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초 한국세계선교협의회(대표회장 강승삼, 이하 KWMA)와 한인세계선교사회(KWMF) 주최로 열린 제5차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가 개최 됐습니다. 본지는 이번 대회 분야별 전략회의에서 논의된 발표들을 발표자들의 동의를 얻어 계속해서 게재합니다. 다음은 정홍기 선교사(AFC 선교회, 평화교회 파송)가 발표한 "공산권 선교의 평가와 앞으로의 제안 – 동유럽 루마니아를 중심으로"발표 전문입니다. (NCOWE V 관련기사)

진실로 그의 구원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우니 이에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 이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 감하였도다

jhg1.jpg서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한국교회는 동유럽에 대한 선교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1990년 AFC 선교회에서 주관한 동유럽 단기 선교를 참석 한 후 1992년 장기선교사로 파견되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루마니아의 선교를 위해 부카레스트에서 20년 가까이 사역하고 있다. 동 유럽의 공산권선교가 이전에는 가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동유럽 선교 1세대로 생각하고 있다. 이번 NCOWE V 의 ‘한국 교회의 세계선교 기여’ 주제로 한 대회에 발표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나는 큰 책임을 느끼며, 앞으로 동유럽 선교 전략의 역사적인 가치를 부여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동유럽 대부분의 한국 선교사들은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노방 전도를 통한 교회 개척과 신학교 사역을 시작으로 소수 민족인 짚시 선교와 사회사업 즉 고아원, 기술학교, 의료, 스포츠사역 등으로 발전하고 있다. 동유럽의 주류 교회인 정교회, 가톨릭, 개혁교회보다는 비 주류인 침례교, 오순절, 형제들의 교회 등과 협력을 통해 선교 사역을 펼쳐 나가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초 교파적인 팀 사역을 하기도 했고, 연합 신학교를 시작하기도 하여 분리되기도 했으며, 현지인 사역을 하다가 후에 생성된 한인교회 사역으로 전환하기도 했다. 또 현지에 없는 교단을 세울 목적으로 교회 개척에 열중하기도 했다.

선교 초기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힘써 자체 교회건물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으나 그들의 대부분이 지금은 관리비와 유지비 등으로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선교사들은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과 한국의 교회들과의 교류를 주선하여 새로운 시각을 갖는 부분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단의 시비가 있는 교회들과 교류하여 선교사 협의회에서 제외되는 선교사들도 나타났다.

지난 20년 동안 주로 선교가 가난한 계층에 진행되었는데, 동유럽 국가들이 NATO 군사동맹과 EU 연합에 가입하면서 선교에서도 실질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분야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온 동유럽 국가들은 한국 교회의 동유럽 선교에 새로운 Paradigm 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 발표를 통해 나의 선교가 동유럽 선교의 새로운 Paradigm 의 모델이 되기를 바라며, 이는 한국교회가 동유럽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질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I. 동유럽: Global 화에 미친 영향 

영국의 지리학자 Halford Mackinder (15 February 1861 – 6 March 1947) 는 19세기 중반에 유럽에 일어나고 있는 산업화로 인해 대륙의 힘이 해양의 힘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Heartland [심장지대] 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견고하고 독자적인 힘을 기를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동유럽의 철로를 개설 하면서부터 멕킨더의 이론에 수정을 가져왔다. 그는 “ 누구든지 동유럽을 통치 하는 자가 Heartland 를 통치한다.” 는 동유럽의 지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멕킨더의 이 이론은 1919년 베르샤유 협약을 맺는 중요한 기초이론이 되기도 했다. 

동유럽에 대한 지배는 2차 대전 이후 윈스톤 처칠과 스탈린의 대화를 통해 나누어졌다.  1944년 윈스톤 처칠과 스탈린은 발칸반도의 영토를 나누는 일에 동의한다. 루마니아는 소련이 90% 영국이 10%, 그리스는 영국이 90% 소련이 10%, 유고슬라비아는 50대 50, 불가리아는 소련이 75% 영국이 25% 영향력을 행사 한다는데 동의 하였다.  동유럽의 분할은 이렇게 해서 큰 충돌 없이 결정되었다. 그 결과 소련의 영향은 이러한 나라들에 온갖 시련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붉은 군대를 앞세운 소련의 영향은 전쟁 후에는 공산당 통치자가 사회를 통치하는 체제를 형성하였다. 비밀경찰을 동원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조직적인 위협과 감시 고문 언론의 철저한 통제를 통해 지도부를 강화하는 한편 충성심을 갖는 당원들을 만들기 위해 포상을 하면서 인민들을 회유하였다. 이러한 공산당 독재 정권은 인권 유린과 더불어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유 재산의 박탈은 사람들의 경제 개념에 민감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지금은 가장 절실히 발하는 것이 사유 재산의 안정을 갖고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입당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농민들은 당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에게 필요한 농기구나 비료를 훨씬 쉽게 얻어낼 수 있음을 곧 깨달았다. 좀더 많은 토지를 갈구하는 자들은, 당원증이 지겨운 행정절차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마술 같은 처방임을 알아차렸다. 공산당원이나 그 동조자가 우두머리로 앉아있는 관공서나 사무실의 종업원들은, 입당 원서의 공란을 메울 때까지 승진의 기회가 자신들을 비껴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은 국유화된 공장에서 좀더 쉽고 나은 직업을 원하던 자들에게서 잘 볼 수 있었다   

