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콥(대표 이바울)은 지난 30일(수)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원로목사, 사진)를 초청해 두 번째 신학특강을 진행했다. 김 목사는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요1:14, 막10:45)이란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다음은 김명혁 목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메시지 전문이다.

k.jpg오늘 여기 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에 와서 여러분들을 만나고 그리고 강의를 하게 되어서 좋습니다. 우선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터콥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하겠습니다. 저는 본래 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 진보적인 강원용 목사님도 오순절파적인 조용기 목사님도 싫어하면서 비판했었고, 일본도 북한도 싫어하면서 반대했었고, 쏘달리티(Sodality) 위주의 선교단체들인 NAVIGATOR, UBF, JOY, CCC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었습니다. 인터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었습니다. 물론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반 교회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지금도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의 입장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존중하게 되었고, 일본도 북한도 존중하게 되었고, 쏘달리티 위주의 선교단체들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동안 저의 비판으로 쏘달리티 위주의 선교단체들이 모달리티적인 즉 교회 중심적인 입장을 지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UBF의 대표였던 전요한 목사님을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중앙위원으로 일하게 했고 UBF의 현 대표인 이현정 목사님을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총무로 일하게 했는데 너무너무 만족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인터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특히 2007년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의 의해 샘물교회 봉사단원 23명이 납치된 사건에 인터콥이 연류된데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저는 2007년 7월 27일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번 불행한 사태를 목격하면서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의 내용과 방향의 전환을 모색한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해외 선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 선교 사역에 참여해오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혹시 우리 선교의 내용과 방향에 잘못은 없었는지를 반성하며 올바른 방향을 모색한다. 민족주의의 팽배와 문명충돌로 세계가 갈등과 긴장에 쌓여있는 지금 한국교회가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의 기본적인 선교를 지속하되 무엇보다 먼저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역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복음 전파와 사랑 실천의 사역은 언제나 겸손과 사랑과 지혜로 수행하여야 한다. 둘째, 복음 전파든 사랑의 봉사든 선교 사역을 수행할 때 현지인들의 정서를 깊이 고려하고 존중하여야 하며 현지인들의 마음에 상처나 거부감을 주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복음 전파든 사랑의 봉사든 선교 사역을 수행할 때는 현지인들과 현지 교회들과 현지 선교사들과 긴밀한 유대 및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현지인들을 격려하고 내 세우는 토착화 사역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단기 해외봉사자들은 현지인들의 삶에 동참하는 낮은 자세를 지니려는 겸손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또한 단기해외봉사단은 현지의 정치 문화 및 치안 사정을 깊이 고려할 뿐 아니라 정부와 선교단체의 여행 방침을 지켜야 한다. 이번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납치 사건의 원인 중의 하나는 모 선교 단체가 의료봉사팀에게 위험한 루트를 택하라고 잘못된 충고를 제공한 것이었다. 다섯째, 복음 전파의 사역은 물론 사랑의 봉사 사역을 위해서 반 기독교 정서가 팽배한 지역에서는 대형집회나 행진을 삼가 하여야 할 것이다. 뉴욕타임스(7월 21일)는 한국인이 피랍대상이 된 원인들 중의 하나는 작년 8월 1천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평화행진’을 했던 사실이었다고 꼬집었다. 여섯째, 지구촌을 효과적으로 섬기며 봉사하기 위해서 한국교회는 범 교계적으로 ‘위기관리종합기구’와 함께 ‘세계봉사연합기구’를 구성하여 가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곱째, 그렇다고 기독교의 사랑과 복음 사역을 안전위주로만 치닫는 것도 문제이다. 기독교는 사랑과 복음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수고와 불편과 고난과 박해와 죽음을 회피하는 종교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진정한 사랑과 복음 사역의 수행은 고난과 수고와 희생과 박해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악의 세력에 대한 분노와 정죄와 타도를 위한 ‘십자군 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죽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악의 세력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품고 녹여서 거룩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십자가 사랑’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죽는 죽음을 의미한다. 2007년 7월 27일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강승삼 목사, 김명혁 목사, 박종화 목사, 손인웅 목사, 이정익 목사, 이종복 감독, 전호진 목사”

저는 또한 2007년 8월 8일 개혁신보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는데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때를 당했다. 바로 어제 아침 내가 평소에 가까이 지내면서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동료 목회자들 다섯 사람들이 내 방에 함께 모여서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적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아갈 것인지를 진솔하게 의논했다. 한민족 복지대단이나 샘물교회를 비난하는 여론에 대해서 우리는 이번에 봉사단원들을 파송한 두 단체의 순수한 사랑과 봉사 정신을 지적하며 봉사단원들과 두 단체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한국교회의 우월적이고 경쟁적이고 과시적이고 일방적인 선교 방식을 겸허하고 협력적이고 조용하고 쌍방적인 방식으로 전환하여야 한다는데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인질 사태에 대해서 우리 목회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누군가가 아프간의 가즈니 지역으로 달려가서 인질들의 고통에 참여하며 탈레반들에게 인간적인 호소를 하여야 한다는데 의견의 100%가 아닌 200%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인질로 잡히는 것도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겠다고 했다. 사실 나는 이런 생각을 지난 한 주간 내내 지니고 있었다. 모두들 비장한 마음을 지니고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비장한 기도를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일의 가능성을 사방 팔방으로 타진하는데 우리 모두는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다 보냈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그 가능성이 밝지는 않았다. 