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가방을 가지고 있다. 그 가방은 우리의 삶과 항상 동행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방을 삶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까지 가지고 왔었던 가방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그 가방을 찾아야 한다. 잊혀진 가방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인,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존재하는 가방(삶의 목적). 그 가방을 잊어버린 현대인들에게 가방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다큐멘터리가 바로 “잊혀진 가방”이다. 본지는 기독 다큐멘터리 “잊혀진 가방”의 감독과 두 주연배우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이 때까지 제작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한 점들에 관해 인터뷰한 내용을 지난 회에 소개했고, 이번 회에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선교사들의 소개를 전한다. (사진 : 파이오니아2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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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로즈비어(Helen Roserveare, 영국 북아일랜드)

1.JPGHelen Roserveare는 1925년 영국의 지체 높고 존경받던 콘월 Cornwall 가문에서 태어났다.  Helen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작위를 수여 받았는데 매우 명성이 높은 수학자였으며, 자녀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Helen은 12살 때 여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캠브리지에 들어가 의학 학위를 취득했다.  Helen은 캠브리지 대학교 1학년 때 회심을 하여 영국 가톨릭교회로부터 복음적 교단으로 옮겼다. 숙부와 이모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선교사가 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Helen은 1953년 선교사가 되어 콩고로 떠났다. 콩고에 도착한 Helen은 의료봉사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의사가 하루 종일 일을 해도 환자들의 요구에 다 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Helen은 훈련학교를 세워 기초적인 의료기술과 성경을 간호원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을 각 마을로 파견하여 가르치거나 치료를 하게 만들로 평신도 전도자로 봉사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간호사 훈련은 선교사역이 아니라고 하는 동료선교사들의 반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elen은 콩고에 도착한지 2년 후 이밤비 Ibambi에 병원 겸 의료훈련학교를 세웠는데 첫 졸업생 4명이 모두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 직후 병원을 나환자촌이 있는 네보봉고로 옮기라는 지시가 있어 거기로 가서 또 하나의 병원을 세우고, 간호사 훈련을 계속하였다.

1958년 안식년을 맞아 본국에 돌아가 선교사를 잠시 탈퇴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Helen은 1960년에 콩고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이 때 오랜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시기여서 외국인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Helen은 끝까지 선교지를 지키기로 하였다. 심바족 반란군이 신정부에 대항하는 중에 선교사들이 수난을 당하였다. 1964년에는 드디어 유혈 내전 사태에 빠졌는데, 8월 15일이 되자 반군이 네보봉고의 병원과 선교사의 집이 군인들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10월29일 반군이 선교사 촌을 점령하였을 때의 상황을 Helen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 발을 잡고 거꾸로 끌고 가서 머리와 어깨를 난타하고 땅에 팽개치고는 다시 발길질을 했다. 깨어진 안경은 간곳이 없었고, 온 몸은 상처로 고통스러웠으며, 이빨을 얼얼하였고, 입안에는 피가 가득 찼다. 뭔지 모를 두려움과 말 못할 공포로 의식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는 가운데 그들은 나를 끌어다 놓고 저주와 욕설을 한바탕 퍼부었다.” 전기에 의하면 “침대에 거꾸로 눕혀 묶어 놓았다……. 그녀는 울부짖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인정사정없이 동물 같은 기세로 여성이 감당하기 어려운 모욕과 폭행을 자행했다.”

또한 그와 친분이 있었던 선교사들의 순교를 직접 보게 된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Helen은 그날 밤 당한 무서운 폭행을 통해 뒷날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사역을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깊은 영성이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일을 당하고도 하나님을 저버리거나 영적인 정결함을 잃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1964년 12월 31일 Helen은 석방이 되어 영국에 돌아갔으나 동역자들과 현지인들의 가슴 미어지는 편지를 읽고 1966년 3월에 콩고로 돌아가 의료선교사로서의 일과 현지인 훈련의 일을 하였다. 20년간의 콩고 사역을 마치고 1973년 Helen은 아프리카를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기독교 선교의 시급함과 필요성을 외치는 국제적인 강연자가 되었고, 저술과 강연으로 남은 생애를 주님께 드리고 있다.

아직도 네보봉고에는 Helen의 사역 흔적이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 그녀를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있다. Helen은 떠났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그녀의 열정적인 사역이 네보봉고 사람들을 희망의 세계로 인도했다고 볼 수 있다.

필립 & 낸시 우드 (Philip & Nancy Wood, 콩고민주공화국 버니아)

2.JPGPhilip & Nancy Wood는 결혼과 동시에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필립은 영국인 이었고 그는 캠브리지 의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의 아내인 낸시 우드 역시 캐나다인으로 유능한 의사이다. 남편은 외과의사이고 아내는 가정의학과 의사이다. 그들이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버니아에서 병원 사역을 하고 있다. 버니아는 매우 위험한 지역이다. 오후 5시 이후에는 외부출입을 통제하는 상황이 전개될 정도의 치안이 부재한 상황이며 내전의 후유증으로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캐나다에서 선교사 디렉터로 있었던 그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그리스도인의 타자성을 실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2002년 죽음에 직면한 필립의 놀라운 간증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

1972년 그들이 남겨놓은 가방을 우리는 38년 만에 영국에서 확인하고 열어본다. 과연 그곳에 무엇이 들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지나간 삶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아이사 아더(Isa Arthur, 서부아프리카 기니비사우)

스코틀랜드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Isa Arthur는 거대한 일을 해 냈지만 조용하고 겸손한 인물이다. Isa Arthur는 1956년부터 기니비사우에서 선교사로 있었다. 2001년 은퇴이후에도 여전히 기니비사우에 남아서 섬 지역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끄레욜 성경을 주석하고 있다. Isa Arthur는 1924년 10월 10일에 214 Torbothie라는 장소에서,  7자녀중의 한명으로 태어났고 그 후 그 가족은 클라이드 드라이브로 이사했다.