자연 발생적으로 특권층, 기회주의, 출세주의가 이들 나라에서 주요 단어가 되면서 공산당에 입당하는 사람들은 급속히 성장하였다. 공산당의 선동은 출세를 원하는 사람들을 통해 빠른 속도로 사회 각층을 잠식하였다. 이 후 동유럽은 세계 권력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냉전 기간 동안 독일과 러시아에 의해 오랜 고통의 세월을 맞는다. 

1989년 철의 장막이 무너지면서 - 정치와 경제에서 현대화를 경험하지 못한 채 - 동유럽 국가들은 “유럽 연합” 국과 나토의 회원국들이 되었다. 하지만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으며 문화적 기반인 교회들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표류 하면서 현대화와 탈 현대화를 지나고 있는 유럽 연합 문화를 마주치면서 심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  

루마니아는 2004년 NATO 북 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을 하였다. 이것은 루마니아의 국내 정치와 외교 정책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나토의 가입은 루마니아의 발전에 대한 실질적인 보장과 안정을 가져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토 동맹국들간의 가치와 목표들을 함께 공유하면서 국제사회에 참여하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2007년 1월 1일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민주주의 체제와, 법 적용의 개혁, 인권 개선, 표현의 자유, 시장경제의 적용 등 실제적인 개혁을 단행해 가고 있다. 물론 대다수 한국민들은 아직도 루마니아 하면 가난을 먼저 떠올리고, 불안하고 부패한 사회며 절도와 부정이 난무한 곳으로 생각한다.

대부분의 동유럽이 그렇지만 루마니아는 세 가지 당면 문제가 있다. 첫째는 민주주의 실현이고, 다음은 경제발전이며 그리고 사회적 결속이다. 이 문제들은 사회질서와 시민의식 그리고 정치적 지도력에 직결되어있다. 이것은 루마니아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부패를 척결하지 않고는 변화 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II. 동유럽의 교회현황 [공산주의 기간 동안]

동유럽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고 공산주의가 들어서면서 기독교 활동이 억제되었다. 그리고 지금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20년 째 맞고 있는 동유럽의 선교는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빠져나간 빈 공허한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 줄 것인가?

공산정권은 종교를 완전히 짓밟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자 “ religious associations” 에 등록된 단체 그룹들의 활동을 허용하였고, 관료들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심지어 교회 건물까지도 정부에 등록하게 한 후 그 재산들을 정부가 관리하였다. 따라서 정부에 등록되지 않은 종교 행위는 이적행위로 법에 저촉을 받았다. 또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신앙심을 전가하지 못하도록 18세 이하의 어린이들의 등록을 거부하였다.  예배의식은 지정된 장소에서 지정된 시간에만 허용하였고 개인의 신앙심을 표현하는 것을 금하였다.  무엇 보다 도 잔혹 한 것은 이웃들에게 종교적 이적행위를 감시하고 신고하도록 한 것이다.

공산주의 통치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회 활동에서 제한되었고, 그 결과 이류 시민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열등감을 갖게 되었고, 열등감은 기독교인들의 사고와 행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공산주의 시대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신체적인 장애인으로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전도는 상상 할 수 도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들을 같은 교인들과 교제하고 어울렸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 기회가 제한 당하였다.

공산주의의 정책은 교묘하게 작용하여 효력을 발휘하는데, 그것은 사람들간에 서로 의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다. 그래서 성도들 간에서도 서로 불신하고 두려워하도록 ‘누가 당신을 비밀경찰에 고발할지 아무도 모른다’라는 소문을 만들고 또 그것을 퍼뜨린다. 그 결과 동유럽의 교인들은 서로 신뢰하지 못한다.

다음은 공산주의 시절 철저한 감시 속에서 복음전도에 열정을 쏟았던 한 루마니아인의 인터뷰이다.

Q. 공산치하에서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했는데 주로 어떤 방법으로 감시를 받으셨으며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요?

