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jpg
                                                                                                              Planemad
문상철(한국선교연구원/kriM)


I. 서론

종교간 대화는 포괄적인 주제이면서,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해야 할 주제이다. 이 주제는 중요하지만 자칫 기존의 논의를 반복해서 진부해지기 쉬운 위험을 안고 있다. 보다 진전된 논의를 하기 위해서 기존의 논의를 참고하는 가운데 이 글과 관련된 가정들과 질문들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슬람과의 대화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바란다.

1. 가정들(Assumtions)

기존의 논의를 반영하고 나아가 진전을 이루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가정들을 전제로 해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이 가정들은 이슬람과의 대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타종교와의 대화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첫째, 특정주의적 타종교관(particularism)이 성경적인 구원론의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상적 다원성(phenomenological plurality)에도 불구하고 규범적인 다원주의(normative pluralism)는 배격하는 입장이다. 포괄주의적인 입장도 성경적인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규범적 다원주의(normative pluralism) 혹은 처방적 다원주의(prescriptive pluralism)는 결정적인 영역에서 지적으로 공허할 뿐만 아니라, 독선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원주의자들이 정통적인 기독교인들을 향해 비판한 모습을 그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찰스 밴 엥겐이 요약한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적으로 특정주의자이고, 문화적으로는 다원주의자이고, 교회론적으로는 포괄주의자이다 (Jesus Christ is Lord: faith particularist, culturally pluralist, ecclesiologically inclusivist)”.

둘째, 위의 명제에 근거해서 상대주의적인 대화관을 배격해야 한다. 상대주의는 기본적으로 자기패배적인(self-defeating) 입장이고, 극단적으로는 니힐리즘에 빠지게 한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게서 도움을 얻고, 타종교와의 교류를 통해서 한 종교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은 모든 종교가 오류가 있으며, 그 어느 종교도 완전하지 않다는 입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종교간 대화의 전제가 이와같이 상대주의적인 종교관이라면, 그 대화 자체가 성경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은 복음에 대한 확신 위에 타종교와의 대화에 임할 여지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화의 필요성은 있다. 다만, 그 대화의 전제가 무엇인지는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위의 두 명제에 충실할 때 종교간 대화는 사실상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선교적 변증학(mission apologetics)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다. 변증학이라고 해서 기존의 전통적인 변증학에 대한 고정관념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변증은 종교적 엘리트들간의 사변적인 논의가 아니며, 변증을 위한 변증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의 진리로 안내하고, 잘못된 세계관을 바로잡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간 대화, 구체적으로 이슬람과의 대화에 임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변증은 폴 히버트(Paul G. Hiebert)가 말한대로 조직신학, 성경신학, 인류학적 신학의 “삼자간 대화(trialogue),” 혹은 철학적, 역사적, 경험적 접근의 “삼자간 대화(trialogue)”를 통해 세계관 변화를 시도할 것이다.

2. 질문들(Questions)

위의 가정들에 근거해서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슬람과의 대화의 기반이 되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둘째, 이슬람과의 종교간 대화를 모색함에 있어서 어떤 이슬람과의 대화가 가능한가?
셋째, 이슬람과의 대화를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아래의 내용들은 위의 세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 될 것이다.

