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이하 한복협)는 지난 11일(금) 오전 7시 강변교회(담임 허태성)에서 "주여!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주시옵소서!”란 주제로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가졌다. 다음은 조동진 박사(한복협 통일환경연구원장, 조동진선교학연구소, 사진)가 발표한 '화해와 평화선교를 통한 통일환경조성' 전문이다.

jdj.jpg북한 당국은 지난 해 이른 봄부터 가을 추수기까지 줄곧 남한 당국에 식량과 비료, 그리고 의료품 지원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개성과 금강산에서의 남북대회를 통해 화해와 평화의 제스처를 계속해 왔다.

이명박 정부는 남아도는 남쪽의 쌀을 비축할 길이 없어 차라리 버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일부 소리와 북한의 기아 민중을 위해 쌀을 보내야 한다는 양식 있는 많은 지도자들의 소리 사이에서 엉거주춤 북한 정권의 붕괴만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초대를 받았던 개신교 목사 중 한 사람이 북한정권이 얼마나 갈 것 같은지를 물었고,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길어야 7년 이내에 북한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는 내용의 대답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1978년부터 30년 가까이 ‘북미관계 정상화’와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한 화해선교(Reconciliation Mission)와 평화선교(Peace Mission)에 앞장서 왔던 사람으로서 북한 정권의 붕괴가 가져올 결과를 크게 두려워한다. 1953년 휴전협정과 그 후 전개된 북, 중, 러, 그리고 한,미, 일 간의 힘겨루기를 미루어 볼 때, 나는  북한 김정일 정권의 붕괴가 곧 통일로 이루어진다는 속단의 무지와 오판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한다.
 
1950년 10월, 국군은 압록강변 초산까지 진군하였고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통화까지 후퇴하면서 북한 정권은 다 무너진 것 같았다. 우리나라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에 가서 북한 군중 앞에서 통일 완성을 자랑하는 민중대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 후 열흘이 못 되어 50만이 넘는 중국 인민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 평양과 해주를 지난 중공군은 12월 말에 38선을 넘어 남한의 개성을 점령했다. 이승만 정권은 새해 들어 넷째 날인 1월 4일 서울을 중곤군에게 내어주고 부산까지 도망치는 부끄러운 신세가 되었다. 전쟁은 1953년 7월까지 계속되었고 개성을 빼앗긴 미군은 남한 땅인 판문점에서 김일성과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미군 사령관이 서명한 휴전협정을 체결했지만 한국군은 휴정협정 주체가 아니었다.

북한 정권 붕괴가 곧 통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는 이명박 정권의 국제감각은 이승만이 평양에서 통일을 축하하다 중공군에 쫓겨 부산까지 도망갔던 역사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서 또 다시 그런 사태가 오지 않나 싶어 소름이 끼친다. 중국은 휴전협정 주체국이어서 언제든지 휴전선 앞까지 자국 군대를 내려 보내는데 아무 국제법적 거리낌이 없다.
 
NLL 북군사한계선을 마주하고 있는 연평도를 비롯한 백령도 등 서해의 다섯 개 섬들을 생각해 보자. 이명박 정권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평화정책이 이루어 놓은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남북공동선언을 무시하는 대북 강경정책으로 날마다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던 연평도에 북한의 포탄이 날아와 연평도가 불타고 군인과 민간인 네 사람이 죽고 적지 않은 부상자를 내자, 이명박 정권은 또 다시 강경 대응과 확전을 선동하는 세력들이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주먹 밖에 없는 북한은 체면을 구기면서까지 남쪽에 구걸을 해왔는데 돌아온 것은 거부의 거친 말 밖에 없자 몇 차례 욕지거리를 하다가 끝내는 주먹을 휘두른 것이 연평도 포격이다.  그것 외에 북한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우리 남쪽에는 이러한 무모한 도전을 억제할 수 있는 많은 평화와 화해의 인센티브가 있었다.

나는 1988년 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박관오 박사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이 나를 초청한 이유는 1979년부터 미국 윌리암케리대학교 교수로 고려연구소를 설립하고 10년에 가깝도록 김일성종합대학을 통하여 이천 권이 넘는 북한 도서를 구입한 데 대한 특별 초청이었다.