A. 비밀경찰은 아주 전문가들로서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우리 가족을 감시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집에 아무도 없는 사이 도청 장치를 하여 우리의 모든 활동을 감시 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밀 경찰이 우리 집의 키를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사부” 라는 명칭으로 특별히 관리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이웃 중에 한 명이 골수 공산당 원이었는데 그가 우리의 키를 만들고 주로 우리를 감시하며 보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감시 보고에 의하면 나는 대단히 위험한 그리스도 인으로 특별주의를 요하는 인물 이었습니다.

Q. 비밀경찰이 당신에 관한 감시 자료를 가지고 있다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구했으며 무슨 내용이 있었는가?

A. 거의 대부분의 위험 인물들에 대해서 그들이 비밀 장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89년 혁명이 날 때 거의 대부분의 공산당들과 거리의 경찰이나 군인들이 겁을 먹고 있더군요.  우리 집 앞에도 항상 경찰이 지키고 있으면서 우리를 감시하고 미행 했는데 당시 공산당이었던 이웃이 ”조심 하시오 나에게 조금이라도 잘못하게 되면 감옥에 가게 될 테니” 라고 협박을 하더군요. 그런데 바로 그 때 Oastea Domnului [주님의 군대]의 신부 한 분이 나의 부인에게 와서는 ”바실레가 12. 22일에 체포될 수 있으니 조심 하라고” 하더군요.  그 신부를 아는 사람이 알려 주기를 비밀 경찰이 블랙 리스트 중에 몇 사람을 체포하여 감옥에 보내려 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나라 하였답니다. 하지만 어디로 도망을 갑니까 숨기를 합니까? 그냥 집에 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혁명을 일으키게 했고 오히려 모든 비밀 경찰이 22일에 잡히면서 모든 역할이 바뀌었습니다.

그 뒤 국회에 있으면서 나에 관한 비밀 문서를 찾았는데 420 페이지에 달한 장부를 나에게 건네주던 요원이 당신이 무슨 일을 했길래 이렇게 많은 기록이 남기어 있는 거요 하고 묻더군요. 문서를 가지고 와서 읽는데 그들이 나와 우리 가족을 감시하고 미행하면서 사용했던 방법들이나 나를 잘 알고 내가 믿었던 사람들 특히 함께 식사를 하곤 했던 사람들 까지도 나에 대해서 고발 하는 것을 읽으면서 공산당 들의 감시 체제를 실감 하였습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공산주의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다. 우리도 루마니아 북동쪽 갈라치에서 선교하는 중에 이러한 경험을 한적이 있다. 우리는 집을 하나 빌렸고, 그곳에서 3년 동안 30여명을 모아 예배를 드리고 가정방문을 하며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를 반갑게 맞은 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던 중, 이웃의 신고로 경찰에 불려갔다. 우리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에는 우리의 가정 방문은 무산되고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공산주의가 동유럽의 교회들에게 남긴 상처 중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삶과 대중적인 삶을 가르는 것이다. 공산주의 통치자들은 신앙을 개인적인 삶에서만 유지하도록 강제적으로 격리시켜 ghetto mentality 를 형성하게 하였다. ‘교회는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고 그래서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소리를 내서는 안 되었다. 교회는 머리에 스카프를 쓴 노인들에게나 적당한 것이었다.  당연히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 영역’을 형성 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자신의 신앙 영역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거룩한 사람으로 간주하였고,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속물로 몰아 기독교를 사회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놓았다. 19세기의 유럽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경건주의와도 같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실제적이고 은밀한 감정적인 관계에 있어서 편협한 영성을 강조하게 하고 있다.

한편 편협한 영성과 공산주의 기간 동안 비밀 경찰의 감시와 핍박이 지독함에도 불구하고 헌신된 가정들과 전도자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동유럽에서 교회들을 세워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부분적인 부흥의 예를 다음 인터뷰에서 읽을 수 있다. 

Q. 당신의 아버지의 마지막 인생에 극적인 역사가 일어 났다 하였는데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A. 우리 아버지께서는 아주 극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가정이었는데 공산주의가 권력을 잡은 후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감옥으로 보내졌어요. 심하게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과 흡연에 중독자가 되었지요. 술이 취하면 아주 난폭해 지기 일쑤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자를 폭행 한다고 Oastea Domnului [주님의 군대] 라는 교회의 집회에 갔다가 찬양과 설교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집회가 들판의 나무 숲에서 열렸는데 „주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당신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술 주정뱅이고 사악한 사람인지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주정뱅이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변화시키셨으며, 술과 담배를 끊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게 하셨습니다. 난폭한 행동을 버리고 아주 자상한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가족식구들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가족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시작되었지요. 