II. 대화의 기반으로서의 기독교 영성

영성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게 내려질 수 있지만, 맥그라쓰의 입장을 무난히 채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영성은 진정하게 실현된 종교적 삶의 추구와 연관되는 것으로서, 그 종교의 구별되는 사상들과 그에 근거하고 그 범위 안에 있는 전체적인 삶의 경험을 결합하는 것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 영성에 대해서는 “진정하게 실현된 기독교적 존재를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사상들과 그에 근거하고 그 범위 안에 있는 전체적인 삶의 경험을 결합하는 것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글렌 스코르기(Glen Scorgie) 역시 기독교 영성을 정의하면서 삶의 전 영역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변혁적이고 능력을 부여하는 임재 가운데서 사는 것이라고 보면서, 영성이 초월적 차원과 연결되면서 그것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기독교 영성에 대한 이해는 영성의 세 요소들로 신념들의 집합, 가치들의 집합,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 관점은 영성과 신비주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신비주의는 영성의 특별한 유형일 뿐이므로, 이 두 개념을 잘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영성은 신학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신학이 역동적으로 삶으로 표현될 때 그것이 진정한 영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D.A. 칼슨(Carson)이 지적한 대로, 신학이 말씀 중심의 숙고가 될 때 신학적 구조물로서의 영성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며, 바르게 이해된 신학은 영성을 계도하고 지탱할 것이다. 맥스라쓰도 신학을 규정함에 있어서 객관적 내용과 주관적 신뢰 행위 모두를 연관시키면서 신학과 영성의 긴밀한 연결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본질적으로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관계적인 차원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신학과 분리될 수 없는 영성의 자료로서 성경의 권위와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영한의 “말씀의 영성”의 개념이 이에 대한 것인데, 결국 영성이 복음과의 연결 속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을 벗어난 경험적인 차원에서의 영성 이해나 그런 영성에서 나온 종교간 대화의 노력은 취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말씀 중심의 영성은 역사와 전통 속에서의 영성의 모습보다 더 우선적으로 강조되어야 할 주제이다.

기독교 영성은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을 수반한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되고, 이 과정에서 기도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기도로 풍부하게 체험되는 하나님의 임재는 종교간 대화의 선행 조건이 된다. 대화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 않는 사변적인 논증의 수준에 머물 때 인위성의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또한 성화를 통해 깊어진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성화의 내용이지만, 동시에 영성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성은 단순히 내적인 수련을 수반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갈등과 폭력에 대처하는 영성”으로 실현되기도 한다. 성화를 추구하는 영성은 외향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이것은 선교적인 과업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기독교 영성은 또한 문화와의 관계,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되기도 하고 그 영향을 받기도 한다. 영성과 문화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스코르기가 강조하는 대로,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성육신의 패턴을 따라서, 육화된다”. 이것은 집단적인 현상으로서 문화를 이해할 때 마땅히 이해할 수 있는 선교적 과업이고, 개별적으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노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 의미는 결국 사람들에 대한 개방성을 직접적으로 관련 지으며, 이것은 다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영성은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 모두를 가지고 있다. 영성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 중 수평적 차원이 많이 강조되는 최근의 경향은 균형을 잡는 면이 있다. 이 두 차원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의 문제이다. 수직적으로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굳건하고, 수평적으로 이웃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따뜻함이 있을 때, 기독교 영성은 타종교와의 대화의 좋은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를 닮아감에 있어서 자라는 것”과 “하나님의 보다 큰 목적에 참여하는 것”이 모두 충족될 때 종교간 만남은 충분히 기독교적일 수 있다는 테리 먹 (Terry C. Muck)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이슬람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성경적인 기독교의 영성을 추구하고 성숙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 토대 위에서 효과성을 모색할 수 있고, 방법과 전략을 새롭게 찾으려는 노력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III. 대화가 가능한 무슬림

기독교적인 영성의 토대 위에서 종교간 대화를 시도할 때, 그 대화의 대상은 정확히 누구인가? 우선 제기해볼 수 있는 질문은 대화의 상대가 이슬람이라는 종교인가, 아니면 그 추종자들인 무슬림인가 하는 것이다. 이 두 대상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둘 다이지만, 대화의 상대에 따른 접근법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슬람과의 대화는 거창하지만, 그 대의명분에 비해 실속이 없기 쉽다. 기본적으로 대화는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다. 집단과 집단의 대화라고 할 때에도, 이슬람과의 대화에 있어서는 73개나 된다고 하는 이슬람 분파들(sects) 중 어느 이슬람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대화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슬람이라고 할 때도 공식 이슬람(formal Islam)이냐 민간 이슬람(folk Islam)이냐 하는 질문도 다루어져야 할 주제이다. 정통 이슬람은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대한 진리, 천국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추구하는 반면, 민간 이슬람은 일상 생활에서의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다. 빌 머스크(Bill Musk)의 다음과 같은 관측은 이슬람과 무슬림들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민간 이슬람의 세계관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기쁨 위에 세워지며 그것들과 통합된다. 대안적인 공식 이슬람 세계관과의 불일치가 없는 것은, 단순히 세계에 대한 대중적 관점이 더 적합하고, 더 속되고, 더 편만하기 때문이다.

