.
역사가들은 핫셉수트가 자기 자신을 왕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왕위 계승자로서의 이 새로운 지위에 대해 ‘마트카레’라는 추가 이름을 받았다. 나는 그녀가 남자 후보를 위한 섭정으로서만 왕으로 통치할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 모습이 묘지벽과 기념물에 남자로 새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당혹스럽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해석 사이에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보면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는 이 사건들에 대한 연대기가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나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네페루레는 모세를 구한 어린 소녀였다.
• 핫셉수트는 어린 양자를 데리고 테베로 이주했을 때 황제의 딸에게 주어진 왕실 이름이었다.
* 위의 연대표 구분에서 투트모세 I세의 7년은 핫셉수트가 왕실 상속인으로서 그녀의 통치 기간을 시작한 해임을 볼 수 있다.
* 이때 모세의 나이는 18세로 12세 때부터 6년 동안 왕궁에서 살았다. 투트모세 I세의 7년은 아멘호테프 I세 시기로, 그의 통치 19년이기도 했다.
* 그녀의 양자로서 뛰어난 능력과 성실성은 그를 파라오의 미래 왕좌에 대한 큰 희망으로 만들었다.
* 이 가능성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 핫셉수트는 통치권을 물려받은 후계자 마트카레로 승진했다.
* 그녀는 상속인인 세넨무트와 그녀의 양자인 모세의 섭정으로 활동할 것이다.
*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내 주장은 일반인으로서 핫셉수트의 모든 조각상과 기념물들을 모세의 왕실 이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투트모세의 통치 7년은 황제로서 핫셉수트의 통치 1년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새로운 개념이었고 규정된 처리 방법이 없었다. 내 이론은 왕으로서 그녀에게 적용되는 그녀의 사원 벽에 있는 이름과 그림은 미래의 파라오가 왕좌에 올랐을 때 조정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여러 곳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녀는 사카라 태블릿(Saqqara Tablet) 왕 목록이나 아비도스(Abydos) 왕 목록에 나열되지 않았으므로 결코 통치자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모세가 미래의 왕으로 왕위에 오르려 한다면 파라오는 이 히브리 청년이 통치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을 그러한 지위로 끌어올리기 전에 이집트 왕좌에 대한 완전한 충성을 바칠 것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었다.
세넨무트의 능력과 지능은 분명히 평균보다 훨씬 높았고 그를 입양한 할아버지는 그를 당연한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미래의 군주가 자기 딸을 거치도록 준비한 것은 훌륭한 계획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투트모세 Ⅰ세의 재위 7년이었고 모세는 겨우 18세였기 때문에 이집트 왕이 그의 어린 입양 손자 세넨무트가 성장하고 성공하는 것을 참을성 있게 지켜봤다는 증거가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넨무트의 많은 업적을 나열한 조각상과 비문이 나타났다. 그는 적어도 90개의 다른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세습 왕자, 왕의 모든 일을 지휘하는 수석 청지기, 추밀원에서 청문회를 혼자 듣는 사람, 온 땅의 우두머리, 아문의 청지기, 왕실 인장의 착용자, 아문의 일을 감독하는 사람, 아문의 곡물 창고 감독관, 아문의 창고 감독관, 은 세공소의 모든 (작업) 감독관, 아문 정원 감독관, 아문 소떼 감독관, 아문 농노 우두머리, 닛 사원 감독관, 공주 네페루레의 최고 청지기, 국왕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청지기, 국왕의 참신, 추밀원의 오른팔’ 등이다. <계속>
※이 글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투탕카멘의 죽음』에서 발췌해 소개합니다.
글: 메리 넬 와이엇(Mary Nell Wyatt) 번역: 리진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