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1.jpg설 교 : 김병삼 분당 만나교회 목사
날 짜 : 2016년 1월 10일
본 문 : 레위기 7장 15-18절

[레위기 7장 15-18절]
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 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참다운 예배자로 살겠다는 고백은, 우리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시간을 두고 인생을 생각해 보면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객관적’인 중심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무엇을 중심에 놓을 것인지 결정하는 순간 삶의 지도가 새롭게 그려집니다. 이러한 결단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을 새롭게 정렬하도록 만들죠. 사람들은 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우리 주변의 모든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월간 목회에 실린 짧은 예화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이야기죠.
토요일 청년부예배를 앞두고 담당 목사님이 예배 시간을 알리고, 출석을 독려하기 위해 개그맨을 흉내 내어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청년부예배 오늘 오후 7시에 교육관에서 모입니다. 은혜로운 청년부예배에 한번 빠져 봅시다!’
주일 예배 때, 청년부예배에 출석하지 않은 청년을 보고 물었다.
“너 어제 왜 청년부예배에 안 나왔어? 내가 보낸 문자 못 받았어?”
그러자 그 청년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자 받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예배 빠지라고 했잖아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쓰는 용어와 세계관이 아주 유럽적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소위 ‘중동’ ‘근동’ 혹은 ‘극동’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쓰지만, 그 기준이 유럽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구는 둥글다고 믿지만 여전히 2차원적인 평면으로 생각합니다. 평면은 반드시 기준이 있어야 만들어지죠.
현재 우리가 쓰는 세계지도의 중심은 태평양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때가 16세기 마테오 리치에 의해서라는 것을 아시나요?
중국에 선교사로 들어갔던 그는 유럽을 중심으로 만든 지도가 중국의 황제와 귀족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어서 동경 170도를 중심으로 지도를 제작해 선물했던 것이죠.
이 새로운 지도에서 중국은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확대했고, 아시아에서는 태평양을 가운데 둔 지도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지도에서는 중동, 근동, 극동이 더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중심이 바뀐다는 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일인지 아시나요?
우리가 예배자로 살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신앙적 혁명인지 아시나요?

예배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를 보면 자신의 제물을 자신의 손으로 잡고 온전히 태움으로 죽음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예배는 온전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구약 제사 중의 하나인 ‘소제’는 제물이 가루가 되기까지 빻는 과정을 통해 헌신을 배웁니다.
예배는 온전한 속죄가 요구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고, 사람들에 대한 죄는 용서와 더불어 배상을 통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예배의 완성은 ‘나눔’을 통해서만이 완성됨을 오늘 말씀을 통해 배워가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회복은 필연적으로 수평적인 관계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예배는 거짓입니다.
거짓은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가 있지요.
어느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하는데, 사모님이 이불 보따리를 싸들고 강단으로 올라가더랍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니까, 사모님 왈 “우리 목사님은 설교할 때는 천사 같은데, 집에만 오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천사와 같은 목사님과 살려고….”

이것이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일까요?
저는 주변에서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저 사람은 교회만 오면 천사 같은데, 교회를 나가기만 하면 보통 사람보다도 못됐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전도의 장애가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기독교인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는 경희대학에서 “서구문화와 기독교”라는 과목에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들어오는 학생 중에 삼 분의 일을 제외하고는 비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저는 저 학생들을 전도할 사명감을 가졌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비기독교인들이 교회에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기독교인들이 이중인격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행동이 너무나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오히려 복음의 장애가 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사실 제가 그 과목을 가르칠 때, 그 과목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있었습니다. 먼저 이 과목을 가르치던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내준 숙제는, 부흥회에 참석해서 소감을 쓰고, 주보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생각에는 그 아이들이 예배만 참석하면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학생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심어주고 말았습니다.