히버트도 민간 이슬람의 중심적인 관심사로 “일상 생활과 죽음의 의미, 한 사람 혹은 집단의 안녕, 불행의 위협, 성공과 실패, 미지의 세계에 대해 알 필요, 인간 관계, 다른 영적 존재들과의 관계” 등을 꼽는다.

이러한 민간 이슬람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마르크스주의나 서구 개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 성격을 띠면서 집단을 결집시키고, 한 방향으로 정렬시키려 하고, 조직적인 이탈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집단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근본주의 이슬람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말함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토마스 쿨리난 (Thomas Cullinan)에 따르면,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특징들은 고자세(high-minded), 제한된 기준(limited criteria), 단순화된 기준(simplified criteria), 자기의(righteous), 부적응자의 죄책감(guilty misfits), 반대의견에 비관용(no oppositions), 언어적 왜곡(perversion of language) 등이 있다.  종교간 대화에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가진 집단과의 대화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데올로기 성격을 가진 근본주의 이슬람을 이해할 때 정상적인 종교간 대화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공식적인 이슬람의 교리를 둘러싼 논쟁에 치중하게 될 때 소모적인 논쟁이 되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보통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보다 지혜로운 접근이 될 것이다.

핸드릭 크래머가 일찌이 지적한 대로, 대화의 상대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될 때 집단 결속과 집단 압력이라는 변수는 이슬람권에서 현실적인 이슈가 된다  집단을 대상으로 한 대화와 변증의 노력이 어느 정도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기독교 선교의 입장에서 볼 때 선교적인 진전을 이룬 예는 없지 않아 있다. 헨리 마틴(Henry Martin)의 페르시아에서의 수피 무슬림들과의 대화의 노력이나, 보다 최근에는 뉴욕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중심으로 한 무슬림들과의 공개적인 대화의 노력이 그러한 성공적인 사례에 속할 것이다.

무슬림들과 대화를 시도함에 있어서 중요한 태도는 그들을 종교적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 인간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기독교인이나 무슬림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공감대와 신뢰를 가지고 대화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애착이 형성될 때 대화가 진전될 수 있고, 깊어질 수 있고,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무슬림들과의 대화는 그들의 세계관을 깊이 이해하는 것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 세계관은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잡하다. 내가 만난 무슬림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사람에 맞는 대화의 접근법을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 과정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관점이 아니라, 낮아져서 땅에 발을 딛고 그 현실 속에서 그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접근법(a down-to-earth approach)이 될 것이다. 그럴 때 대화의 주파수가 맞아서 확성기로 외쳐대는 목소리보다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IV. 대화의 방식

신학에서 대화의 개념은 너무나 다양하게 사용되어서 과연 공감대의 토대 위에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대화라는 용어가 과도하게 사용되는 면도 있고, 그 전제가 다원주의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문제가 된다. 대화에 임한다고 해서 모든 사안에 대해서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이며, 정직한 불일치에 대해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대화에 개방적으로 임한다고 해서 자신의 신앙적 토대에 대해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화의 선행조건으로서 “자기 이해 (자기 가치, 태도, 편견 이해)”를 강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

대화를 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우선 종교간의 공식적 대화냐, 개인간의 인격적 대화냐 하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 상황에서는 이데올로기 집단화된 집단의 사람들과 공식적 대화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수 있음을 앞서 지적했지만, 이를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다. 폴 그리피스(Paul Griffiths)는 “종교간 변증의 필요의 원칙(the necessity of interreligious apologetics: the NOIA principle)”이 여전히 유효함을 변호하면서, 구체적으로 종교적 공동체의 대변자들 사이의 변증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상황에서의 종교간 대화는 개인간의 인격적 대화를 추구해야 할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접근이 더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것이다. 선교사의 경우, (기회가 드물겠지만) 무슬림 공동체의 대변자와의 공식적인 대화도 필요에 따라 할 수 있어야 하며, 일상적인 만남 가운데 무슬림과의 개인적인 대화에 있어서는 더더욱 능숙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의 종류에 대해 말하면서 먹(Muck)은 여섯가지를 말한다: 논쟁(debate), 대화(dialogue), 파트너쉽(partnership), 옹호(advocacy), 우정(friendship), 성장(growth) 등이 그것들이다.  무슬림들과의 대화에서는 이 여섯 가지 중에서 어떤 방식이 적합한지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하고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우정을 기반으로 한 대화, 혹은 예의를 갖춘 부드러운 변증이 적합한 방식이 될 것이다.

