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sunghee_2ed.jpg설 교 : 이성희 목사
날 짜 : 2013년 9월 22일
본 문 : 예레미야 15:14-15, 갈라디아서 6:11-12

서론

오랜 전통에서 기독교 예술은 다양한 상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예로 닻은 소망을 상징하여 항해사들의 마지막 소망으로 표현했습니다. 화살은 순교와 아픔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현수막은 박해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합니다. 원은 영원을 상징합니다. 면류관은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등불은 지혜와 경건을 상징합니다. 종려 가지는 순교를 상징합니다. 사각형은 지상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상징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필수적인 것들은 상징화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박해였습니다. 박해란 기독교에서 필수적인 것이고 기독교사에는 어느 시대나 어디에서나 박해가 있었습니다.

박해는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연스런 대가입니다. 박해가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박해가 없으면 복도 없습니다. 박해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것은 십자가 때문입니다.

주후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한 회의 중의 하나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하였습니다. 이 회의에 참석한 교회대표인 주교 318명 대부분이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습니다. 눈이 빠지고, 손이 잘리고, 다리를 절룩거렸습니다. 몸이 성한 주교는 단 12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의 신조가 채택되고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주교 재직기간 3분의 1은 망명이나 도피 생활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이 따릅니다. 십자가는 박해와 함께 갑니다. 

산상보훈의 팔복의 마지막을 보세요. 마태복음 5:10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팔복의 결론을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5:11-12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인의 박해는 이미 예고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락방 강화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 혼자만 이런 박해를 받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7천명이나 남겨 두셨는데 “나만 홀로 남아 있습니다”라고 한 엘리야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엘리야 신드롬’을 벗어나야 합니다. 나만 아니라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은 이미 모두 박해를 받았습니다.   

2세기 ‘디오그네터스 서신’에는 “성도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했지만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학대당했지만 학대하는 사람들을 축복했다. 처벌받는 가운데 새 생명을 얻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박해를 받지만 박해가 기쁨을 준다고 합니다.

3세기 로마의 전체 인구 가운데 10% 이상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심지어 황제의 아내, 딸, 부하까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황제 갈레리우스는 기독교 신앙은 결코 완전히 없앨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일수록 신앙은 더욱 널리 퍼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311년에 갈레리우스는 “이제 그만”을 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최악의 박해는 공식적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기독교 박해의 중심에 높이 서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를 피하지 말고, 박해를 은혜로 받아 십자가가 주는 축복으로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할례를 받는 것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함입니다.

갈라디아서 6:12 상반절에는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이라고 합니다. 육체적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참 율법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이기적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주의자들입니다.

“모양을 내려”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프로소페사이’라는 말로서 “좋은 모양을 낸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겉치레만 한다는 말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내용은 없고 모양만 강조하고, 모양에만 의미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말은 겉모양으로, 외형적인 과시를 위해서 할례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의식이 육체의 모양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세례, 성찬, 십자가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계급장이나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율법적인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부인하고 형식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교회, 이런 신앙마다 타락했고, 부패했고, 쇠퇴했습니다.

종교적 의식이나 형식을 강조하던 교회를 보세요. 정교회 가운데도 러시아정교회가 의식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사제복의 규격이나 모습을 강조했습니다. 성경도 내용보다 포장과 표지에 보석을 박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예배에서 말씀의 내용보다 예전을 중시했습니다. 화려한 외형은 텅 빈 내면을 만들었고 결국 교회가 정치에 휘둘리고, 이념에 패배하여 70년의 공산주의를 허락했습니다. 교회 건물마다 십자가가 떨어지고 별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육체의 모양이 분명히 있습니다. 육체는 모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는 모양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육체의 모양을 만드시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생기를 불어넣어 비로소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육체의 모양만 내는 것은 반쪽짜리 인간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할례만 가지고는 완전한 구원, 완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반쪽짜리 구원이며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반쪽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반쪽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소위 ‘짝퉁’이란 유명상표의 모조품이 넘쳐납니다. 짝퉁 산업이 확장되어 호황을 이루고 있는데 ‘세계관세기구’(WCO)의 최근 통계에 의하면 2010년 현재 전 세계 짝퉁시장의 규모는 연 6,000억 달러(700조원) 가량 된다고 합니다. 가방, 신발, 의류, 시계, 담배 등 전 세계 교역량의 7%가 짝퉁이라고 합니다. 역시 짝퉁 왕국이라 하면 중국입니다. 중국에서는 달걀도 짝퉁을 만든다고 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짝퉁 달걀이 진짜보다 비쌀 것 같은데 짝퉁을 만든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중국의 상위 1% 부자들은 거의 모든 물품을 일제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물도 일제 생수를 마신다고 합니다. 진품과 짝퉁 명품 핸드백을 구별법을 아십니까? 갑자기 비가 오면 명품은 가슴에 품고 가고, 짝퉁은 그냥 흔들면서 간답니다. 짝퉁이 무엇입니까? 모양만 명품을 닮게 하고 품질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짜 카우보이를 말할 때에 ‘모자만 썼지 소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모양만 갖추고 알맹이 없는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모양만 번지르르하게 내었지 알맹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모양만 갖춘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은 형식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내용 때문에 문제입니다. 형식은 좋은데 내용이 없습니다. 모양은 잘 갖추었는데 알맹이가 빠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기도의 내용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시간을 맞춰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순종하는 마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하라는 말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세요.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등이 아니라 기름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도 없이 모양만 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등은 기름을 채운 슬기로운 다섯 처녀 보다 더 근사했을지 모릅니다. 디모데후서 3:5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합니다. 모양만 갖추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얼굴이란 말의 어원은 정신적인 것을 뜻하는 ‘얼’이란 말과 모양새라는 뜻의 ‘꼴’이란 말의 합성어로 정신적 모양새를 뜻합니다. 얼굴에는 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얼굴이 비슷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왜 그런지는 짐작이 가시지요? 얼이 빠진 얼굴이 많다는 것입니다. 모양새와 얼이 함께 있어야 좋은 얼굴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는 “이르시되”란 말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시작하시고, 모양을 내시고, 생기게 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양을 만드신 창조적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할례와 같은 형식이 아닌 십자가의 내용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데는 중요한 것입니다.

