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불을 끄고 형제들과 한 방에 누웠습니다. 해바라기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다시 기운을 차리시고, 우리 가족이 예전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방 한쪽 구석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저희 아버지부터 빨리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고 교회 다니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행여 형제들이 깰까 소리는 내지 못하고, 집안의 가장이신 아버지의 구원에 초점을 맞춰 속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교회에 나가시면 다른 식구들도 빨리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매일 밤 형제들이 해바라기 이불을 덮고 잘 때, 저는 어두 컴컴한 방 한쪽에서 무릎을 꿇고 조용히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지 40여 일쯤 지났습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봄이 지나고 초여름의 쌀쌀했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여보세요." "여기 파출소입니다. 댁 아버님이 술을 너무 많이 잡수시고 기억이 안 나시는지 길을 잃고 여기 쓰러져 계세요. 어서 모시러 오세요." 경찰이 알려준 주소로 한달음에 뛰어갔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너무 많이 드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져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흙 바닥에도 구르셨는지 옷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처남과 약주를 드시다 과음하신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외당숙인 이 친척분은 한강대교 근처, 포플러 나무가 즐비한 한강 변 백사장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셨습니다. 잠실대교는 아직 세워지지 않은 시절, 지금처럼 한강에는 많은 다리가 없었습니다. 대신 한강 변 곳곳에는 나루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붐비는 이곳은 최고로 목이 좋은 곳이었지요.
제가 고등학생 때, 온 가족이 충북 진천에서 지금의 양재동으로 이사 오면서 부모님은 정착을 위해 무척 고생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논밭이 펼쳐진 시골 마을에서 부모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장사도 하시고, 농사도 도우시며 하루하루 힘든 날을 보내던 부모님께 늦둥이는 삶의 큰 위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내아들을 얻은 행복도 잠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괴로운 심정을 아버지께서는 술로 달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만취해서 길을 잃고, 파출소의 도움으로 겨우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몇 주 안 지나 동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계속>
이장우 일터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