대화의 자세는 경청에 근거한 “쌍방형 논증”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대체적인 합의를 할 것이다.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해도 타종교(인)을 존중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찰스 포맨 (Charles W. Forman)이 말하는 바, “사랑이 의미하지 않는 것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거나 행하는 것과 의견의 합일을 반드시 이루거나 동의하는 것”이라는 것은 이런 관점과 유사하다. 반면에, 사랑은 이웃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대화의 범위 혹은 주제로 종교간의 교리적인 대화뿐만 아니라, 특정 상황, 특별한 과제를 생각할 수 있다. 이에는 가난한 자들과의 대화, 갈등 상황의 해소를 위한 화해의 사역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때로 공동의 사회적 선을 도모하기 위한 협력과 연대를 위한 대화도 가능할 것이다. 인도의 경우, 소수 종교로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지도자들이 종교 자유를 신장하기 위해 함께 대화와 연대의 노력을 해왔는데, 이러한 노력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인 교리를 둘러싼 신학자간 논쟁이나 보통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 대화는 이슬람 상황에서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첨예하게 대립되는 주제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삼위일체 신론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교리는 이슬람 분파들의 진리주장과 충돌한다. 이런 가운데 많은 인내가 필요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토론이 이루어지려면, 우정과 신뢰의 관계가 지탱되어야 할 것이다.

스티븐 베번스(Stephen Bevans)와 로저 슈로더(Roger Schroeder)는 대화 자체가 하나님의 방법이고 예수님의 방법이라고 강조하면서 “선지자적 대화(prophetic dialogue)”의 개념을 주장한다.  선지자적 대화는 “담대한 겸손(bold humility)” 혹은 “겸손한 담대함(humble boldness)”을 기반으로 대화로서의 선교, 예언으로서의 선교를 결합하면서 상황적인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베번스와 슈로더는 선지자적 대화의 성경적 사례로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들고 있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접근은 일반 계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전도를 위한 접촉점으로 사용했다는 데 이들의 논점이 집중되고 있다. 이들은 바울이 세속 지성인들의 영적인 필요를 세계관 차원에서 다루고 복음을 통해 해답을 제시하는 노력을 했다고 평가한다.

같은 본문을 다루면서, D. A. 칼슨 역시 전도 대상자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관, 즉 가치, 마음, 사고 패턴으로 들어갈 길을 찾아야 하고, 그들의 준거의 틀로 들어갈 다리를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바울이 결국 성경적 세계관을 구축한 후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의미있게 전달되도록 의미구조를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필자는 종교적 상징 분석을 통한 세계관 해석 모델을 제시한 1998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아덴에서의 바울을 “세계관 전도자(worldview evangelist)”로 규정하고, 결론적으로 세계관 차원에서의 문화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윌리엄 더니스(William Dyrness)는 초문화적 대화라는 주제를 언급하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 자체가 한 민족의 삶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a critical moment)”이 되어 옛 방식이 도전되고, 새로운 전망이 열리고, 약한 영역들을 지적하는 결정적인 관점을 제공한다고 본다.  레슬리 뉴비긴 역시 이 주제에 대해 비슷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 대화에 본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야기, 즉 예수님의 이야기와 성경 이야기를 그저 말해 주는 일이다. 그 이야기 자체가 바울이 말한 대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이런 내용을 무슬림과의 대화에 적용한다면, 결국 역동적이면서도 경험지향적인 복음 증거를 시도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필자의 세계관 전도의 개념 역시 터키 코냐에서의 현장연구를 통해 가능성이 검토되었고, 성경적인 사례와 통합된 결과로 제시된 것이었다. 이런 세계관 변형의 접근법이 이슬람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며, 보통 무슬림들과의 대화의 과정에서 그 핵심 과제가 된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슬림들과의 대화는 결국 세계관 차원에서의 영적 필요를 이해하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머스크는 무슬림들의 영적 상태를 요약하면서 그들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악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집단에 소속하지 못할 때의 수치심, 악에 대한 개인의 무력감, 삶의 무의미, 질병에 대한 염려” 등을 지적한다.  이런 보통 무슬림들의 내면 상태를 이해하고 적절히 말씀으로 돕는 노력은 깊은 차원에서의 선교적 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수잔 헤치트(Susan Hecht)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신자들을 염두에 둔 “설득적 상호작용(persuasive interaction)”을 요약하면서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어딘지를 조사하는 데서 시작해서, 어떻게 그런 입장을 가지게 되었는지 평가하고, 충분한 이해를 하고 그것을 보여주고, 전도자의 입장을 진술할 것을 제안한다.  핵심적으로 헤치트는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동행으로부터 설득력을 얻어야 하며, 분명하면서도 부드럽고 정중하게 복음을 설명할 것을 주장한다.  이 제안은 포스트모던 세대는 물론, 이슬람권의 포스트모던 세대, 나아가 모든 세대의 무슬림들에게도 유효하지 않은가 주장하게 된다.

