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초 한국세계선교협의회(대표회장 강승삼, 이하 KWMA)와 한인세계선교사회(KWMF) 주최로 열린 제5차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가 개최 됐습니다. 본지는 이번 대회 분야별 전략회의에서 논의된 발표들을 발표자들의 동의를 얻어 계속해서 게재합니다. 다음은 박영환 교수(서울신대, 한국선교신학회 회장)가 발표한 "북한선교와 통일에서 교회의 역할"발표 전문입니다. (NCOWE V 관련기사)
I. 들어가는 글
교회는 험난한 역사 속에서 종종 새로운 시대적 대안과 전망을 가지고 세계와 사회를 견인해야 할 사명이 있다. 남과 북의 관계에서 교회는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사역에 역점을 두어야 하지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북한에 전해야하는 것이다. 즉 교회는 역사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며, 증거하며, 고백하는 삶의 실천적 과제를 안고 있다. 동시에 교회는 생물체와 같아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선교의 사명을 이루어왔다.
지금 남과 북은 극한 대치 국면으로 치닫고 있어 걱정이 앞서지만, 교회의 지속적인 대북 지원 사업은 남과 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남북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본 연구를 통해 교회가 남북관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아가 어떤 사역을 계속해 나갈 것인지를 전망해 보고자 한다. 전개과정에서 통일과 정부관계는 절대적 남북변수다. 정부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면 남북교회관계는 불가능할 정도로 영향을 미친다.
남북관계에서 교회의 역할은 북한선교와 직결된다. 물론 북한선교는 통일운동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본 논문에서 북한선교사역으로 교회의 역할과 기능이 정부의 통일정책과 국제관계에서 어떤 종속적이며 혹은 연합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지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위치를 정리하고, 북한선교와 교회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남북문제는 이미 당사자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핵문제를 통해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과제의 중심에 양 정부가 존재한다. 교회역할은 남북관계에서 특히 남한정부의 영향 하에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남북의 긴장관계와 대북지원 사업도 정부정책에 따라야 하는 것을 이미 체험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정부와 교회간의 갈등과 긴장은 있지만, 교회는 선교의 거점으로, 통일사역의 견인차로 스스로 예언자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사실 남북문제는 정부주도하에서 지금까지 다루어져왔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 공식적 자리에 남북문제를 들고 나왔다. 남한교회의 이러한 시각을 준 것이 독일교회다. 이어서 세계교회 협의회, 일본 교회협의회, 나아가 미국교회의 한인목사들이 북한을 방문함에 따라 북한교회와 공개적인 만남이 이루어 졌다.
본 논문은 남북관계에서 교회역할을 접근적 관점, 즉 선교적 관점, 역사적 관점, 그리고 통일과 민족공동체의 관계적 관점으로 구성된다.
1. 북한선교와 교회-접근적 관점
1) 남한교회와 북한선교-보냄의 못자리-출발거점으로 역할
2) 북한교회와 북한선교-성장의 원동력-성령의 능력으로 기능
3) 세계교회와 북한선교-미래의 거점-통일을 창조하는 전망대
2. 통일과 교회-관계적 관점
1) 통일의 준비로서 교회-교회연합관계
2) 통일의 과정으로 교회-정부관계
3) 통일의 전망으로서 교회-국제관계
본 연구는 교회가 남북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선교역사와 북한선교에서 찾아볼 것이며, 통일의 관계적 관점에서 교회의 미래역할이 통일의 거점으로, 즉 한 민족 공동체의 골격임을 밝히는데 있다. 특히 교회역할은 남북한 교회와 남한교회의 연합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 혹은 세계교회단체들과 구조적인 연계성을 총체적으로 만들어 가야 되는 관계성을 논증할 때 교회는 북한선교와 통일의 절대적 강점으로 역할과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II. 북한선교와 통일에서 교회의 자리매김은 ?
사도행전에서 교회는 선교의 출발점으로, 선교의 못자리로, 선교의 종착역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최종 선교사역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선교현장은 교회를 통해 공동체의 못자리를 만들고, 교회를 통해 성장의 원동력인 공동체의 조직과 구조를 만들고, 미래에 교회를 통해 세계를 향한 하나의 거대한 신앙공동체를 창조했다. 이것이 세계선교역사의 간략한 줄거리다. 이러한 선교역사가 남북한관계에서 중요한 미래교회사역의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1884년 한반도에 형성된 하나의 교회는 해방과 더불어 남한교회와 북한교회로 갈라섰다. 북한교회는 초기에 북한정부와 대립과 투쟁으로 시작하다가, 1950년-1953년 한국전쟁으로 북한교회 지도자 410-440명 중 약 420명이 남한교회로 월남했다. 휴전이후 남북은 다른 정치적 배경을 가진 다른 체제로 존재해 왔다. 이때부터 교회는 남한교회와 북한교회로 분류된다. 남북관계에 따라 각각의 교회는 각각의 정부와 구조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발전했다. 정부정책과 대립, 갈등 혹은 협력하는 것에 따라 남북한 교회의 기능과 역할이 변했다.
북한교회의 공개적 등장도 북한정부와의 갈등과 대립, 분열과 쇠퇴기를 거치다가, 1972년 남북공동성명으로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6년 스위스 글리온에서 1차적인 남북교회간의 만남, 1990년 후반 북한 식량난과 2000년 인권문제 나아가 통일과 핵문제 등으로 북한교회는 북한정책실현의 조직체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남한교회는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을 넘어서는 예언자적 기능과 역할로, 1988년 선언과 1995년 이후 대북지원 사업과 세계교회 협의회를 통한 국제관계 조성, 나아가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을 주도해가는 입장에서 정부와 갈등 혹은 비판과 대립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한교회는 북한선교를 교회재건과 정부를 지원해야 된다는 일부 다른 인식을 가진 교회들과 내부 갈등구조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에서 남한교회는 통일과 북한선교를 취급해야하는 양면성-정치와 선교, 나아가 국제공조와 핵문제로 세계교회협의회 협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리에까지 담당해야 한다. 이제 북한선교에서 교회는 선교 역사적 접근을 통해 양측의 못자리로, 한민족 공동체를 만드는 성장의 원동력으로 나아가 통일로 나아가는 구조적 거점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 장은 1. 선교역사의 교회가 북한선교에서 접근점으로, 2. 통일과 남북정부관계적 관점으로 교회기능과 정치적 상황에서 교회역할을 북한선교입장에서 정리 한다.