제가 언젠가 “Oh, my gods!”이라는 연극을 보고 나올 때였습니다. 우연히 이 연극을 기획한 목사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오래되어서 연극의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내용의 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잘못된 헌금의 모습, 잘못된 부흥회의 모습, 잘못된 교인들의 생활 등.
그런데 놀라운 일은 나오는 관객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연극의 목적은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이 이런 것이 아님을 알려주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예배드리는 모습이, 온전한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중 인격적인 예배자의 모습은 “이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런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처음 만나 교회 담임으로 사역을 하던 때, 제가 쓴 [우리가 꿈꾸는 교회]라는 책으로 핵심자들을 위한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교회를 가득 채우는 꿈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 위에 구원받는 숫자를 늘리는, 하나님의 관심과 같은 꿈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에는 엄청난 부흥의 역사를 가져왔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숫자를 더하셨다”라는 말씀과 그 이유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으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들에게도 칭송을 받습니다. 이러한 온전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래 이 교회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내 주어야겠다.”라고 결심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일 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인정받는 교회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제가 만나 교회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교인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 빨리 교회 근처 아파트로 이사 오십시오. 주변의 아파트값이 무척 오를 것입니다.” 제가 부동산 전문가라서가 아니라, 저에게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교회가 들어오면 아파트값이, 혹은 땅값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이곳 분당은 만나 교회 때문에 집값이 올라가는 꿈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이곳에 있으므로,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해결되고, 노인 문제가 해결되고, 주부들의 삶이 건전해지고, 남편들의 영적 수준이 올라가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 구원받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입니다.
특별히 오늘 화목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가 이웃에게로 이어지도록 ‘나눔’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화목제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제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릴 때 드리는 제사요, 다른 하나는 서원제로, 서원한 예물을 바칠 때 드려졌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낙헌제로, 즐거운 일이 있어서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다, 문득 우리나라의 민요를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선창을 하고 후렴구에서 모든 사람이 따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쾌지나 칭칭 나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이 예물을 드립니다.”
그때 주변의 모든 사람이 모여서 축하하고, 같이 감격하며 그 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서원한 일을 이룰 때, 예를 들면 하나님께 아들이 목회자가 되도록, 혹은 건축헌금을 하도록 약속했는데,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축복하심으로 서원한 모든 것을 이루고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든 교인이 함께 모여서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은 같은 믿음의 공동체뿐 아니라,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말입니다.
또한, 내 삶에 예기치 않았던 즐거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 기쁨을 혼자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그다음 모든 사람이 모여서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예배입니다.

억지로라도…
그런데 화목제를 드리고 나누는 데는 법칙이 있습니다.
감사제인 경우에는 그날이 지나기 전에, 그리고 서원제나 낙헌제인 경우에는 그 다음 날까지 모든 제물을 나누어 먹어야 했습니다. 만약에 사흘째 되는 날까지 남아 있으면 그것은 불태워 버려야 했으며, 누구든지 기한이 지나서 먹으면, 드린 제사가 무효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보통 제사로 드리는 소 한 마리는 1,300근에서 1,500근이 나갔다고 합니다. 제사장 몫인 제물의 가슴과 뒤쪽 다리 하나를 떼 내었다 해도 나누어야 할 고기는 엄청난 양일 것입니다. 이 고기를 하루 이틀 만에 나누려면 한두 사람과 나누어서는 안 될 일이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심지어는 ‘미운 사람’과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칙을 지킬 수 없게 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싸우고 난 아이들을 억지로 화해를 시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라고, 손을 잡으라고, 너희의 입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라고. 아주 어렸을 때는, 서로 안아주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힘든 행동을 통해서 무언가 화해와 사랑의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어색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강요와 어색함 속에서 화해가 이루어짐을 종종 보게 됩니다.

