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들 MK(전지석선교사)이가 바울선교사가 되어 필리핀훈련원으로 9 1일 들어 갔습니다. 아직 어린 손주 셋을 데리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떠났습니다. 너무나 대견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부디 충실하게 훈련에 임하고, 멋있는 선교사로 거듭나기를 기도하며 기대합니다.

 

11살(초등5년)에 부모의 손을 잡고 필리핀에 갔던 엠케이가 제 자식의 손을 잡고 들어갔습니다.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입니다. 어미인 나도 감회가 새로워 그 때의 일을 추억하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글로 써 봤습니다.

 

그 때는 바울선교사가 되려면 국내훈련(3개월)과 필리핀훈련(10개월)을 받아야 했다. 우리 가족은 아직 가포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터라, 비밀리에 국내 훈련을 마치고, 출국을 앞에 두고 어렵게 교회에 사임의사를 표했다. 만약에 국내교회로 간다고 했다면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선교사로 고생하러 간다고 하니, 마지 못 해 보내 주었다. 우리 가족은 선교사의 꿈을 안고 이별의 슬픔에 젖은 성도들을 뒤로하고 필리핀으로 떠났다.

 

1991. 10. 14.

같이 떠난 선교사가족(8회)은 모두 12가정(싱글 3)에 어린이까지 포함해 36명인 것으로 기억이 된다. 김포공항에서 모인 36명은 비행기에 올랐다. 어린 자녀들 2-3명씩을 데리고 떠나는 선교사들의 얼굴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는 신비로움과 불안감이 함께 드리워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자녀들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마닐라 공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후덥지근한 날씨가 먼저 우리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공항 안에서 마셨던 망고쥬스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믹서기에 금방 갈아주는 망고쥬스의 맛은 예술이었다. 지금도 종종 그 맛을 회상하며 말하고 있다.

 

화장실에 가려고 두리번거리는 우리들을 보고 필리핀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겠다고 했다. ‘필리핀 사람들 참 친절하구나볼일을 보면서 행복했던 순간은 밖으로 나오자 사라지고 말았다. 손을 내밀며 팁을 달라고 했다. 큰 돈은 아니라 내주기는 했지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겠구나 마음으로 다짐을 하게했다.

 

10개월의 훈련은 혹독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영어공부와 선교학 강의, 경건의 시간들그러나 이국적인 환경과 요리 등은 새롭고 흥미로웠다. 36명이 함께 하는 공동생활은 참 재미있었다. 부인선교사들은 식사준비에서 해방되어 배움에 정진할 수 있어 참 행복했다. 그러나 그 재미의 대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2-3개월이 지나자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져갔고, 삐그덕거리는 인간관계는 심심찮게 터져 나와서, 훈련생활에 경종을 울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했다. 부부들의 묶은 문제들도 하나하나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속살이 나왔다.

 

너나 나나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 벌어져 서로 상대를 보면서 나를 보는 거울이 되었다. 성직자(국내 목회 10-20년의 경력이 있는 분이 많아)라는 가면을 벗은 모습을 서로 바라보는 것은 훈련의 성과였다. 선교사 되겠다고 지원한 훈련선교사들의 자만심을 깨기에는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나이 들어 영어 공부하게 되어 얼마나 가슴이 부풀었는데 그 과정은 고행이었다(나이 탓). 그런 고행을 하면서 배운 영어가 일본에 와서는 녹이 슬어 지금은 영어로는 입도 뻥긋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어가 머리에 입력이 되면서 영어는 제 자리를 잃고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

 

필리핀 훈련 6개월이 되면 희망하는 선교국을 방문하는 과정이 있었다. 다른 선교사님들은 선교국에 대한 비전으로 마음을 설레고 있는데, 우리 부부는 그렇지 못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곳으로 샐 궁리를 남편은 은밀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일본에서도 비자를 내 줄 교단을 찾지 못해 연락이 오지 않은 터라 오지마라, 오지마라마음으로 빌고 있었다. 그런데 막바지가 되어 연락이 왔다. 그 때가 4월이었는데 일본은 아주 추웠다. 바바리 코트를 입고 왔는데 감기에 결려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를 맞이해 주신 이동은목사님 댁에서 머물면서 일본선교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실 일본목사님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일본기독교단 북총분구의 임원 목사님 3분이 이목사님 댁으로 오셔서 우리 부부를 인터뷰하기로 되었다 한다. 인터뷰까지 한다니 일본목사님들 대단하구나 생각이 되었다. 자기 돈 들여 선교 해주겠다는데 너무 많은 절차가 필요하지 않은가? 그 중 호리구치목사님은 자기교회에 초청할 예정이었다. 꽤 긴장되는 자리었다. 세분 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어서, 40대 초반인 남편을 젊은 목사라고 불러 주었다.