Q. 주님의 군대의 운동에 대하여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A. 제1차 세계대전 후 루마니아 인들의 도덕적 삶이 형편없이 해이해 졌습니다. 알코올과 담배는 물론이고 언어들이 아주 저속적이었어요.  주님의 군대 운동은 가장 필요한 때에 성령께서 일으키신 운동이라고 생각 되는데, 요셉 트리파  [Iosif Trifa] 라는 신부를 성령이 깨우셨습니다. 이 운동의 창시자 이며 주창자 이신 그는 사탄의 활동을 보고 복음의 필요성, 성경 말씀의 필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당시에 아주 값비싼 인쇄기를 사들였습니다. 그러한 인쇄기가 당시에 루마니아에 두 대 있었는데 한 대는 부카레스트에, 그리고 한 대가 그가 산 것이었습니다. 칼빈의 종교 개혁도 인쇄술의 발전을 통해서 확산 되었지요. 그리고 신약 성경을 인쇄하기 시작 했으며, 특별히 글을 잘 썼던 그가 많은 에세이들을 써서 배포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의 운동은 마치 불길과도 같아서 전국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으며 단기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번진 운동이었다. 1923년부터 1935년 까지가 영광의 기간 이었으며, 많은 마을들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기 시작했어요.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주막들이 기도 모임의 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교회들, 신부들, 감독들이 이 운동에 위기감을 느끼면서, 요셉 트리파 신부가 루마니아의 마틴 루터가 될 것을 예견 하면서 그를 정교회에서 파면 하였습니다. 1935년 교회에서 파면당 한 후 1938년 죽기까지 그가 시작한 운동은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계속 되었지요. 하지만 정교회의 권위적인 지도자들과 프레스들의 왜곡으로 많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되지요. 불행의 연속으로 제 2차 대전이 발발하고 공산당이 들어서면서 1948년 주님의 군대는 불법 단체로 낙인 찍히고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감금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 되고 있으며 나는 그 역사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 해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2000-3000여명의 사람들을 모아서 말씀을 전하곤 하였거든요.  물론 공식적으로 모이는 교회는 가질 수가 없었으며 지하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는데 대게는 결혼식과 장례식을 이용하였지요. 결혼식은 토요일에 시작하면 주일날 오후까지 하곤 하였지요. 어떤 때는 4천 여명씩 모이곤 해서 특별 천막을 치고 결혼식을 하기도 하였어요. 지금 같으면 당시에 어떻게 그러한 사람들을 모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항상 설교를 하고 사람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공산주의가 사탄의 압력이라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어요. 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활동을 했는데, 물론 성경과 기독교 자료를 선교사들에게서 받았습니다. 기독교 자료를 가지고 오면 공산당들 몰래 창고에 저장해 두고 비밀리에 만나서 전달 했으며 86년도는 인쇄기계를 드려와 직접 제작을 하여 배포하기도 하였습니다..


III. 앞으로 동유럽 선교의 방향 

공산주의 붕괴 후 초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선교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교회가 세워졌다. 그런데 현재는 정교회나 가톨릭이 경쟁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선교를 선점하고 있다. 미디어, 사회봉사, 정치, 의식행위, 결혼, 세례, 장례식, 성례 식 등에서 그들의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고 있으며, 문화의 중심으로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과거에 무슨 잘못과 실수를 했든 그들은 문화의 중심이고 국가의 자존심이며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에 영향을 미치며 영적 각축장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유럽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선교가 다양하게 진행되어 한동안 동유럽인들의 희망이 되는 듯 하였다. 노방전도, 교회개척, 신학교사역, 고아원, Street children, 병원 사역, 문서, 방송, 경제원조, 단기사역, 목사 초청 세미나, 지도자 초청 세미나, 집시 사역 등 모든 분야에서 활발하게 그리고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현재 동유럽은 독특한 사고방식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들의 문화적 기반과 경제적인 발전의 결과로 기독교 선교가 서서히 가장자리로 물러나고 있다.