내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1989년 1월 중순이었고, 그들은 나를 고려호텔에 머물도록 했다. 내가 도착한 후 하루 이틀 후 안내원은 나에게 지금 남한 기업인 정주영 회장이 평양에 와 있으며 백화원초대소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주며, 정주영 회장이 오늘 낮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 TV로 중계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재미동포 학자가 미국 대학교를 위해 북한 도서 이천 권만 구입해도 감동을 하며 북한 땅에 초대하는 그러한 나라이다. 나는 윤기복 국제담당비서에게 “이 지구상에 단 하나의 교회도 없는 곳은 북한 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나의 이런 충고를 받아들여 그 해 1989년 평양에 봉수교회를 건축하고 1991년에는 김일성이 어린 시절 부모들과 함께 다녔던 칠골교회를 재건축했다. 뿐만 아니라 1990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가 설치되었다.
 
나는 또한 나를 초청한 답례로 윌리암케리대학교 총장 이름으로 여덟 명의 북한 고위층 지도자들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북한 대표단 한시해 전 UN주재 대사를 비롯한 정부 고위관리와 기독교도연맹과 사회과학연구원 학자들은 미 국무성의 입국허가를 받아 1991년 6월 초 뉴욕에 도착했다. 이들은 나의 안내로 조지아 주 플레인즈에 있는 지미 카터 대통령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의 평양 초청을 전달했다. 이들은 이어서 빌리그래함전도회 본부를 찾아가 빌리 그래함 박사를 평양으로 초청했다. 이들은 한 달 동안 나의 안내로 국무성과 국방성, 그리고 의회를 방문하고 돌아갔다.

1992년 북한노동당은 그들이 발행한 『조선말사전』에 종교 관련 항목을 대대적으로 수정 발표했다. 여기에 1981년도 판과 1992년도 판의 세 가지 항목을 예로 제시한다.

교회

반동 통치 계급이 정치적 비호 밑에 근로자들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예수교의 교리와 사상을 선전하여 퍼뜨리는 거점 (1981년도 판)

기독교에서 여러가지 종교적 의식을 하고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선전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 례배당 (1992년도 판)

개신교

16세기에 상층 부르죠아지들의 리익을 옹호하기 위한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온 교파. 자본가들의 착취를 정당화하며 남의 나라에 대한 사상 문화적 침투에 적극 복무하고 있다 (1981년도 판)

새로운 교회라는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이르는 말. 16세기 종교개혁 때 새로운 교리와 계율을 주장하면서 로마 카톨릭교에서 갈라져 나온 기독교의 교파이다 (1992년도 판)

장로

예수교의 한 갈래인 장로교의 직책의 하나 또는 그 직책에 있는 사람. 착취 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복무한다 (1981년도 판)

기독교의 한 갈래인 장로교에서 목사와 집사 사이의 종교 직책의 하나 또는   그 직책에 있는 사람 (1992년도 판)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서 1995년 12월에 간행된 『조선대백과서전』에는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을 보고 나는 크게 놀랐다.
 
교회: 같은 종교를 믿는 신자들의 집단 도는 집합장소. 고대 헤브라이어로 “소집한다”는 뜻을 가진다. 유태교에서는 ‘신’에 의해 선발된 사람들의 ‘집회’를 교회라고 하였다. 영어에서 교회라는 말은 “주(신)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에서 교회는 예수가 죽은 다음 그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고 집단을 무어 활동한 원시기독교의 교단에서 발단하였다. 이 시기부터 교회에서는 례배, 세례, 성찬과 같은 례식이 진행되었다. 원시기독교 교단에는 사도, 예언자, 교사, 장로, 감독, 집사 등의 직무가 있었다. 초기기독교 교회에서는 기독교의 발생지인 예루살렘교회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392년에 로마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된 다음에는 점차 로마교회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시에 로마의 대사교가 기독교 교회의 최고권위자로, 사도 뻬뜨로의 지위를 계승하는 법왕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교회의 위계제가 확립되게 되었다. 교회의 력사에서 가장 큰 사변으로 되는 것은 11세기에 있은 로마카톨릭교와 동방정교회의 분렬 그리고 16세기에 있은 종교개혁운동이다.