II-1. 북한선교와 교회-접근적 관점
남한교회와 북한선교의 첫 만남은 1974년 충현교회 씨앗 선교회-기독교북한선교회로 출발되었다. 그 이전에는 1950년 이후 북한교회 재건이라는 관점에서 영락교회의 월남성도들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NCC는 북한선교접근보다는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1980년대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대북지원 사업과 2000년대 평화 통일 운동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여기에 보수진영의 대표격인 CCK는 평화통일론을 공산 이데올로기적 접근으로 이해하며, 북한사회내의 교회를 인정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전개하면서 1997년에 북한교회의 실체를 인정하며 대북지원의 접촉창구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CK에 속하지 않은 보수진영의 남한교회는 NCCK와 같은 방향을 가지되 CCK의 북한지하교회재건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합하고 있다. 이러한 세 유형의 북한선교에 관한 남한교회 협의회간의 갈등과 대립은 남한교회가 북한선교를 바라보는 이해의 한계다. 북한선교는 교회중심의 선교역량, 즉 선교라는 접근에서 시도되어야하며, 간접선교사역의 최종 목표도 교회공동체 설립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두어야 한다. 이제 선교역사에서 교회의 근본적인 역할은 북한선교에서 다음과 같은 역할과 기능으로 나타날 것이다.
1. 교회는 북한선교에서 보냄의 못자리-출발거점으로 역할을 한다.
세계 선교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가 열정을 다해 기도할 때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출발 되었다. 그 공동체는 초대교회로 발전하였다. 그 곳은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복시키며, 그 말씀에 따라 예수제자로 삶을 살아가도록 교육과 훈련을 시키는 곳이다. 또한 이들이 세상에 보내져, 전 세계의 삶들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런 사역의 중앙에는 교회가 모판이 되고, 거점이 되고, 원동력이 되어 보다 큰 공동체-민족을 연합시키고, 국가와 국가를 하나 되게 하는 미래 창조의 공동체의 전망을 보여 줄 것 이다. 이것이 교회역할과 기능이 북한선교를 통해 통일을 만들어 내는 내용으로 설명 된다.
교회는 보냄의 공동체로 조직과 구성 그리고 전략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1) 못자리의 역할
12제자 공동체-마가의 다락방(사도행전2장)-초대교회(사도행전3장-12장)-고넬료 방문(사도행전10장)-안디옥교회(사도행전13장)-4차 선교여행(사도행전13장-28장)로 이루어졌다.
사도행전의 사도바울은 어느 지역을 가든지 공동체를 세우며, 그 곳에서 6개월 혹은 1-2년을 지내고 떠날 때는 공동체에 지도자를 세웠다. 바울은 공동체-회당 혹은 교회, 기도처에 가정 교회를 세우며, 지속적으로 그곳을 거점화하여 전도와 방문, 교육과 심방으로 선교현지교회를 성장, 또 다른 개척교회를 섬기다가 로마에서 순교 당했다. 바울은 18개월을 고린도의 디도 유스도 집에 머물면서 회당장 그리스보 와 함께 못자리 교회로, 세계선교역사의 거점으로, 사회, 정치, 경제의 중심지에 고린도교회, 빌립보교회, 에베소교회 등을 세워 거점으로, 출발점으로 나아가 근거지로 못자리를 넓혀갔다.
(2) 조직구성의 역할
안디옥교회의 선교는 조직을 통한 선교의 첫 출발이다. 로마가톨릭은 철저하게 중앙 집권적 조직을 가지고 선교했다. 영국 중부에서 베네딕토 수도원의 컨터베리 어거스틴 수도사를 중심으로 한 40명의 선교사역자들과 독립선교를 하던 영국 북부 켈트 수도원의 선교사들이 선교지를 사이에 두고 대결하였다. 여기서 조직적인 로마교황청의 지원을 받은 베네딕토 수도사들이 승리하여, 영국 전체가 그들의 선교지로 남게 되고, 켈트 수도원 선교사들은 스칸디나비아로 이동했다.
조직화된 교회 조직은 또 다른 선교현장에서의 조직체인 교회로 남게 되고, 그 조직구성은 선교현장의 거점으로 확보되고, 확대되어지는 것을 도날드 멕가브란은 교회성장을 통한 선교정책과 전략을 제시했다.
(3) 전략의 거점
개신교 선교는 출발거점으로 교회를 세운다. 덴마크 할레 선교회(Daenisch-Hallesche Mission, 1705)의 원리 4번째 “가능한 인도사람에 의한 인도교회를 세운다”와 모라비안 선교의 출발자인 진젠도르프(Zienzendorf)는 교회를 거점으로 하는 회심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선교의 목표를 두었다. 그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시기를 1단계-집단회심보다 개인회심을, 2단계는 교회의 승리-기독교화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거점으로 선교교회를 인식했다. 그러나 이것을 정책적으로 현장에 심은 선교사는 근대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케리-교회공동체를 통한 선교(1792년)였다. 윌리암 케리가 비록 덴마크 할레 선교회보다 90여년 늦게 개신교선교사로 출발하지만, 그의 교회설립정책을 근대선교의 시발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교에서 교회는 현장의 못자리로, 조직과 거점의 전략적 지점으로 중요함을 입증했다.
정리하면 남한교회의 북한선교도 교회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1995년 이후 남한교회는 진보, 보수를 떠나 북한지원 사업에 몰입한다. 방법으로 NCCK는 북한교회를 세우는 방향에서 북한을 돕는 것이 통일을 준비하는 것으로 접근했고, 보수진영은 북한지원 사업을 통한 북한 내 교회를 세우려는 복음전파의 직접 사역에 계획과 도전을 했다. 가시적인 북한교회설립은 보이지 않았지만, 교회의 역할과 기능으로 북한선교를 접근한 것은 역사적으로 정도이다. 북한 내 보이는 교회조직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중심으로 한 남한교회의 북한선교는 세계선교 역사에서도 입증된 교회조직, 구성 그리고 전략적 차원에서 교회중심의 선교정책과 전략 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교회는 북한선교의 성장 원동력이며, 성령의 능력 이다.
최초의 선교는 마가의 다락방이었던 초대교회에 불같은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와 함께한 제자들이 밖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선교의 출발점은 교회에서의 성령사역이다. 사도행전 2장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전념하며,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보내주신다던 성령을 기다리던 제자들에게, 특히 베드로에게 임한 강력한 성령의 임재는 그를 다락방 밖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었고, 예수의 말씀을 강력히 선포하게 만들었으며, 죽음을 이겨내게 했다. 이들은 교회에서 흩어져 나와 만든 것이 교회다. 그 예가 안디옥교회로, 평신도가 세웠다. 또한 바울의 4차 선교여행의 중심과제가 지역거점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로마제국을 넘어서 전 세계로, 뜨거운 유황불과 맹수들에게 온 몸이 뜯겨 죽어가면서도 다시 일어나 복음을 외치는 선교의 능력이 교회로 집결되었다. 동시에 성령은 선교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성령이 선교사를 선출하며, 소명 받은 자들로 공동체를 조직하게 하고, 공동체를 구성하는-용기, 담력, 순교와 제자로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또한 성령은 선교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확신, 회개, 영접, 믿음을 소유하여 선교사역을 원동력으로 돕고 있으며, 심지어 성령이 선교의 방향제시를 했다.