 

내게도 질문을 했다.

남편은 목사의 예의를 지키며 듣기 좋은 대답들로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을 시켰지만, 내게도 이상은 왜 일본을 선교국으로 택했습니까?”라고 남편과 똑 같은 질문을 했을 때 꽤 당황을 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리 속이 캄캄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평소에 생각했던 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는 일본을 선교국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동휘목사님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목사님은 바울선교회의 책임자로서 세계선교에 대해서는 곧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신 분이라고 믿기에 순종했습니다.”

 

저는 일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입장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들으며 배운 것으로, 일본인은 부지런하다, 정직하다, 깨끗하다, 검소하다 하면서 좋은 면을 말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 인데,

3.1절이나 8.15광복절 기념일이 되면 학생들이 학교운동장에 모여 기념식조례를 했습니다.”

그 때면 교장선생님은 어떻게 일본에게 이 나라를 빼앗겼으며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만세 3창을 불렀는데, 아버지는 목청이 터저라 소리를 높여 만세! 만세!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학생들도 똑같이 따라서 목이 터저라 만세 3창을 외쳤습니다. 어린 눈에는 그런 모습에서 일본에 대한 분노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각오가 보였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앙되어 목이 매였다.

 

그래서 나는 직접 일본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일본선교사가 된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일본을 사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제일 연세가 많고 북총분구장이신 목사님이 앉은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일본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머리를 숙여 사죄를 했다. 두 분의 목사님도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사죄를 빌었다. 돌발적인 사태에 나는 물론이고 남편과 이동은목사님 부부도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내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인터뷰의 합격 여부를 떠나서  내 마음은 시원해 졌다. 끝나고 나서 이동은목사님은 간이 졸여서 혼이 났다고 하셨다. 이 젊은 사모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겁이 났다고 했다. 어렵게 초청해 줄 교단과 교회를 교섭해 놓았는데 무산되는 것은 아닌지 진땀을 뺐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정도의 사죄도 받지 않고 내 가족이 이 나라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 날, 호리쿠찌목사님이 운영하는 유치원(1)과 보육원(2)에 방문요청을 받았다. 사모님이 교사 출신으로 교육사업에 전력을 다하는 분들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유아원 원장의 경험이 있었던 것을 관심있게 여긴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방문요청은 일본선교사로 초청해 줄 것을 허락하는 의미로 이동은목사님은 받아들였다. 호리쿠찌 목사님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최고의 접대를 해주었다.

 

시스이유치원과 보육원 2곳을 방문한 우리 부부의 소감은 대단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큰 시설을 3곳이나 운영이 가능한지 입이 딱 벌어졌다. 시설을 다 돌아보고, 마지막 막구와리 보육원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화장실에 좀 다녀 오겠다고 말을 하고 나섰다. 웬만한 초등하교 만한 시설이라서 두리번거리며 겨우 찾았다. 볼 일을 다 보고 나서 뒤처리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그 때(19년전) 이미, 일본에서는 세척기가 달린 변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세척기를 어떻게 사용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일본어로 쓰여있어 물을 내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할 수없이 그 중에 하나를 눌렀다. 그랬더니 작은 빨대 같은 호수가 쭈-욱 나오더니 물을 품어냈다. 물은 바닥에 흔근히 고이기 시작을 했고, 급한 나머지 또 하나를 눌렀더니, 호수는 방향을 약간 뒤로 하더니, 여전히 물을 품어냈다.

 

이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를 않아 닥치는 대로 눌렀더니 빨대 같은 호수가 쏘-옥 들어갔다. 바닥에 고인 물을 화장지를 뽑아 닦아 냈다. 변기 안에 티슈가 수북이 쌓였다. 어떻게 물을 내려야 할지 몰랐다. 물을 내리는 곳은 일반 변기와 똑같았다. 당황을 하니 보이지를 않았을 뿐이다. 그대로 두고 다들 모여있는 사무실로 돌아 왔다. 식사를 다 차려놓고는 나를 기다리느라 먹지도 않고 있었다.

 

화닥 화닥 거리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 계신 이동은목사 사모님이 왜 늦었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하고, 변기에 화장지가 가득 쌓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물었더니, 모르는 척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다. 변기가 막히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어 편하지를 못했다. 그 날 식사는 쓴 맛이었다. 얼굴이 뜨거워 들지를 못하고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고, 모두가 나만 보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었다.

 

일본 목사님 무릎 꿇게 한 벌을 톡톡히 받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본에서는 목사님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목회자들인데, 무릎 꿇게 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연세가 지긋하신 분을 젊은 종 앞에 무릎 꿇게 했으니 버릇없다고 혼내주신 것은 아닌지, 뒤돌아 본다.

 

1992. 4월의 일을 회상하며   

나리따에서 이인숙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