모양을 내기 위하여 내용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피하려고 형식만 갖춘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는 모양을 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내면이 든든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할례를 받는 것은 십자가의 박해를 면하려 함입니다.

갈라디아서 6:12 하반절에는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의 언약적 관계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 모습을 갖추기 위해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박해를 면하려고 할례를 받는 사람을 꼬집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할례 받을 필요가 없지만 받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1에는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고 합니다. 또한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는 늦게 할례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6:3에는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고 합니다. 디모데의 경우는 억지로 할례를 받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했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의 박해를 피하려고 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더 열심히 유대인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유전인 할례를 받았습니다. 박해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받으려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박해를 피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세례는 자기의 명예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공의 도구도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이 교회의 계급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 때문일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선생 혹은 선지자로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는 율법적인 의를 부인합니다. 십자가를 인정한다면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부인하고 기피합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전파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증거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정치적 교권적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죽인 것을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박해를 면한다”는 말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는 언제나 박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고통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수치입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의 눈에는 추합니다. 십자가는 지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험합니다.

일시적인 고통을 모면하려는 자들은 영원한 평안과 복을 잃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려고 할례를 받으면 일시적으로는 평안하겠지만 영원한 고통이 따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 지혜롭고 하나님 나라에 어리석은 자입니다.

광야에서 잠깐 동안의 고난을 피하려고 애급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잠시 동안의 박해를 피하려고 세상 편에 ‘부화뇌동’(附和雷同) 하는 자가 있습니다. 박해를 피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적의 편에 서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다 똑 같은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법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오선화라는 제주 출신의 여인이 있습니다. 일본으로 귀화한 혐한친일(嫌韓親日)의 신친일파입니다. 그녀는 다쿠쇼쿠대의 교수인데 일본 극우파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사람입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조선의 경제,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라는 망언을 했고 여러 권의 책을 통하여 한국을 맹비난한 인물입니다. 지난 7월에는 친척결혼으로 한국에 오려다가 공항에서 입국거부를 당했습니다. 최근에는 제주 성산에 부동산을 매입했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에게 팔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을 그렇게 욕하면서 한국에 집은 왜 삽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집을 팔지 말지 왜 팝니까? 한국인임을 부끄러워하고, 일본에 살면서 한국인에 대한 박해와 폄하를 피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다고 일본이 좋아할 것 같습니까? 결국은 양쪽에서 다 버림받고 팽 당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 있는 바울의 로마행 항해를 보세요. 잠시 동안의 불편을 피하려고 항해하다가 큰 풍랑을 만나 완전히 배가 파선을 당합니다. 잠시 동안의 박해를 피하려고 하면 십자가의 은혜는 없습니다. 더 큰 세상의 고난이 금방 닥치게 됩니다.

히브리서 11:24에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라고 합니다. 25절에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합니다. 26절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낙보다 하나님과 함께 고통 받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원인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둘째는 절망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셋째는 심한 박해로 말미암은 두려움입니다. 누구에게나 박해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박해가 누구에게서, 무엇 때문에 오는지 아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박해의 결과가 복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베드로전서 3:14에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그 자체가 복입니다. 십자가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를 늘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허드슨연구소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유럽의 역사에서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엄청 늘어나고 있습니다.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박해받았던 유대인의 숫자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15만 9천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합니다. 2억 내지 2억 5천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육체적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4억 명의 그리스도인이 마음 놓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주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 국가의 순위를 보면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베트남, 라오스, 이란, 몰디브, 소말리아, 부탄, 중국, 아프가니스탄, 예멘 등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 십자가, 믿음은 박해의 이유입니다. 순교의 빌미가 됩니다. 십자가는 참 무서운 것입니다. 이 것 때문에 세상에 악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아서기도 하고, 이것 때문에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야 합니다. 

C. J. 마하니가 말했습니다.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세상의 박해가 아니라 세상의 유혹이다”. 박해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고,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십자가의 박해를 두려워말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자랑하고 살아가는 속이 든든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연동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