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산 증인인 조동진 박사의 삶을 다룬 '나의 소명, 나의 선교행전'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동진 박사는 한국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육(1961)의 창도자이며, 비서구세계 최초의 선교사 훈련과 연구기관인 '국제선교연구원'(1963, 훗날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을 설립했습니다. 또 '아시아선교협의회'(AMA)와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등을 창립해 비서구세계 선교계의 연합을 추진했으며, 서구와 비서구권의 선교가 만나 협력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최근 열린 '2010동경대회'에서는 故 랄프 윈터 박사를 대신해 대회 전체 주제강연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조동진 박사 관련기사)

jdj.jpg네 번째 부르심 : 세계 선교를 위한 공부

1956년 8월 전도와 선교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로드 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에 있는 바링턴 대학(Barrington College)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간 곳은 펜실베니아 주 포트워싱턴에 있는 WEC 선교부의 선교사훈련원이었다. 나는 또다시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 외곽에 있는 베다니 선교대학에 들어갔다. 내가 선교사 훈련과 선교연구의 방향을 잡은 곳이 베다니 선교대학이었다.

베다니 선교대학의 또 다른 이름은 베다니 선교사 훈련센터(Bethany Missionary Training Center)이다. 헤거 박사(Dr. Hegar)가 학장인 이 선교대학의 선교사 훈련프로그램은 세계 선교 운동을 '선교사 만들기'부터 시작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오전 네 시간은 학과공부, 그리고 오후 네 시간은 선교에 필요한 기술 훈련으로 계속되는 선교사 훈련방법은 훗날 '바울의 집'을 선교사 훈련센터로 운영하는 기초가 됐다.

나는 이곳에서 한 해 동안 세계 선교 교육의 기초공부를 마치고 보다 높은 수준의 선교 이론과 전도학을 연구하기 위해 선교교육을 하는 대학원 과정을 찾아 나섰지만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미국 신학교에는 선교학으로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는 신학교가 없었다. 그러던 중 켄터키 주 애즈베리 신학교에서 선교와 전도학의 대학원 과정을 시작한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켄터키 주의 아주 작은 도시 윌모어에 있는 애즈베리 신학교 대학원에서 전도와 선교학을 연구했다.

나는 콜만(Robert E. Coleman) 교수 밑에서 전도학을, 시맨드(J. T. Seamand) 교수 밑에서 선교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매바이스(Maivise) 교수 밑에서 교회행정학을 연구하고, 선교역사학자 쉽스(Ships) 교수 밑에서 선교역사를 연구했다. 그리고 선교학 전공 신학석사(Th. M. in Mission)학위 과정을 마쳤다.

그 후 1960년부터 1978년까지 서울의 후암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그 교회를 한국의 세계 선교를 위한 중심 교회로 발전시켰다. 후암교회는 해방 후 1946년에 북한에서 월남한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후암동 피난민 수용소에서 시작됐다. 창립 당시 담임목사는 같은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김예진 목사님이었다.

나는 1960년 유학이 끝날 무렵 후암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부임하자마자 나는 후암교회의 창립목사가 내가 열일곱 살 되던 1941년에 입교식을 해주신 김예진 목사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이 교회로 보내신 성령님의 부르심에 놀랐다. 김예진 목사님은 6.25 전쟁 중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끝까지 후암교회를 지키다가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하셨다. 그 분은 진정한 의미의 순교자였다.

교회는 불타버린 적산가옥을 임시로 뜯어고쳐 지은 허름한 가건물이었다. 지붕은 널판지로 덮고 그 위에 콜타르를 뿌려 비가 새지 않도록 했는데 비만 오면 이곳 저곳에서 사정없이 비가 쏟아지던 허름한 교회당이었다. 그것도 적산가옥 임대료를 몇 해나 내지 못해서 거주권과 사용권이 없어진 가난한 교회였다. 교회 빚이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인 300만 원이 넘었고, 나에게 약속된 생활비는 8만 원이었는데 그것도 주일마다 모아지는 대로 얼마씩 주곤 하는 질서 없는 교회였다.

나는 이 교회를 '전도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하나님의 복음의 청지기로서 충성스러운 교회'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교회 갱신과 발전의 계획을 세웠다. 예배 참석 교인이 100여 명, 총 교인수가 150명 정도이던 작은 교회가 3년 후에는 350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그리고 밀렸던 교회 임대료를 완납하고, 정부에서 불하를 받아 교회의 기본 재산을 확보했다. 그리고 교회대지와 주변 땅 500여 평을 사들여 교회 터를 넓혀나갔다.

부임한 지 2년 반만인 1963년 3월,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교회 건축 기획은 나와 서울대학교 공대 건축과 출신의 건축 전문가 김정철(권사의 아들로 당시 학습교인이었고 교회 건축 후 집사로, 그리고 몇 년 후 장로로 장립을 받고 대한민국 대표적 건축가로 코트라와 코엑스, 인천공항 건설의 주역이 된 인물)이 함께 여러 달 동안 교회 건축 이론과 건물 구조를 연구해 세웠다. 당시로서는 한국 최초의 성전다운 아름다운 교회를 착공한 지 9개월 만에 완공했다.

이 새로운 성전으로 신도들이 모여들어 단번에 1,000여 명이 넘는 장년 신도들을 가진 교회로 급성장했다. 나는 이 교회를 '모든 민족에게 전도하는 교회'로 만들라는 성령의 강권적인 부르심을 또 한 번 받고, 1964년 3월 '국제선교연구원'이라는 아시아 최초의 선교대학원을 설립해 신학교 출신 10여 명을 첫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교회 부임 7년이 되는 1966년부터 1967년 말까지 한 해 동안 미국으로 선교학 연구를 위한 두 번째 유학을 떠났다. 나는 1년 동안 모교인 애즈베리 신학교 대학원과 버지니아의 아메리칸 대학교 교회행정연구소에서 선교학과 교회행정학 연구를 계속하고 귀국했다.

나는 이어서 1968년 국제선교협력기구(Korea Evangelistic Inter-Mission Alliance/KEIMA)라는 선교단체를 조직했다. 이 국제선교협력기구는 미국 선교지도자들의 제안으로 1970년부터 영어 이름 'Korea International Mission/KIM'으로 간단하게 부르게 됐다. 이것이 한국교회 최초의 초교파 신앙선교단체였다. 나는 1968년 이후 후암교회뿐만 아니라 선교운동에 동참하게 된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세계선교부흥회'를 해마다 개최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후암교회에 부임한 다음 해인 1961년에 장로회총회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정규 필수과목으로 설치케 하고, 이어서 감리교신학교와 성결교회의 서울신학교에서도 전도학과 선교학을 강의함으로써 한국 신학교에서의 선교학 교육의 창도자가 됐다.

나는 이어서 1964년 설립한 국제선교연구원(International School of Mission)을 1973년부터 동서선교연구개발원(East-West Center for Missions Research & Development)으로 확대 개편해 비서구 세계 최초의 선교사 훈련과 연구기관으로 만들었다. 이 연구원은 1999년까지 1,500여 명의 아시아 선교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나의 선교학 연구는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에 있는 월리엄 케리 대학교로 이어졌다. 나는 그곳에서 랄프 D. 윈터 박사와 데일 W. 키츠맨 박사 밑에서 세계 선교 역사와 선교전략을 연구하고 국제개발학 철학박사(Ph. D. in International Development) 학위를 수여 받았다.

조동진 박사 (조동진선교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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