주류 교회와 [정교회와 가톨릭] 비 주류교회 [침례교, 오순절, 형제들의 교회 등] 의 영적 각축전과 더불어서 우리 선교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사회적 현상이다. 대 부분 동유럽의 국가들은 사회 지도자들의 부패와 갈등 속에 교회의 역할이 실종되어 사회개혁이 느리고, 백성들은 가난한 가운데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서로간의 갈등을 가지고 있다. 1996-2000 년 루마니아 대통령인 에밀 콘스탄티네스쿠 Emil Constantinescu,  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루마니아 사회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5 가지로 지적 하였다.  [1] 급진적인 개혁의 실패 [2] 사유재산 소유 개념의 상실 [3] 개인의 책임감의 결여 [4] 구 공산당 체제 같은 일부 그룹들의 권위적인 정치 [5] 정교회의 전통적인 뿌리에 의한 소극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자세의 문화적 형성 등이 현대 사회 적응에 부적합한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

반면 사회학자 오비디우 로모샨 박사 Ovidiu Romosan  는 루마니아 사회의 문제를  [1] 교회지도자들의 위선 [2] 지방색 –중앙에 위치 한 산맥을 중심으로 서쪽의 트란실바니아, 남쪽의 올테니아, 북동쪽의 몰도바 [3] 현재의 상황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체할 전략의 적용 부족 [4] 현실 문화의 부족 [5] 미디어 생산의 인기주의 문화의 양산 등이 사회 깊숙이 퍼져있는 부패와 함께 온전한 사회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문제와 정치적 Leadership의 결핍, 더딘 민주주의 전환은 부패를 허용하였고, 경제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즉 모든 사회 기간산업을 뒤로 미루게 하였고, 사회 전반이 개혁이 시급히 요구된다.

기독교 선교는 이러한 동유럽에 어떠한 모델을 제공하고, 그에 따른 어떠한 교육을 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또한 공산치하에서의 교회들은 대부분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1. 정보가 공유되지 못한 탓으로 편협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
2. 사회는 세속화에 속한 것으로 성스러운 교회와 철저히 분리하였다.
3. 폭넓은 신학의 교류가 부족하여 근본적인 교리 중심의 신앙심을 유지하여, 때로는 순수함을 그러면서도 타 교리나 교회는 정죄하는 경향이 있다
4. 철저하게 자기 교회나 교파 중심의 폐쇄된 교류를 하고 있다.
5. 지도자들간에 감시하며 비밀 경찰과 협력한 경우가 있어 지금은 서로를 정죄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6. 자기 그룹이나 자기가 모르는 모든 것에 의심한다.
7. 사회적인 일에 아무런 관심을 가질 수 없고 무관심이다.
8. 섬김이나 봉사 헌신 헌금의 개념이 없고 give and take 식이다
9. 그러면서도 일부 교회는 반대로 아주 조직적으로 전도와 선교에 열심을 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잘 파악하여 적합한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 붕괴 후 지난 20년간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의 한국선교의 방향을 위해서 아래와 같은 질문들을 깊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우리의 선교는 동유럽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도록 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2. 공산주의 통치기간 동안 사회진출이 막혀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사회진출을 하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지도자로의 사회 개혁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바람직한 대안이나 사역은 어떤 것인가?
3. 다발적인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교회와 개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IV. 지난 20년 동안 한국 교회의 동유럽 선교

한국교회의 동유럽 선교는 AFC 선교회의 단기 선교와 함께 시작을 하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선교회 회장의 글을 보면 그 시작을 알 수 있는 면이 있다. 공산권이 붕괴된 지 약 반년 후 90년 여름 AFC 선교회는 동유럽에 처음으로 단기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이것은 동유럽 선교의 첫 걸음이었다. 다음의 선교회 회장의 글을 읽어보기로 한다

1989년 공산주의 체제가 막을 내리기 전까지 동유럽과 서유럽은 지도에서 각각 진한 회색과 연한 회색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았다. 1989년 이후 동유럽과 서유럽의 색 구분은 지도에서 사라졌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두 지역의 경계는 그렇게 사라졌다. 아쉽게도 유럽이 하나가 되자 동유럽은 우리의 관심에서 더욱 멀어져 갔다. 그러나 몇몇 선교단체는 달랐다. 동유럽이 개방되면서 선교의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신속하게 동유럽에 들어갔다.

AFC 선교회가 동유럽에 처음으로 파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AFC 선교회가 스위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서유럽교회와 꾸준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유럽 선교를 소망하던 서유럽 교회들은 동유럽의 변화를 주시해 왔었는데, 동유럽이 개방되자 그 동안 교류해 온 AFC 선교회와 함께 동유럽 vision trip을 떠나게 되었다. 첫 vision trip은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알바니아 등에서 진행되었다.