북한선교의 원동력도 성령이다. 성령의 역사는 불가능하게 보였던 북한에 봉수교회(1988), 칠골교회(1992)를 세웠고, 1989년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의 북한 내 활동은 지금까지 기독교에 비판적 태도를 보였던 북한정부를 180도 바꿔 놓았다. 기독교에 관해 1992년 조선말 대사전에서 “비과학적, 반동적, 봉건적, 제국주의적, 허황한”표현이 사라졌다. 이 표현은 그대로 조선대백과 사전에도 실렸다. 이러한 북한의 반 기독교적 내용삭제가 1989년 임수경, 문익환 목사 그리고 문규현 신부의 북한 내 활동, 바로 성령의 능력이 만들어낸 결과다. 성령이 로마제국을 변화시켜, 313년 기독교 공인과 389년 로마국교까지 만들어냈다. 남한교회에서 성령의 능력은 대북지원 사업에도 총력전으로 드러났다. 1995년 이후 대북지원 사업은 1995년부터 2008년까지 민간 및 정부차원에서 무상지원 규모는 2조2천50억 원이며, 이중에서 남한교회의 지원 분야는 직접지원과 성도로 구성된 민간단체들의 지원현황을 통합해 보면 약 90%를 점유했다. 교리와 교파 그리고 교권으로 인한 갈등과 분열이라는 교계 분위기에서 대북지원의 기독교 지원액이 성령의 역사와 감동이 없이 가능하였겠는가?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4가지로 선교현장에 나타날 수 있다.
(1) 성령이 북한선교사역을 지속시킨다- 선교의 궁극적 목적을 가지고 지속성을 유지함- 예수의 제자화- 선교의 직접사역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끈기와 인내로 접근하려는 신앙적 성향의 결과
(2) 성령이 북한선교를 위해 기독교 조직을 공동체로 구성시켰다- 목회자 중심에서 성도들을 통한 기독교성향의 단체들 조직-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월남한 성도들로 구성된 총체적 지원 사역으로 넓혀져 갔다.
(3) 성령이 북한의 다양한 조직을 통해 총체적으로 참여영역을 확대시켰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심에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민족화해위원회, 민족경제련합회, 농업과학원, 보건성 등, 다변화로 전문적인 기독교 성도들의 참여영역을 총체적 확장으로 하는 개성공업지구사업자, 금강산, 무역, 사업 등에서 나타났다. 기업체에서도 기독교인들의 활동영역이 증가하여 나타나게 되었는데 지역교회와 신우회 참여 등이다.
(4) 성령이 남한정부와 교계를 묵시적으로 연합시켰다-남한교회는 남한정부의 북한정부관계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또한 정부의 대북 지원에서 기독교와 남한교회의 협력은 인력과 재정지원에서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근거로는 남한교회의 성도들이 남한정부를 대표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 북한정부 관계자들을 만났다. 남한교회가 비공식적으로 북한에 기독교인입장을 전달하는 결과가 되었다. 전직 대부분의 통일부장관들이 기독교인들로, 구교와 신교의 구분이 약한 북한에서는 남한교회로 동일하게 느꼈을 것이다. 방북 중 북한관계자가 국회에 기독교인이 몇 명이며, 몇 %며, 얼마정도로 그 역할과 기능, 정당별 현황 등을 묻는 것을 볼 때, 남한 기독교의 공신력을 신뢰하며 인정하고 있다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북한 방문기간 중에 느꼈다.
그러므로 성령은 북한선교를 위해 남한교회와 성도, 북한 정부기관들과 남한정부 관계자들과 연합하고, 협력하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시며, 여기까지 남북관계를 이루어내는데 중요한 자리의 윤활유와 같은 핵심능력이 되는 요소로 확인된다.
3. 교회는 북한선교의 미래 거점이며, 통일을 창조하는 전망대다.
교회는 소명을 통한 선교사를 찾아내고, 선교사를 훈련시키는 장소이며, 선교동원의 모체가 된다. 사도행전 13장 이후 바울은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거점으로 그리고 교회로 돌아오는 선교모델을 제시했다.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 1761-1834)가 인도에 개척한 교회가 지금도 현지교회의 모교회로 자리를 잡고 영국 선교단체와 협력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을 도날드 엔더슨 맥가브란(Donald Anderson McGavran 1871-1969)은 교회 성장학으로 표현했다. 그는 인도선교현장의 교회가 성장되게 하는 것이 선교정책과 전략으로 전망했고, 그것은 선교의 창조적 미래전망으로 학계에 발표했다.,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지의 거점으로, 근원지로, 전략지로, 미래사역의 발판이다. 그 바탕의 거점원리는 중간기 선교시 회당중심의 사역으로 유대인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중요한 원리다.
사도바울도 회당을 중심으로 한 거점선교를 펼쳤다. 회당을 통해 선교지의 정보교환과 필요한 동역자를 찾아낸다. 이광순 교수는 교회를 거점으로 하는 선교정책-징검다리선교를 제시했다. 바로 선교현장의 한인교회를 통해 징검다리 식으로 선교현장을 넓혀간다는 것이다. 지금 선교지의 한인교회 목회자를 가리켜 선교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지에서 미래사역의 거점이며, 창조적 선교사역을 평가하며, 전망하는 방향타다.
그렇다면 북한선교의 거점으로 북한교회가 있어야 한다. 북한교회는 교회라기보다 정치적, 통일선전용으로 운용되고 있으며, 통일전선부 소속이다. 북한교회는 사회주의체제에서 생성된 중국의 삼자교회와 같은 유형으로 볼 수는 없으나, 북한체제에서 생존한 교회로 보아야 한다. 1988년 봉수교회 초기 십자가가 나중에 세워졌고, 고기준 목사는 김일성 배지도 외부인이 볼 때 거북스러워함으로 예배 볼 때 달지 말자고 하였다. 처음에 성가대는 가운 없이 찬양을 하였다. 예배순서지도 간략하게 인쇄하다가, 컴퓨터를 사용하여 교회사진까지 넣어 만든다. 북한교회는 미국의 목회자들도 초정하여 관계를 가지며, 북미관계 협력을 요청했다. 김일성 주석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접대하는 모습을 북한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북한 TV에서 북한사람은 봉수교회에 비쳐진 문익환 목사의 설교와 북한사람들이 예배를 보는 모습을 어떤 감정으로 받아들였을까? 북한에서 교회와 기독교에 관해 공부하고 남한교회를 알고 있는 북한사람이 통일이후에, 아니 미래 남북한교회관계에 필요하다. 그들은 지금 북한교회에 일하는 40대 이상의 성도와 지도자들로 미래북한교회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에서 북한선교를 북한교회와의 관계성에서 풀어가야 한다.