나는 어제 저녁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들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나 하는 서글픈 생각에 잠겼다. 나는 지난 주일 설교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아프간 문제로 거의 모든 시간과 생각과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량한 인질들이 극도의 고통과 두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장에 그리로 달려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싶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겸허한 자세를 지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처절한 회개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고 눈물과 희생의 제물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사이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들 인질을 살려주시옵소서. 저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한국교회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아프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미국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그럴 때마다 저의 가슴과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도우시는 은혜가 우리의 젊은이들 21명과 처절한 아픔과 슬픔에 빠진 가족들과 한국교회와 아프간 사람들과 미국 사람들과 온 세계에 임하시기를 간구한다.” (2007년 8월 8일)

저는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나 교회나 단체들이 실수와 잘못을 범하지 않은 완전한 개인들도 아니었고 완전한 교회나 단체들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주님의 종들과 교회와 단체들은 언제나 실수와 잘못을 범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친 열심이 실수와 잘못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고쳐 나아가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실수와 잘못을 범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유익하게 됩니다. 오히려 실수도 잘못도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거스틴과 칼빈이 한 말을 너무너무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It is devilish invention to be cocksure about one’s perfection” “자기가 완전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마귀가 만들어 낸 생각이다.” 저는 그동안 인터콥 선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모슬렘 지역에 전하려는 열심이 극심해서 실수와 잘못을 범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경험은 유익합니다. 실수와 잘못의 경험도 유익합니다. 앞으로 인터콥 선교회가 복음에 대한 열심을 지니되 보다 겸손하고 보다 균형잡힌 자세를 지니므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귀하게 쓰여지는 선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지난 1월 24일 KWMA 정기총회 개회예배에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교회도 많고 신학도 많고 선교도 많은데, 완전한 교회도 없고 완전한 신학도 없고 완전한 선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와 신학과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죄인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와 한국신학과 한국선교의 공통적인 문제는 너무 세속화 되었고 너무 인간화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비지네스화 되었고 신학은 이론화 되었고 선교는 인간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선교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조동진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선교가 현지인들을 무시한 채 한국인끼리 모여 한국식 교회를 세우고 한국식 선교를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현지인이 원하는 복음을 전하지 않고 우리가 전하고 싶은 복음만 전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상황화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선교가 자기 중심적인 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참회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신학과 선교의 변화와 성숙을 바라며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을 바라보고 생각하면서 선교의 변화와 성숙을 추구해 보려고 합니다. 모든 변화와 성숙은 주님 바라봄과 주님 생각함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떠남’과 ‘찾아감’의 길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주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셨습니다. 베들레헴으로 애굽으로 나사렛으로 갈릴리로 사마리아로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떠남’과 ‘찾아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세상 끝으로 찾아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28:19).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행1:8). 주님께서 친히 걸으시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선교의 길은 ‘떠남’과 ‘찾아감’의 길이었습니다. 선교의 길은 고향과 고국을 포기하고 타향과 타국으로 그리고 땅끝으로 달려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경상도를 떠나고 전라도를 떠나고 평안도를 떠나고 대한민국을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고 땅끝으로 달려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됨’의 길 즉 ‘becoming’의 길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이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기와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시고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성육’ 즉 ‘Incar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미련한 일이고 약한 일이고 멸시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의 길은 ‘되는’ 길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변화와 존재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선교의 길은 백인이 백인 됨을 포기하고 흑인이 되는 길이고, 미국 사람이 미국 사람 됨을 포기하고 한국 사람이 되는 길이고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 됨을 포기하고 태국 사람이나 브라질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요와 건강을 포기하고 일부러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병든 환자가 되었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종류의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하늘 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 즉 ‘dwelling together’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서 사셨지만 하늘 영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과 함께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선교의 길은 ‘함께 사는’ 길입니다. 