“루마니아 거리에는 총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광장에서는 공산정권 붕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촛불시위에 참가하다 죽은 이들을 추모하고 있었어요. 읽을 거리가 워낙 없는 바람에 쫓아와서 전도 지를 받아가는 이도 많았지요. 시골에서는 그냥 지나가는 우리들을 초청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어요. 서유럽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단현철 목사(AFC선교회 대표)가 처음 루마니아에서 받은 인상은 이랬다. 동유럽 비전 트립은 이후 꾸준히 진행됐고, 참석자 중에서는 장기 선교사로 헌신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그로부터 시작된 동유럽 선교는 폴란드에 무관으로 재직 중이던 분이 목사가 되어 선교를 시작하였고, 불가리아에 GMS 중심으로 신학교를 세우고 한인교회를 시작 하였으며, 체코와 헝가리에서는 교회 개척과 현지 교회들과의 협력사역이 이루어졌으며, 알바니아의 선교사들은 의료사역과 교회 개척 등에 팀 사역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코소보와 마케도니아, 구 유고 연방 등에서도 스포츠를 통한 교회 개척이 작지만 역사적인 선교의 기반들을 세워가고 있다. AFC 선교회의 선교사들은 또한 루마니아, 몰도바, 그리스 등에 선교의 요새들을 세워가고 있으며, 동유럽에 세워진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한 현지인 선교사역도 활발히 진해되고 있다. 특별히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헝가리의 한인교회들은 동유럽 한인선교사들을 도와 현지인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V. 한국교회의 동유럽 선교를 위한 앞으로의 전략 및 모델

1. 사회 개혁에 필요한 선교를 찾아야 한다.

동유럽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확립과 경제발전 그리고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질서유지와 자신에게 맡겨진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교육과 훈련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선교프로그램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웨버가 지적 한데로 근본적인 사회문제의 뿌리는 시민들의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의 결여이다. 웨버에 의하면 그 책임의식이 개신교인들의 특히 개혁주의의 가르침에 있다고 강조한다.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정교회 포함-교인들과 달리 삶의 목표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부르심”으로 나타난다. 부르심이란 개혁주의의 산물로 개인이 사회에서 실현할 수 있는 도덕적 행동의 가장 고상한 형태로서 자신의 의무를 실행하는 것이다. 

The only way of living acceptably to God was not to surpass worldly morality in monastic asceticism, but solely through the fulfillment of the obligations imposed upon the individual by his position in the world. That was his calling.  [Weber 1930.40] 

시민사회에 대한 개인의 부르심 이란 개혁주의 사상의 가르침이다. 성경의 권위에 의한 “부르심” 의 개념이 일상생활에서 하나의 정신이 되도록 했던 개혁주의의 가르침이 새롭게 전달 되어야 한다.  즉 새로운 개혁주의 사상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주의 사상 운동이 사회 발전의 기반의 되었던 나라들의 모델을 제시하여 가르침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역할이 선교로 이루어져야 한다.

2. 주류 교회의 갱신에 도움이 될 프로그램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동유럽 교회나 선교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이곳의 비주류인 네오 프로테스탄트 [침례교 오순절 등] 교회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알게 된 정보는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 안에 있는 정교회나 가톨릭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시절 당과 타협하였고,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거의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서로 간에 교류가 전혀 없이 얻어낸 정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주류 교회인 정교회, 가톨릭에서는 네오 프로테스탄트들의 활동을 소수 이단의 활동인 것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군, 경찰, 법, 행정 등의 사회진출을 막고 핍박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유럽의 사회 지도자들은 정교회의 정통성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다. 동 유럽의 가톨릭과 정교회 안에서 의식적인 절차만 뺀다면 대부분의 신부와 신학자들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데, 단지 그들이 우리와 직접적인 교류가 없으므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한국 교회는 이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3.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의 영적 갱신과 세계선교로의 도전이 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동유럽 나라들에는 거의 대부분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침례교회와 오순절, 형제들의 교회의 신학교들이 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은 나름대로 신앙을 지켜왔다. 폐쇄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물질주의에 잠식되지 않고 순수한 채로 많은 고난을 신앙심으로 이겨내고 있다. 더구나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지켜온 신앙이 기도와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활동하던 중에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많아지면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지도자들 사이에, 또 외국어를 할 수 있는 성도들 사이에 외국의 선교단체와 연결하여 지원금을 받으려는 경쟁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은 또 외국인 단체나 선교사들을 의존하는 반 네비우스적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을 초청하는 세미나와 수련회는 숙박을 무료로 제공하는 집회여서 그 결과 지금은 거의 어느 누구도 집회에 자신의 경비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프리카와 중국 중동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게 된 몇몇 개인들의 보고가 전달 되면서 선교활동이 산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는 루마니아 인들이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 그리고 중국 등지에서 선교사역을 한 간증을 들을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거의 대 부분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파송 교회나 기관 그리고 특별한 훈련도 받지 않은 체 선교 지에서 겪은 경험담들을 들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선교를 한다면 큰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1. 교회들의 독립적인 발전을 위해 네비우스 정책을 경험한 한국 교회의 경험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2. 세계 선교를 촉진 할 수 있는 새로운 선교 네트워크나 조직이 필요하다