나는 북한 노동당 출판국이 윌리암케리대학에 2,000여 권의 도서를 기증하여 준데 대한 답례로 남한의 기독교 도서 2,000여권을 김일성종합대학에 기증할 테니 승인해 달라고 했다. 북한은 나의 이러한 제의를 두 말 없이 받아들였다. 나는 1992년 3월 남한의 기독교 서적 2,514권을 윌리암케리대학교 고려연구소 이름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 보냈고 김일성 주석은 이 도서들에 일일이 자신의 도장을 찍어 승인했다. 그 도장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께서 배려하신 도서’라고 써 있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도서관에 이 도서들을 위한 특별서가를 마련하여 비치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강연회를 열어 150여 명의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을 모아 나에게 ‘민족과 기독교’라는 강연을 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나의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평화선교와 화해선교는 1999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졌다.

정주영 회장은 평양을 방문한 후 얼마 안 되어 소 일천 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해 휴전선을 넘어 평양을 다시 찾는다. 북한 정권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금강산 바로 앞인 그의 고향 강원도 통천을 경제특별지역으로 지정하고 금강산 관광사업과 칠보산과 백두산 관광사업권을 정주영 회장에게 주기로 약속한다. 정주영은 김일성에게 신의주와 해주와 개성을 경제자유특구로 지정할 것을 제안했고, 김일성은 그 제안에 동의할 뿐 아니라 개성 관광사업권을 그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북한 정권은 소 일천 마리에 이렇게 감동받는 가난한 나라이다. 북한이 내어줄 수 있는 것은 땅 덩어리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금강산도, 개성도,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산과 도시를 남한 기업인에게 내어줄 정도로 남쪽의 기업인들과 민족간의 경제협력을 갈구하는 나라이다.

‘평화’와 ‘화해’를 위한 이러한 움직임은 나로 하여금 기독교의 대북활동이 ‘평화선교’와 ‘화해선교’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더하게 했다.

예수께서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2) 하셨을 뿐만 아니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고 하신다. 또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도 하신다.

우리는 오늘날 남북갈등과 국제적으로 얼어붙은 통일환경을 어떻게 하면 봄날에 녹아 사라지는 얼음처럼 녹여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 왔는데, 통일 환경을 조성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와 그 정책을 계승하여 통일 독일을 완성한 헬무트 콜 수상의 조국 통일 기록을 담은 책 『독일 통일의 기적을 만든 결정적 순간들: 329일』이라는 책을 읽고 우리의 남북통일도 이러한 길로 가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그것으로 결코 갈사라진 동서 독일의 통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은 독일 통일을 반대하는 프랑스, 영국, 그리고 독일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과 미국을 어떻게 설득하여 통일환경을 조성하였는가를 콜 수상의 수석 외교안보자문관이었던 호르스트 텔칙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콜 수상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짐으로 말미암은 동독의 붕괴를 막기에 전력한다. 그리고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강대 4국과의 연속적인 대화와 협의로 완전한 통일환경을 조성한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붕괴 직전의 동독 정부를 329일 동안 계속 지탱시킴으로써 마침내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한 해가 지난 1990년 10월 2일 소련의 고르바초프 수상과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 미국의 부시 대통령의 환호를 받으면서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은 동독 수상 로타르 드메지에르와 <독일통일조약>에 서명한다.

빌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을 이어받은 헬무트 콜 수상의 줄기찬 통일환경 조성 노력으로 주변 4개 강대국과 모든 유럽 국가 정상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독일통일조약> 서명을 마치고 동독 수상의 손을 맞잡고 창가로 가서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화해와 평화선교의 노력으로 완전한 통일환경을 조성하여 남과 북의 정상들이 모든 나라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이루어지는 평화통일조약에 서명할 날을 기다린다.

조동진 박사(한복협 통일환경연구원장, 조동진선교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