만일 북한체제가 붕괴된다면 남한교회는 누구와 함께 선교와 통일교회를 논 할 수 있을까? 북한교회관계자들이다. 북한교회의 지역관계자들, 중앙관계자들이 될 것이다. 한기총에서는 북한지하교회를 북한교회재건의 중요한 거점으로 여기고 있다.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중심으로 북한교회관계성을 갖고 있다. 공통점은 남한교회가 북한교회를 지상이든 지하든 관계를 가지고 북한관련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관점은 조직적인 단체로 북한교회를 선택해야한다. 선교역사에서도 조직적으로 선교했던 교회와 지하교회의 대립에서, 조직적 교회가 승리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북한선교의 과거, 현재, 미래의 동역자이며, 통일이후 창조적인 미래교회사역을 만들어갈 전망대가 되어야 한다. 남한교회는 북한교회와 조직체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제쳐놓고 북한선교와 통일적 과제를 풀어가기 어렵다. 북한체제에서 북한선교를 정리할 수 없다면, 더 나아가 남북한교회의 미래를 조명하지 못한다. 조명대상과 조명할 영역이 모두 비기독교적 요소라면 북한선교를 논하기는 불가능하다. 교회는 북한선교의 못자리며, 원동력이며, 정책과 전략이다. 교회에 의한, 교회를 통한 교회를 위한 북한선교가 선교정책과 전략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비록 북한교회가 정치적 집단으로 이용되고, 선전용으로 사용되는 현실에서도, 미래 북한선교는 북한교회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 세계선교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II-2. 통일과 교회-관계적 관점
통일로 본 남북한 교회의 만남에 관한 연구논문들을 정리하면 가장 북한교회를 근접해 통일문제를 다루고 있는 김병로의 논문은 남북한교회의 입장에서 전개하였고, 이만열은 세계교회협의회 등을 중심으로 한 협의체 구성을 통한 법적 방법론을, 허문영은 대내외 정세로 본 통일준비인 평화운동으로, 모퉁이 돌 선교회의 유석렬은 북한을 남한의 가치체계 일한 비교를 하면서 북한도 당당한 역할 해야 함을 주장하며, 동시에 남한은 북한을 지혜롭고, 건강하게 상대하자, 속지말자라는 근대주의의 전형적인 입장이다. 북한과 남한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이 3가지 유형으로 정리된다. 본 장에 들어갈 중요한 주제는 관계중심으로 본 남북한교회와 통일정책 그리고 북한선교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통일의 준비조직체로서 남한교회-교회연합
북한선교는 통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북한복음화, 즉 민족복음화와 직결된다. 일부 북한선교를 통일의 기능적 요소로 보기도 하지만, 남한교회는 통일보다 북한선교에 의미를 더 둔다. 과거에는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진영의 “선 북한선교 후 통일론”과 NCCK을 중심으로 한 진보진영의 “통일론”으로 서로간의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나 남한교회들이 진, 보수의 차이를 넘어서서 NCCK의 사회운동 기반과 보수진영의 신앙의 열정과 재정지원으로 1993년 진, 보수연합 운동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나눔 운동” 발족 시켰다. 2007년에는 한기총 대표인 이용규 목사가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강영섭 위원장을 만나, 대북지원을 확인 했다. 한기총이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시작한 (1995년) 12년만의 일이다.
통일과 교회로 본 관계적 관점에서 교회연합은 우선적으로 3 가지 과제를 풀어야 한다.
(1) 남한교회의 공산주의 이해와 월남한 성도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상처 받은 성도들과 유가족 들이다. - 반공주의와 친미적 사고와 반미라는 의혹과 평가
(2) 남한기독교의 대표성 논쟁-NCCK와 한기총-북한선교인가? 통일인가? 하는 논쟁도 정리가 안 되었다.
(3) 개체적 통일안(개 교회주의, 개인주의, 교파주의, 이념주의, 방법개발주의 등)이 통합적 통일안보다 우위개념으로 북한 선교와 통일운동을 주도해 가고 있다. 그 결과 교파 혹은 개 교회중심의 선점적 북한자원사역과 독점적 운영형태는 남한교회의 갈등과 대립, 비난과 의혹 등으로 상대를 비난하기도 한다. 북한정부에 대한 남한의 북한지원단체 사역을 방해하거나, 가로챔 등으로 인한 극한 불신의 모습도 있다.
이것으로 남한교회연합은 통일을 어떻게 준비하며, 전망 할 수 있는가?
(1) 남한교회의 북한지원사역이 북한교회와 북한사회를 만나는 접경이며, 신뢰와 화해를 이끌어가는 초석이 되었다. 남한교회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역량을 모아 북한 지원 사역을 진행하되, 북한의 다른 기관보다 우선적으로 조선 그리스도교연맹을 중심으로 총력을 기울어야 한다. 조선 그리스도교연맹을 지원함으로 북한기독교와 교회의 입지를 상승 시켜줄 수 있다. 이것은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2) 남한교회는 남과 북이 만나는 최전선에 있기 때문에 통일의 준비운동조직체다. 그러므로 북한선교에 관한 적극적인 연구와 평가를 통해 남한기독교의 통일 정책과 방향성 연구가 절실하다. 북한선교로 대북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천해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남한교회와 북한교회사이의 통일과 북한선교에 관한 15년의 평가와 백서가 나와야 한다. 이일은 남한교회연합으로만 가능하다. 북한선교에 관한 연구과제는 목회중심적 사역에 익숙한 개교회가 풀기 어려운 일이다. 연구대상과 연구방법 그리고 연구유형들은 수없이 많다. 특히 새터민경우는 북한선교를 남한에서 연구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실물 자료다. 개 교회마다 북한정보 혹은 전시형 북한관련, 부분적으로 북한 알리기에 그쳐있다. 새터민을 통한 북한에 이스라엘의 기부츠, 두레 공동체, 새마을 운동, 공동체훈련 등을 어떻게 형성 할 수 있을까? 등의 연구가 절실히 아쉽다.