VI. 나의 사역의 변화를 통한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 

나는 루마니아에서 18년 이상을 살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 영어,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면서 한 언어에 종속되어 있질 못하다. 그리고 한 교회를 개척해서 계속 인도하다 보니 진부해짐을 느끼게 되고, 루마니아 교인들과 루마니아어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나는 내가 루마니아인으로 착각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나를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또 그 안에서 문제투성이인 사회를 보는 눈이 세계관이 다른 나의 관점에서 보면 해결책이 보이는데도 그 일로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해결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큰 효과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모른 체 하면서 현재하고 있는 사역에 만족하고 있을 수도 없으므로 진퇴양난일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정체성을 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동안의 선교의 경험과 지식이 새로운 선교의 활동을 가능케 하고 있다. 외국인으로 살면서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현지 대학에 ‘지식인들 중에 외국인으로서 반영하는 정치적, 종교적 관점’에 대해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외국인으로 살면서 겪는 사회 현상의 경험들을 나누면서 이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보게 하고, 자신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관점들을 깨닫게 해 줌으로 교육자들이 가져야 할 사회 개혁의 공동 가치관을 확립해 가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나는 2008년과 2009년 루마니아의 서쪽에 위치한 클루즈 나포카라는 도시의 바베시 보야이 대학의 정치학과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두 차례 참여하여 주제를 발표 할 기회를 가졌다. 첫 세미나에서는 “탈 현대 사회에서 루마니아 인들의 identity 갈등” 이라는 제목과 두 번째 세미나에서는 “공산주의 통치 붕괴 후 20년의 루마니아 사회” 라는 주제였다.   
 
비잔틴 문화 중심의 정교회 전통과 공산주의 기간 동안 폐쇄된 삶의 경험들이 유럽 연합에 가입하면서 개신교 중심의 개혁주의 사상과 유럽의 자유 경쟁 사상과 마주치면서 identity 충돌을 겪게 되는데 이 충돌을 줄이지 아니하면 유럽 연합의 사회에서 가장자리로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이것은 루마니아 지식인들이 어떻게 개신교 사상을 통해 사회 개혁을 이루어야 할지에 대해 역설 하였다.

두 번째 발표에서는 공산주의 붕괴 후 2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고 권력을 남용함으로 경제가 마비되는 사회를 맞아 백성들이 다시 의심과 이기주의 부패 도둑 범죄 등 사회 불안을 가져오고 있으며 한탕주의 등에 대한 지식인들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야 한다 역설 하였다. 이 사역은 지식인들이 사회 변화와 발전에 어떤 비전을 갖는가의 중요성과 특히 비잔틴 문화의 중심인 정교회에 현대 사회의 기반인 개혁주의 사상을 어떻게 접목 해야 하는가에 대한 숙제를 남겨준 바 있다.

또한 국회의 정기 기도회 모임에 참여하여 한국의 국회 및 국가 조찬 기도회와의 교류를 갖도록 격려하고 한국을 소개 함으로  정교회 중심의 국회의원들이 한국의 개신교적 사회개혁과 정치 참여를 배우게 하고 있으며, 루마니아의 사회가 올바른 정치를 통하지 않고는 현대화와 민주주의 실현 그리고 경제 발전에 기초를 세워 나갈 수 없음을 역설 하기도 한다.

나는 최근 “APEC - 전문인 지도자 실행협회” 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지도자 들을 향한 선교사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다. APEC은 두 가지의 주요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발전해 나갈 생각이며 그 중 하나가 선교 한국의 경험을 루마니아의 교회들에게 알게 하는 “선교 루마니아” 프로젝트이다. 또한 APEC 의 기초가 되는 “기독교와 사회”의 세미나를 통해 성경적 가치관과 비전을 제시하는 사회 개혁 중심의 사역이다.  개신교인들은 사회란 세속화된 영역으로 자신들이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거룩함을 추구하는 이원론적 생각을 가지게 된다.

나는 „기독교와 사회” 포럼에 참석했던 한 기독교 정치인의 간증을 들으면서 나의 선교 사역의 비전이 루마니아의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지도자들에게도 전달되어야 하는 새로운 사명을 갖게 되었다.

나는 정치에 편견을 가지고 살다 뒤 늦게 발을 들여 놓았다. 헌데 이 포럼을 참석 하면서 성경에 기초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에게 많은 변화이고 발전이다. 이 포럼은 어떻게 성경에 기초한 정치를 해야 하는가를 설명 해 주었는데 이것은 나에게 아주 새로운 비전을 갖게 해 주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함께 이 백성을 위해서 일 할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나 역시 그 중 하나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오직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만이 이 나라의 무너진 도덕성을 회복하는 길 이라고 강조하는 것에 깊이 동감을 하였다. 한 마디로 이 포럼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 만이 살 길이라는 „ 큰 명제를 안겨주었다..