결국, 대화의 내용 뿐만 아니라 대화의 방식이 중요하며, 때로는 대화의 방식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그것은 사람과 메시지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메시지의 내용과 메시지의 전달 방식을 쉽게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화의 내용이 복음적이어야 하며, 대화의 방식 또한 성경적이어야 한다.

V.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기독교 영성의 특징, 대화의 상대로서의 무슬림 이해, 무슬림들과의 대화의 방식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약과 결론을 내린다.

첫째, 이슬람 혹은 무슬림과의 대화는 견고한 기독교 영성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먹(Muck)이 요약한대로, 기독교 영성은 신앙간 만남 속에 있어야 하고, 그 자체가 신앙간 만남이고, 신앙간 만남 때문에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 이러한 통찰력은 이슬람권의 상황에서 더욱 절실한 기독교 영성 함양의 과제를 보여준다.

둘째, 보다 구체적으로, 이슬람권에서의 대화를 위해서는 성육신적 영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무슬림들은 질적인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럴 때 관심을 가지고 진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방식은 결국 바시르 마시(Bashir Abdol Massih)가 주장하는 바 “성육신적 증거(the incarnational witness)”의 핵심 내용이 되는데, 이 접근법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열쇠로 보는 것이다. 필자는 유럽의 교회에서 공동체적 사랑을 찾지 못했다고 하면서 가톨릭에서 수피즘으로 개종한 스위스 성악가를 만나 대화하면서 이러한 공동체적 사랑의 필요를 절감한 기억이 생생하다.

셋째, 무슬림들과의 대화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대화 자체가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대화 자체가 최종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교의 궁극적 목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희망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타세계관에 대해서는 현상학적 이해와 묘사에 이어 존재론적 비평, 그리고 선교학적 변형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넷째, 무슬림들과의 대화는 인격적이어야 한다. 인간적인 신뢰를 구축해야 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논증을 해야 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경청할 필요가 있다. 크래머는 일찌기 이슬람권에서의 기독교 선교에 대해 말하면서 “이슬람은 기독교 선교에 인내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적절한 평가였다. 이렇게 인내심이 필요한 것은 죄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공통의 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무슬림들의 경우 총체적 관점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경향, 집단주의적인 문화로 인한 집단 압력의 요소, 가족 및 친지 유대관계로부터의 억압 등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 혹은 무슬림에 대한 두려움이나 혐오감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무슬림들과의 대화에 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샬롬을 누리고 전파하는 미션을 감당해야 한다. 크래머 역시 오래 전 “이슬람을 두려워하거나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태도에 사로잡혀 있는 선교사라면 본국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고 말한바 있다. 쉽지 않은 만남과 대화이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슬림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및 무슬림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마 10:16). 아멘.

VI. 참고문헌

<국문>
김영한. 2011. 안토니우스에서 베네딕트까지: 정통 기독교 영성가 제1권. 서울: 기독교학술원 출판부.
뉴비긴, 레슬리. 1998[1989].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허성식 역. 서울: IVP.
전호진. 1992. 종교 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크래머, 헨드릭. 1993 [1938].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최정만 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등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에서 2013년 11월 15일 발표한 내용>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