(3) 남한교회연합은 세계교회의 협력을 얻어내는 절대 절명의 연결고리다. 통일은 남한과 북한교회만의 과제가 이미 아니다. 국제정세가 열쇠다. 6자회담을 보아서도 알 수 있지 않는가? 독일의 통일도 미국, 영국, 프랑스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했다. 세계정치와 경제의 조건등과 맞물려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주도로 와서 무조건 통합을 선언한다 해도 어렵다. 중국과 미국이 대만은 미국이, 북한은 중국이, 개성공단과 금강산은 남한이 그리고 독도는 일본이 나누어 가졌으면 하는 뜬소문도 있었다. 그럼 러시아는 무엇을 건질 것 인가?
그러므로 통일은 세계정치경제와 맞물려있기에 남한교회는 세계교회 협의회와 혹은 국제복음주의 협의회의 기독교세력과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이것을 연계시켜주는 주제가 북한선교다. 세계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선교의 사명을 성취해야함을 알고 있다. 북한은 선교의 대상이다. 세계교회의 공통된 과제다. 남한교회를 불러 통일운동의 공론화 시킨 회의가 1981년 한독교회협의회(1981.6.8-10)이고, 남한과 북한교회가 첫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 준 것, 세계에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공론시킨 장본인이 세계교회협의회다. 그러므로 남한교회는 북한교회, 세계교회와 연합하여 북한선교의 전진기지로, 조직체로 존재하게 된다. 중요한 숙제가 남한교회의 연합이다. 2009년 세계교회협의회 10차 회의를 부산에서 2013년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개최를 두고 일부 남한교회는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남한교회의 북한선교는 진보와 보수라는 시각적 대립을 벗어나 교회연합사역으로 모아져야한다.
남한교회의 북한선교는 남한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의 최고업적이며, 남한정부로부터 통일정책의 문을 과감하게 열게 하는 출발로, 1980년대 이후다. 해외성도들과 세계교회협의회 특히 독일과 미국교회의 지원으로 1981년 11월 3일-6일 오스트레일리아 빈에서 북한기독교의 대표인 고기준목사, 임동현 장로(조선 기독교연맹 부위원장), 전금철(조국평화 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남한기독교 대표들과 “7.4공동성명의 통일원칙과 중립적인 연방국가안”을 내걸고, 동시에 전두환 독재정권 제거를 선언함으로, 최초의 남한과 북한교회 지도자들이 통일을 주제로 만났다. 또한 남한 내에서 남한교회는 1981년 6월8일-10일 독일교회와 제4차 한,독교회 협의회에서 통일문제를 다룰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구성함으로 남한교회의 통일론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미국교회에서도 한반도분단에 책임과 관심을 가지고 1984년 3월21-24일 제3차 한,북미교회협의회는 세계교회협의회가 한국의 통일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것이 1984년10월 29일-11월2일 일본 도잔소에서 세계교회협의회 국제문제위원회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를 개최하게 하였고, 이어서 제1차(1986.9 스위스), 2차(1988.11, 스위스) 글리온 회의를 열어,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남과 북한교회가 공동기도문을 채택하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3차(1990.12. 스위스)글리온 회의를 통해 남북한 교회는 더욱 가까워 졌다. 그러므로 남북한교회는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의 불신을 씻고, 신뢰를 구축 하였다. 교회는 북한선교를 구축하기위한 조직체이며, 미래 통일사역의 중심조직이다. 남한교회의 구성원인 성도와 북한교회의 성도, 거짓성도든 아니든 북한선교의 동역자이며 통일의 연결체이다.
2. 통일의 과정으로서 교회-정부관계
남북한교회는 해방이후가 아닌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좌익과 우익세력으로 갈라진다. 남북한교회의 관계성에 남북한 정치가 개입되었다. 북한정부와 북한교회, 남한정부와 남한교회다. 양 정부는 남북한교회의 관계성에 중요한 변수며, 전환점이다. 정부들의 갈등과 냉전은 교회 사역의 단절이며, 남한교회에서는 남남 갈등과 폭력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러므로 정부의 기능은 남북관계의 중요한 통로다. 특히 남한정부와 남한교회가 북한교회를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를 정리하면 북한선교의 과정으로서 정리가 될 것이다. 두 번째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은 남한교회의 북한교회관계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유형을 먼저 정리하고, 남한교회와 관계성을 논하고자한다.
1). 가시적 정권하에서 움직이는 북한교회-북한정부에서 북한교회는 3단계로 구분된다.
(1) 1945-1953년 한반도전쟁(혹은 한국 전쟁)-북한교회는 사회주의체제에서의 만남, 갈등, 대립, 수용 그리고 억압의 시기다. 북한정부는 초기 민주개혁이라는 미명하에 반 민족적 - 일본잔재 소탕, 친미, 제국주의자들을 처단 및 봉건적 질서인 지주, 소작제 폐지 등의 개혁을 주도했다. 1947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출범시켰다. 이때 북한교회는 정당을 만들어 대항했고, 북한전역의 선거를 공개적으로 보이콧트 함으로 북한정부와 격돌했다. 이때 북한교회와 북한정부간의 변수로 북한교회 관련자들 중에 일본 제국주의적 부일세력, 친미세력-기독교인, 반제 반봉건에 동참하는 중산층이상의 기독교인 지주 계급이 있었다. 이들은 북한체제에서 존재가 불가능 했다. 그러나 지주계층, 부일, 친미 세력이 아닌 기독교인은 체제 내 존속했다. 한철하는 북한기독교인들이 북한정부로 부터 받은 고통은 신앙 때문이 아니고, 그 사회적 성분...즉 평소에 유산계급편에 들어서 무산계급을 착취하였다는 이유로 보았다. 초기 북한정부는 기독교가 북한전역에 강세인 것을 알고, 기독교와 협력하다가, 한국 전쟁을 통해 적대적으로 바뀐다. 북한정부는 한국전쟁의 실패를 미국의 전쟁개입으로 보았고, 북한교회에 책임을 전가했다.
(2) 1953-1972년-한반도 전쟁 사회주의 복구 사업-총력-전체인구의 12-15% 소멸, 생산시설 80%가 파괴 되었다, 북한전역 1000여개 교회 완전 파괴-목회자 440여명 중 20-30여명만 남기고 모두 월남했다. 그러나 감리교 이풍운목사 (양떼를 버리고 갈수 없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적극개입 한 목회자)와 (북한정치에 강량욱, 김득륭, 김창준 목사는 적극개입하다)가 부주석자리에까지 오른다. 이시기에 북한교회는 공공장소에서 사라졌다.