독일의 선교신학자 준더마이어(Sundermeier) 박사는 선교는 ‘콘비벤츠’(konvivenz)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식사도 함께 하고 대화도 함께 하고 잠도 함께 자는 삶입니다. 이것은 관계의 변화와 관계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상황화를 의미합니다. 선교의 길은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쳐처럼 백인이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사는 길이고, 언더우드 4대 손들처럼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이고, 신홍식 선교사 강성철 선교사 강성일 선교사처럼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들이나 브라질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로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신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주시면서 긍휼과 사랑으로 섬기셨고, 열병환자의 손과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주시면서 긍휼과 사랑으로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겸손으로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마5:44). 주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폈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선교의 길은 모두를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신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그런 선교의 길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걸어가셨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2005년 12월 16일 1,400만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강변교회가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지역의 모슬렘 지도자들과 군인들과 경찰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4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아프간에 두 번 방문했지만 공식적으로 설교나 전도나 기도나 강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준공식 행사를 하는 중에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명한 한국말 발음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너무너무 놀랐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 때 그런 노래를 하면 테러를 당할 것입니다. 선교의 길은 반드시 설교나 전도나 강의를 하는 길이 아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선교의 길은 대속의 제물이 되신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에 내어 보내시면서 제자들도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21:19). 베드로가 그 길을 걸었고 사도 바울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너희 믿음의 제물 위에 내가 나를 관제(피 제물)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니”(빌2:17). 사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1885년 조선땅에 선교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섯째로 주님께서 분부하신 선교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땅끝으로 달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여섯째 항목은 지난번 KWMA 정기총회 개회예배에서 한 설교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에 분부하신 선교 대 위임령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분부는 아니었습니다. 땅끝으로 가라는 분부였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라는 분부였고 사도 요한을 통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라는 분부였습니다. 저는 예루살렘도 이스라엘도 모두 선교의 대상은 되지만 선교의 완성이 지상의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예루살렘에서 새 예루살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백 투 제루살렘!”을 부르짖는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활의 주님께서 분부하신 선교의 길과 방향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분부도 이스라엘을 회복하라는 분부도 없었습니다. 땅끝으로 가라는 분부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13:47).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역사의 종점과 구원의 종점과 선교의 종점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지상의 교회도 귀하고 귀하지만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항상 하늘을 바라보고 회개하면서 그리고 충성하면서 겸손하고 사랑하고 희생하면서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대단한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선배들은 그 모든 것이 ‘헛된 것들’이라고 고백하면서 지극히 겸손하게 지극히 진실하게 지극히 따뜻하게 지극히 충성스럽게 제물 되는 삶을 살았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참회하면서 선교의 변화와 성숙을 바라고 사모하고 추구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선교의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떠남’과 ‘찾아감’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됨’의 길 즉 ‘becoming’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하늘 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 즉 ‘dwelling together’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죄인들과 함께 살면서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신 ‘섬김’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선교의 길은 대속의 제물이 되신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분부하신 선교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땅끝으로 달려가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들도 주님께서 걸어가신 선교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주님께서 지니셨던 선교의 흔적을 우리 몸에 지니게 하시고 주님께서 죽으셨던 선교적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달려간 땅끝이 로마였다면 오늘 우리들이 달려가야 할 땅끝은 북한이나 모슬렘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북한 선교와 모슬렘선교가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또는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혹 저를 제물로 드릴 수는 없습니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살 수가 있고 선교적인 죽음도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국교회와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선교적인 죽음까지 죽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