눈물의 운동회라는 한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해 가을, 지방의 한 교도소에서 재소자 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다른 때와는 달리 20년 이상 복역한 수인(囚人)들은 물론 모범수의 가족들까지 초청된 특별행사였습니다. 운동회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운동장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오랫동안 가족과 격리됐던 재소자들에게도, 무덤보다 더 깊은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아온 가족들에게도 그날 잔치는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미 지난 며칠간 예선을 치른 구기 종목의 결승전을 시작으로 각 작업장별 각축전과 열띤 응원전이 벌어졌습니다. 달리기할 때도 줄다리기를 할 때도 얼마나 열심인지 마치 초등학교 운동회를 방불케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잘한다. 내 아들… 이겨라! 이겨라!” “여보, 힘내요… 힘내!”
뭐니 뭐니 해도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부모님을 등에 업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도는 효도관광 달리기 대회였습니다. 그런데 참가자들이 하나둘 출발선에 모이면서 한껏 고조됐던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수의를 입은 선수들이 그 쓸쓸한 등을 부모님 앞에 내밀었고 마침내 출발신호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달리는 주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들의 눈물을 훔쳐 주느라 당신 눈가의 눈물을 닦지 못하는 어머니, 아들의 축 처진 등이 안쓰러워 차마 업히지 못하는 아버지……. 교도소 운동장은 이내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니, 서로가 골인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듯한 이상한 경주였습니다. 그것은 결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의 레이스였습니다. 그들이 원한 건 1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부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단 1초라도 연장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도소의 교도관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작품입니다.
이들이 언제 부모님을 등에 업고 뛰어 보았겠습니까?
이름이 운동회이지 수십 년을 감옥에서 보낸 이들에게 얼마큼의 동심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등을 내미는 것도, 그 등에 업히는 것도 참으로 쑥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등을 돌려대는 순간, 등에 업히는 순간 ‘감격’이 만들어졌습니다.
만남의 감동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진행자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졌겠지요.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억지로’라도 등을 내밀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지요.
“너 스스로는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시키신다고 말입니다. 오늘 예배가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려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함과는 무관하게 순종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우리를 위한 감동의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적입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화해할 수 없음이 때로는 어색함 때문에, 무관심 때문에 깊어짐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화목제를 통하여, 나눔 속에서 화목의 열매가 거두어질 수 있음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제사가 하나님과의 화목만 이루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에서 인간과의 화목으로 귀결되기를 원하십니다.
예배는 반드시 사람과의 나눔, 미워하던 사람과의 화목으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때로 예배자에게 화목이 억지로 지우는 것 같으나, 이 일을 통해서 아름다운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미루지 말지니…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비이성적인 법을 만들어 놓으셨을까요? 오늘 나누지 못하면 내일 나누어도 될 일이고, 일주일쯤 후에는 더 많은 사람과 나눌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감사와 감격, 즐거움이 조금만 지나면 나 중심적으로 바뀔 수 있음을 말입니다.
수년 전에 미국의 LPGA에서 박지은이 우승했을 때 삼원가든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갈비를 공짜로 주었습니다. 우승하던 감격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감격이 얼마나 가리라고 생각합니까?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돈이 아까운 생각이 들 것입니다. 우승하던 그날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거지들은 구걸하여 음식을 먹을 때, 혹은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을 먹을 때, 부잣집 음식은 꼭 끓여 먹고, 가난한 집의 음식은 그냥 먹는답니다. 절대로 부자들은 상하기 전에 버리는 적이 없답니다. 자기가 안 먹어도 상할 때까지 기다렸다 버리는 것이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본성이란 절대로 남에게 선행을 베풀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의 그 마음, 그 선행이 바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한, 마음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존재임을 하나님은 간파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님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헨리 블랙가비, 클로드 킹 저)이란 책을 읽으면서 공감한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이 말씀하시고 나서 우리가 긴 토론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서 아는 말이지요.
첫 번째 드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요,
두 번째 드는 생각은 인간의 생각,
그리고 세 번째 드는 생각은 사단의 생각이라고 말입니다.