(3) 1972년-1988년 -공식화된 조직에서 공개된 북한교회(봉수, 칠골교회)로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으로 명칭이 변경됨으로, 북한식 기독교가 공개적으로 등장했다. 북한은 남한교회와 기독교단체가 반정부 운동에 개입하자, 북한 통일정책의 홍보용-통일전선을 구축하기위한 연합전선으로 북한교회를 공식적으로 조직화 했다. 지속적인 해외기독교인들과 남한교회지도자들의 북한 방문은 북한 내 기독교와 교회활동을 더욱 활성화 시켰다. 그 결과 북한은 1988년 봉수교회를, 1992년 칠골교회를 세웠다. 북한은 이미 1960년대 가정교회를 허락했다. 1968년 신평길의 보고(조선노동당 간부)에서 북한은 풀어주는 사업으로 60대 상, 비공식적으로 종교행위를 인정했다. 평남남포동의 안신호, 만경대의 칠골 강선녀, 강원도 도당위원장 김원봉의 모친 김씨 함남 영흥의 장관급 간부 문만옥 모친 황씨 중심으로 200여개 지금은 513개의 가정교회가 있다.
정리하면 북한교회의 가정예배처소는 김병로의 대동강유역 옥류가정예배처소 방문시 구성원 중에 1940년 평양서성교회 강병석 목사의 딸 강세영이 장로가 되어 성도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을 목격으로 입증되었다. 북한교회 구성원들이 신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자들이라는 연구논문과 관계가 있다는 견해들이 있으나, 김병로는 개개인의 신앙과 어느 정도 연계가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북한교회가 북한정부하에서 생존을 모색해가는 북한식 사회주의 교회로 평가하면 될 것이다. 바로 북한정부를 위해 움직이는 교회로, 정권의 요청에 따라 활동하는 북한교회로 보면 된다.
2). 남한정부의 통일정책과 교회
북한교회가 북한정부의 입장을 기독교적 차원에서 대외적으로 상대하는 교회라면, 남한교회는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나, 다른 편으로는 남한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남한정부 입장을 넘어선 행동으로 정부와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남한교회와 정부와의 관계는 북한정부의 통일정책과 맞물려있다.
여기서 통일정책의 변화에 남한교회는 동조, 협력 그리고 앞서나가는 모양, 일부 북한 정권을 지지하는 모양으로 비쳐진 부분도 있다. 이러한 남한교회의 접근은 신학적 차원-진, 보수신학-으로만 해석되어져야 한다. 본 글에서는 신학적 부분을 다루지 않겠다. 단지 관계성을 중심으로 살피겠다.
(1) 통일정책의 변화
통일염원은 이미 한국전쟁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남한은 북진통일, 북한은 ‘남조선에 있어서의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남한통일정책의 원리는 1960년대 ‘선 건설 후 통일’, 1970년대 ‘선 평화 후 통일론’, 1980년대 ‘민족화합 민주 통일방안’, 1990년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그 실천 방안으로 오늘날에 1민족, 2국가로, ‘남북연합으로 2체제 2정부’로 발전 계승되었다. 북한은 1950년대 ‘민주 기지론에 입각한 무력통일’, 1960-70년대 ‘남북연방제’, 1980년대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 1990년대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지속적인 정책은 ‘선 남조선 혁명, 후 공산화통일’이다. 북한통일정책은 자주적 ‘남조선의 혁명론’을 바탕으로, 북한이 남한의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의 통일방안이 아니고, ‘자주’라는 표현과 ‘남조선 혁명론’이라는 무력을 통한 적화 통일을 견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러할 여력이 없는 것이 북한의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남한과 북한의 통일정책의 기본 입장은 전혀 변화가 없다. 그러나 1988년 88선언으로 남한교회의 통일운동은 남한정부로 하여금 공식화된 통일정책을 만들게 하였고,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는 6.15선언과 10.4 선언은 남한기독교로 말미암은 묵시적 통일을 만들었다.
통일연구원의 조한범도 정상회담, 장관급 회담, 실무자 회담 등의 정례화는 사실상 거시적인 통일로 보아야 될 것이라 하였다. 그는 이제 남한교회가 어떻게 북한을 끌어안고 갈 것인지가 미래의 과제라고 강조 하였다.
이것으로 남한교회가 남한통일정책을 주도적으로 발전시켰다 고 볼 수 있다. 또한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은 사상적 이해와 접근으로 갈등과 대립, 북진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준비되어졌다. 이승만의 북진(멸공) 통일론과 한국전쟁으로, 진보당의 조봉암은 1956년 5월 5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주장하다, 간첩죄로 처형당함으로 남한 내 통일접근은 어려웠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군부정권치하에서의 통일운동은 곧 용공분자였다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통일정책의 시각적 변화가 나타났다. 김대중, 노무현정권의 햇볕정책을 통한 통일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으로 지금까지 유지해 온 대북관계를 차단시켰으며, 나아가 북한의 무력도발의 긴장을 남한에 주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통일정책은 북한을 개혁과 개방으로 장소로 함께 나아가자는 원리이나, 지금까지의 남한정부 통일정책에서 완전히 변화된 내용이라 북한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교전사태를 유발 시킬 수 있는 어려운 불신과 대립의 자리로 가게 하였다.
(2) 통일정책과 교회
남한정부의 대북정책이 경직되면 될수록 남북한교회의 교류는 불가능에 가깝다. 남한정부의 대북정책이 경직된 것은 사실이다. 특별한 출구는 보이지 않지만, 지속적인 대북관계개선을 하고 있는 남한교회를 통해 북한을 대화의 장소로 불러내는 것은 중요한 통일정책의 전략적 접근이다. 듣지 않고, 대화 없는, 만남 없는 남북관계는 어렵다.
남북한 통일정책과 남한교회는 역학적 관계구조를 가지고 있다. 북한교회는 북한정부 초창기 갈등과 대립,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정부입장을 적극지지하며, 북한 타도를 주장한 반공집단으로 바꿨다.
정리하면 남북한교회는 일제강점기에서는 조국해방을, 해방에서 북한정부는 사회주의 건설, 남한정권은 자유민주주의 건설로 적과 원수의 관계로, 그 현장이 한국전쟁이며, 휴전이후 북한은 전쟁폐허를 이겨내는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남한은 전쟁복구와 민주주의의 시도로 혼란, 이때 박정희정권의 독재와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한 남한교회의 급성장이었다. 남한교회성장의 배경에는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반공운동이 남한교회가 북한교회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역사적 흐름과 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반공을 국시로 한 통일정책-남한의 기본 정서
1945년과 해방과 1972년 남북공동성명-남한정부는 극단적 반공주의-북진정책을 펼쳤다.
1953년 전국적 북진 통일기원대회-1966년 한국 기독교반공연맹창립, 1967년 아시아 기독교반공대회 등이 조직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북한과 평화 공존 주장을 강조하다가 역사 속에서 친북세력으로 몰려 사라졌다.