나의 또 다른 놀라움은 한국 개신교 선교사가 이 포럼을 가능 하도록 이끌었다는데 있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정치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하게 되었고 비전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그의 리더십을 보면서 우리도 이 나라를 위해서 저렇게 일 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우리 모두를 3일씩이나 이 수련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는지 그 기술에 대해서 놀라움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루마니아 인들에게 참가비를 내고 학문적 포럼에 참석 한다는 것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인데 이번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그의 추진력과 헌신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의 시간과 물질적 헌신은 나에게 커다란 도전을 남겨 주었다. 우리는 대부분이 자신만을 위해서 수고하고 모든 것을 자신 만을 위해 투자하고 집중 하는 반면 한국 선교사는 하나님의 주신 선물인 시간과 물질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친히 증명해 주었다. 이것은 우리모두에게 아주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빅토 퍼러거우- 클루즈 도 의원,

결론

나는 1989년 공산주의가 무너진 동유럽에 예수를 전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갖고 있었다. 이곳의 문화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채, 수 세기 동안 이곳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공산주의가 동유럽에서 기독교를 완전히 말살해 버린 것처럼 착각 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곳에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여 기독교 문화를 세워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열심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남긴 상처들이 사회 구석 구석에 배여 있는 것을 모른 채 열심만 내었던 나는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 했다.

동유럽 선교는 지난 20여 년 동안 선교 학 책에서 접해 보지 못한 공산주의의 독특한 상황을 한국선교사들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함께 갈등, 고뇌, 상처, 충격을 받으며 한 세대를 지나가고 있다.  그런 중에도 일부 교회들이 복음을 사랑하고 선교를 꿈꾸는 것을 보면서 한국 교회의 선교적 경험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펼쳐 간다면 동유럽 선교는 한국 선교에 또 하나의 선교역사를 만들어 가는 기회의 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 동안은 동유럽을 위한 선교 모델이 없고 적절한 훈련을 받을 기회가 적었지만 다음의 사항들을 주요시하게 생각한다면 좋은 열매를 걷을 것이라 확신한다.
 
1. 제 1 세대 선교사들의 경험을 모아 평가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2. 지난 16년 동안 매년 이어오고 있는 동유럽 한인 선교사 수련회를 효율적으로 발전 시키는 방안에 대해 모색해야 한다.
3. 동.서 유럽의 한인 교회 선교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동유럽 선교를 위한 프로젝트를 공유하게 하고
5.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역사를 조명하며 교육할 수 있는 교육 중심의 엘리트 선교사를 개발 해야 한다.
6. 동유럽 선교만의 종합 세미나 및 선교대회를 한국이나 유럽에서 개최하여 새로운 선교 자원을 개발 하기 위한 준비로 이루어져야 한다.
7. 동유럽 교회 지도자들의 한국 교회를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지도자 세미나 사역을 개발 하면 좋겠다.
8. 교회 개척을 직접 하기보다 이미 있는 교회들과 협력하고, 새로운 센터를 짓는 일보다 기존의 시설들을 활용하면서 저비용 선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9. 소수 민족인 집시 사역에 유럽 연합의 정책들을 반영하며 발전 시켜야 한다.
10. 세계관 확산 ‘라브리’ 운동, 사회 개혁 ‘새마을 운동’, 미래 사회 지도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대학생 중심의 캠퍼스 사역, 기도원 중심의 성령운동, 영성 훈련 등을 확산할 수 있어야 한다.
11. 의료 사역과 각종 기술 사역에 정부와 협력 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고

그리고 동유럽을 통해서 북한 선교의 비전을 가질 수 있다. 특별히 루마니아 사역을 하면서 갖게 된 새로운 사실은 루마니아는 북한과 형제국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과 정치, 외교, 문화를 교류해 왔던 루마니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주의 붕괴 후에 남한과의 관계를 통해 남북한의 갈등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이나 동유럽에 유학 왔던 학생들과 교류를 가졌던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북한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리고 이들 교회는 북한의 인민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 이들 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이 힘을 합해 북한을 선교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공산주의의 사상과 정신적인 구조를 잘 아는 이들을 북한 선교의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93년 6월 루마니아에 도착하여 첫 예배를 드리면서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기로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던 동유럽에 대한 첫 사랑을 앞으로도 펼쳐 나가야겠다. 주님께 영광 돌리며, 찬양 드립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정홍기 선교사(AFC 선교회, 평화교회 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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