예배자는 예배시간의 만남을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 음성에 토론이 붙기 시작하면, 사단의 생각과 인간의 합리성의 기준이 따라오기 시작합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말씀합니다.
Just Do it!
Do it Now!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각에는 후회함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것이야말로 예배자의 삶을 따라 사는 사람의 첫걸음입니다.
예배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이야말로 가장 정결한 마음입니다. 세상의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마주 대함으로 주시는 생각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합니까?
문제는 순결하고 순수한 마음이 세상 것을 바라보면서 바뀌는 것이지요.

캔터베리 주교였던 William Temple은 이렇게 예배를 정의했습니다.
예배란 우리의 모든 인격을 하나님께 순종케 하는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의 진리로써 우리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그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에서 하나로 모아지게 되며,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덜 이기적인 감정이다.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보면서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처음으로 뵈었을 때, 그에게 들었던 마음은, “주님이 하시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그 마음을 그대로 받으셨습니다.
“그래 네가 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예배자인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드는 믿음의 생각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힘이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킬 만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직원을 고용하기 위해 냈던 필기시험 문제입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는 의사,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은 단 한 명만을 차에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하시고, 설명하십시오.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답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죽어 가는 할머니를 태워 목숨을 우선 구해야 한다.
둘째는 의사를 태움으로써 은혜를 갚을 좋은 기회이다.
셋째는 의사에게 보답하는 것은 나중에도 가능한 데 반해,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 있으므로 이상형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회사에 응시했던 200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종적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이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제 차의 열쇠를 드리죠.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다드리도록.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자신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을 간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얼마나 큰 기쁨과 희열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행이기에 절대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는 얼마든지 찾을 수도, 그리고 할머니를 통해 얼마든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이 열려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희생되지 않기 때문에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지요.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을지라도, 충만한 기쁨은 없습니다.
오늘 자신을 부인하고 서 있는 사람들, 하나님을 위해 헌신된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여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주일에 모였다고 말입니다.
얼마나 교회가 시끄러울까요?
내가 세상에서 그렇게 많은 핍박 가운데서 승리했노라고, 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내가 이렇게 이겼노라고, 만나서 간증하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울까요?
일주일 동안 처절하게 헌신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만났을 때, 그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서로가 껴안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여기저기서 “내가 승리했노라고” “하나님께서 이런 간증을 주셨노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아멘” 그리고 “할렐루야”로 화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처절한 투쟁을 하고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예배는 예배를 끝내고 오히려 예배당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예배당을 나가 차를 타고, 내 앞에 오는 차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순간부터 예배의 삶이 시작됩니다. 내가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 어려움에 부닥친 형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예배가 시작됩니다. 내가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 보기 싫어서 피하던 사람을 만나 먼저 인사를 건네는 순간 진정한 예배가 시작됩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는 순간, 내가 소원했던 부모님께 먼저 전화를 하므로 예배의 삶이 시작됩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서, 싸운 다음 한 번도 먼저 화해를 요청하지 못했던 아내와 남편에게 먼저 말을 걸면서 예배의 삶이 시작됩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자녀를 품에 안고 사랑을 고백하고, 그동안 소원했던 행동을 고백하면서 진정한 예배가 시작됩니다.
진정한 예배가 시작되면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됩니다.
용서가 시작됩니다.
예기치 않았던 감사가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참다운 예배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다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시간마다 죽어 가는 영들이 살아나야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죽었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시간마다 우리를 지배했던 더러운 영, 질투의 영, 시기의 영, 어둠의 권세들이 물러가야 합니다. 이러한 예배야말로 우리 교회가 꿈꾸는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생명력이 회복되고, 생명력 있는 교인들이 모여드는 교회의 부흥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는 예배 말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 생명력 넘치는 사람들이 가득 채워지는 교회 말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서 인격적으로 고백하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가장 신실한 예배자로 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일들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리의 삶에서 해야 할 이야깃거리가 생겨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간증’이라 부릅니다. 간증이야말로 가장 신실한 예배자들의 가장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주님의 영광 보리로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