남한교회에서 해방 후 민족의 분단을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즉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이승만 기독교세력과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남한기독교세력의 대립이 있었다. 김창준은 ‘기독교민주동맹’ 성명에서 “완전 민주 독립을 기하기 위하여”와 함태영은 ‘그리스도교도 연맹’을 통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여운형, 김규식 등은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된 조국을 원했으며, 남한 내 단일 정부는 반대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기독교세력은 남한만의 정부단일안을 지지했다. 이승만정권의 이러한 접근은 남한교회가 반공주의로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북한을 용서 못한 멸공의 대상으로 보게 하여, 영원한 분단의 책임을 남한기독교는 벗어 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한기독교인과 월남한 성도는 북한을 멸공과 북진대상으로 보았다. 한국전쟁이후 남한교회는 북한과 북한교회를 적대세력으로 인식하고 교육받았다.
② 1972년-1988년 남북공동서명과 88선언-올림픽개최로 인한 열려진 북한 관계는 남한교회와 북한교회의 공식적인 만남을 만들었고,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에 남한교회가 공개적으로 주도적 입장에서 가지고 남한정부와 충돌하며, 민주화운동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남한교회의 활동을 북한정부는 남한교회가 북한을 돕는 통일세력으로 착각하고, 남한교회의 파트너로 북한교회 조직을 더욱 공고히 하여, 공식적 대외 활동조직체로 활성화시키면서, 남한교회를 넘어 세계교회와의 만남을 주선하여, 관계개선을 이루려 하였다. 북한정권이 북한교회를 중심으로 남한교회와 세계교회를 엮어 만들려는 통일을 위한 연대세력이다.
남한교회는 초기 북한선교운동을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으로 사실상 공식화 했다. 1972년 7월 9일 통합 측 총회에서 ‘북한선교위원회’를 열고 ‘북한전도대책위원회’상설기구화 하였다. 1972년 7월 11일 한국기독교장로회 7.4공동 성명에 관한 적극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74년 김창인 목사는 ‘씨앗선교회-1977년 4월29일 기독교북한선교회결성, 등으로 남한교회의 북한선교운동이 일어났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운동으로 민주화운동으로 남한사회는 북한고려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통일방안제시를 하여, 민간차원의 통일방안이 등장했다. 광주민주항쟁으로 남한교회는 민주화 운동을 범국민 통일운동으로 옮겨갔으며, 북한선교운동은 선교단체로 축소되거나, 사라져갔다. 이때 세계교회협의회와 독일교회의 등장으로 남북한교회 대표자들이 만남이 주선되었고, 남한교회는 통일운동과 북한을 향해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선언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981년 1월 22일 남한정부(전두환정권)의 “민족화합과 민주통일방안”제시-한국 기독교지도자협의회와 NCCK에서 지지성명하며,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 신설결정을 자체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남한교회는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의 흐름과 제시에 따라 공식적인 활동과 교회에서의 역할과 책임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1988년 2월 29일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선언”은 남한교회전체 통일운동과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의 기조를 이루어냈다. 대부분의 내용은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권에서의 통일정책의 기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의 개념도 이 틀에 있음으로, 88선언은 남한교회가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을 골격을 만들어준 최대의 업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88선언으로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의 반론, 학술대회, 이어지는 성명서와 남북 기독자 상호교류를 제안 하며, 1989년 문익환 목사, 임수경 그리고 문재현신부의 북한방문은 남북한정부의 통일정책을 하나로 만드는 일을 하였다.
③ 1989년-2008년 -6.15와 10.4 선언
1995년 북한의 큰물사건으로 남한교회는 대북 인도적 지원물자를 공급하는데 앞장선다. 초기 정부는 대한적십자사를 중심으로 창구단일화를 1992년 2월 민간대북지원창구의 다원화조치를 취함으로 본격적인 남한교회의 대북지원 사업이 나타났다.
남한교회는 1988년부터 남한정부의 통일정책보다 앞서 나감으로 남한정부와 약간의 갈등과 참여자의 일부가 구속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북한전역에 남한교회를 알리는 부흥성회였다. 동시에 북한전역에 남한교회와 봉수교회를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것으로 남북한교회가 남북한정부의 중앙에 서서 북한선교와 통일의 역할과 기능을 입증시켰다. 지금도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운동’은 2008년 12월부터 남한교회의 지속적인 성명서와 요청으로, 2007년 10.4선언과 6.15선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변화된 모습으로 신문지상에 비쳐지고 있다. 아직도 남한교회가 풀어야 될 과제는 남한정부의 통일정책보완과 협력 그리고 북한선교역량을 확대하는 길이다.
여전히 북한은 남한의 생존을 위협하려는 집단으로 남한교회와 기독교에 인식 되었다. 북한은 정치적으로 ‘멸공의 대상’이며, ‘괴뢰집단’, ‘남침야욕에 사로잡힌 집단’등이며, 기독교적으로는 ‘종교말살정책의 본 고장’, ‘사탄의 소굴’ ‘악마의 집단’, ‘김정일은 빨리 죽어야 한다’ 등이 일부 보수적인 남한교회의 입장이다.
정리하면 남한사회의 북한인식이 중요한 배경으로, 남한정부 통일정책의 방향성에 따라 하루아침에 남한교회의 북한선교사역이 실종되기도 하고, 되살아나기도 한다. 가변적 변수이지만, 북한이 어떠한 자세로 남한정부와 교회를 받아들이느냐가 또 하나의 변수다. 북한은 지금까지 북한 중심적 이해와 관심으로 남한정부를 자유자재로 활용하였다.
남한교회는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을 지적하고, 살펴보아야한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가서는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을 지지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남한교회도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을 협조하며, 보완해주며, 정부의 낼 수 없는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창구역할을 함으로, 북한이 오판하거나,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 하는 것도 남한교회의 사명이다.
남한정부의 협력 없는 남한교회의 북한선교는 생각하기 어렵다.
3. 통일의 전망으로서 교회-국제관계
남북관계는 한반도의 역학적 상항으로, 다변적으로, 다각도로 나타나고 있다. 비록 세계가 세계화, 정보화, 민주화, 탈냉전, 신자유주의 등의 복합적 요인들을 다각적으로 얽혀있고, 무한경쟁의 격화-정규직과 비정규직, 다양한 외부문화의 유입과 가치관의 혼란으로 인한 불투명한 미래사회로 나아고 있지만, 미국의 외교기조에 달려 있다.
오바마 정부의 남북관계의 외교기조와 전략은 동북아 지역뿐만 아니라, 특히 북한과의 직접 대화로 “우월한 군사력을 기초한 일방주의”에서 “스마트 파워”로 대화 협력, 다자주의적 파트너십을 통한 국제문제해결에 주력 할 것이다.
이러한 미국정부의 입장은 북한의 핵문제를 국제사회의 협력을 받아 함께 해결 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오바마-바이든 플렌”으로 북한이 할 수 있는 명백한 옵션을 제시 할 것으로 본다. 이러한 미국의 흐름을 지금까지 남한교회는 미국 복음주의진영에 의존해 온 것은 사실이다. 국가조찬 기도회, 복음주의 교회 목회자를 통한 정치적 역량 확대 등을 펴 온 것은 사실이다. 미국 한인 목회자들의 북한 방문과 북한선교 등의 영역에서,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한다.
지금까지 통일을 향한 세계교회 협력의 두 가지 흐름이 있다. (1) 세계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움직임과 (2) 유럽중심-독일중심의 교회 협의회의 남한교회지원.
앞으로 중국 삼자교회가 한반도 통일과제의 중요한 파트너가 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건설적인 전략적 동반자(constructive strategic partner)'로 동북아시아 지역을 책임질 ’범세계적 세력(global power)'으로 인식하면서, 미일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다룬다. 비록 남한교회가 중국교회를 가정교회 중심으로 지원하고 있지만, 삼자 교회로 역량을 넓힐 뿐 만 아니라,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문화로 볼 때, 삼자교회의 인맥과 사역의 협력은 통일을 향한 중요한 남한교회의 과제가 될 것 이다. 통일과제로 남한교회를 불러 세운 교회가 독일교회다. 분단을 경험한 독일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 이전에 남북한교회를 통한 통일운동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였다. 독일통일이전과 이후 교회의 역할과 통독이후 교회의 사역과 기능에 관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독일교회의 통독경험들은 남한교회가 따라다니면서 알아야 할 중요한 과제다. 통독에 관한 독일교회의 자료들은 통독이전 일부, 이미 다 알려진 내용 정도로만 남한교회와 사회에 알려진 것 같다. 더구나 미국의 유럽공종에 핵심국가인 독일 교회의 정치적 역량에 NCCK의 미래지향적 방향도 심사숙고 되어져야 한다. 통일의 변수인 일본과 러시아가 6자회담의 중요대상이며, 일본 기독교와 러시아 정교회의 연계도 세계교회협의회 차원에서 지속적인 교제가 이어져야 한다. 백낙청 박사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 진행형’에서 단일국가로써의 고정된 통일만을 보지 말고, 연합제와 낮은 연방제 사이의 통일을 1단계로 보아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단일국가로의 통일은 거의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북의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김정일 정권이 무너져도 다른 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동서독의 통일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북한이 과연 독일 통일에 길을 가려고 하겠는가? 절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산가족들이 나이가 들어 점점 그 수가 줄어가고 있기에, 통일을 굳이 해야 함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소수로 전락할 것이다. 또한 젊은이들의 통일에 대한 무관심도 지속적으로 늘어 가고 있다. 한반도 주변 정세도 결코 통일을 바라보려는 경향에 머물러 있지 않다....국제정세를 파악해야 한다.”
정리하면 통일은 남, 북한정부가 풀 수 없을 정도로 세계정치와 연계되어져 있다. 정치로는 어렵다, 신앙의 인맥 그리고 정치적 유대관계 확인이 미래 과제다. 세계정치의 중심에 세계교회와 성도들의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또 다른 조건은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 사람이 아닌가? 유엔을 통한 통일문제 생각해도 좋다. 이 일에 관해 남한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연구해 보는 것도 남한교회의 과제다.
III. 나가는 글
남한교회를 통한 대북지원 사업으로 북한정부도 남한 기독교에 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런 결과는 남한 기독교의 대북 지원 사업이 결실을 맺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증거다. 복음의 직접 선포가 어렵다고, 성령의 직접 사역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비록 가짜교회 논란에 휩싸인 봉수교회, 칠골교회(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권사를 기념해 세운 교회)에서 찬양과 예배를 드릴 때, 성부, 성자, 성령께서 뒷짐을 지고 계시겠는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을 기대하며,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복음 증거에 기울였던 결과 오늘날 북한이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바꾼 것이다.
이러한 북한선교는 통일과 직결된다. 통일의 밑거름이 되는 북한선교를 연구하며, 분석 평가해야 됨에도 오르지 사역으로만 밀어붙이는 어리석음을 이제 멈추고, 전략적 북한선교와 통일에 관한 남한교회의 거룩한 준비를-영성회복과 섬김의 사역-해야 한다.
북한도 지속적인 대북지원 사업을 “체제의 위기”감으로 느끼고 있다. 특히 2006년 봄 북한은 기독교서적과 관련문건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며, 색출한 적이 있다. 사실 남한기독교가 북한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문익환 목사 방북 시부터 일어났으며, 조선말 대사전의 기독교내용설명을 긍정적으로 수록했다. 북한은 기독교 호칭을 외래종교 냄새가 나는 외국어로 명칭변경을 했다. 조선기독교연맹을 조선그리스도교연맹(1999.2)으로, 조선천주교협의회를 조선카톨릭협회(1999.6)오 전환시켜 외래종교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 친 기독교적인 정서를 무마 시키려한 것 같다.
정리하면 남한교회의 북한 선교-북한지원 사업은 통일과 북한 선교에 두 가지 의미를 준다.
첫째는 남한교회는 남한정부의 통일정책 변화에도 계속적인 북한지원사업을 통해 북한에 신뢰감과 남한기독교의 대화의 틀을 제공했다.
둘째, 남한교회는 북한선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명을 교회구조와 단체를 통해 기독교의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셋째, 남한교회의 북한선교는 북한체제에 관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넷째, 남한교회는 남한정부의 통일정책을 선도하며, 협력하며, 보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비핵. 개방 3000”선언이 마치 북한을 주도적으로 인도하겠다는 목표라고 보여진다. 동시에 선 핵폐기론이나, 선 조건론처럼 다가오는 것은 살펴보아야 한다.
다섯째, 남한교회는 세계교회와 협력하는 사업을 유지하되, 독일교회 통일연구와 중국 삼자교회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중국교회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남한에서 통일문제, 한반도 주변 국가들, 나아가 국제정세에 얼마나 유리한지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박영환 (한국선교신학회 회장,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IV. 참고문헌
강문규. “민족통일과 평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 『기독교사상』, 1988, 4, 174-180.
. - “민족 분단의 역사와 한국 교회의 자기 반성.” 『기독교 사상』 (1989.3)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중심, 2007.
권오성,『독일통일과 교회의 노력』, 고려글방, 1995.
권오성. “독일 통일과 교회의 역할(1).” 『기독교 사상』 (1995.8)
기독교학문연구회.『민족통일과 한국기독교』, 한국기독교학생회출판부, 1994.
김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