Isa Arthur는 학교를 졸업한 후 지역공동체의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간호사 일을 위해 그 곳을 떠났다. Isa는 Belvidere Fever Hospital, Glasgow Royal Maternity Hospital에서 일했고 the Victoria Infirmary에서 대표수녀의 자리에 올랐다.  

Isa Arthur는 하나님께서 포르투갈-기니에서 사역하게 부르셨음을 느꼈다. 1953년에 그녀는 이 일을 준비하기 위해 Glasgow Bible College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런던에서 선교사 오리엔테이션 과정과 대학에서 어학 코스를 계속 밟았다.

3.JPG1956년 11월 Isa는 마침내 포르투갈어 기니에 도착했고 Bijago 군도지역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녀의 주된 작업은 성경을 Bijago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가 충분히 큰 작업이었지만, 맨 처음 그녀가 해야 했던 일은 구두 언어를 줄여 기록하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번역작업을 하는 동시에 군도지역에 있는 나병을 포함한 보건 진료소를 운영해야 하는 책임을 졌으며, 동시에 미션하우스에 기거하는 고아소년들의 교육과 보육도 해야 했다. 나중에 Isa Arthur는 공식적으로 파파라는 이름의 8살 난 남자아이를(그의 양부모에게 양육을 거절당한) 입양했다. 파파는 지금 행복하게 결혼했고, Isa Arthur와 함께 살고 있다.

16년간의 고통스러운 작업 후, 많은 수정과 증거 보완을 통해 Isa는 신약 과 구약을 Bijago어로 번역한 것을 성서공회에서 인정받고 출판을 하게 되었다.

1974년에 기니비사우에서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그쳤다. 식민기간 중에는 포르투갈어가 '공식'언어였고 끄레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었다. 이 끄레욜 언어는 보편적인 사투리로 모든 포르투갈어 기니 전역에서 이해 가능한 언어였다. 이름 역시 포르투갈-기니에서 기니비사우로 변경되었다. 아프리카 정부 하에서 끄레욜이 기니비사우 전역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Isa Arthur는 그 후 본토로 옮겨 성경을 끄레욜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 하였다.

1989 년에 신약 성경이 출판되었고, 1998에 그녀는 전체 성경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Isa는 1998년 기니비사우의 내전 중에도 성경을 번역하는 일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을 중지하지 않았다. 현재 기니비사우에 있는 케빈 클라키의 말을 인용하면 Isa Arthur의 집은 바로 군 부대 옆이었고 내전당시 수많은 폭탄이 터졌지만 Isa Arthur는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아직도 87세의 Isa Arthur는 기니비사우에서 하나님의 일을 지속하여 섬기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그녀의 일생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고 봉사하였다. Isa Arthur의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녀의 옷장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녀는 일생 동일한 소재와 스타일의 드레스만을 입었고, 그녀의 재물은 오직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졌다. 이 여인은 평생 진흙 오두막에서 살았다. 지금도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햇빛에 의지하여 성경 번역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Isa Arthur는 특히 야생의 카누로 수백 마일의 바다를 건너야 했으며, 그녀의 개인적 안전은 아랑곳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그녀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 그 자체였으며, 자기희생으로 타인에 대해 섬기는 그 자체였다. 여기에 사랑스러운 미소와 약간의 유머까지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진정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인응 (서부아프리카 기니비사우)

4.JPG화가가 꿈이었던 이인응 선교사는 아내 이순환 선교사(54)와 함께 89년부터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에서 20여 년간 활동해 오고 있는 선교사. 92년부터 아프리카문화선교회에 소속돼, 밀리따르 지역에 바이로 밀리따르 교회와 만사바 교회를 개척, 7개의 교회학교와 350여명의 학생을 교육시켰다. 1998년에는 기니비사우의 내전이 악화되어 인근 세네갈에 피신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기니비사우에 방문, 개척교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헌신했다.

특히 이인응 선교사는 선교현장에서 딸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았다. 20세의 딸 두제가 2004년 세네갈 수도 다카에서 불의의 택시 강도를 당한 것. 그러나 단순한 택시 강도로만 생각했던 딸 아이의 죽음이 선교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조명된다.

이인응 선교사는 평신도 사역자로서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현지인을 가르쳐서 사역자로 양성하고 그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워 가는 전형적인 모범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 선교사의 삶은 결국 오늘 날 우리가 어떻게 전도와 선교를 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스파포드는 네 자녀가 여객선 침몰로 죽는 비극 속에서 ”내 평생 가는 길“을, 시력을 잃은 크로스비는 그 고통 속에서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를 썼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축복의 증거입니다. 이인응 선교사님이 그린 그림. 이 기적 같은 일은 하나님 살아계심의 증거입니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글)

또한 이인응 선교사는 화가로써 딸의 죽음을 추모함과 동시에 자녀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아프리카 지역 한국인 선교사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아프리카 인물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2009년 언더우드상 수상자 이기도하다.

에반 데이비스 (Evan Davies, 호주 애들레이드)

5.JPG71세. 그는 한 선교단체의 리더였다. 부모님이 모두 선교사였고 그의 집안배경에는 선교사가 많이 있다. 매우 인자한 사랑의 성품을 소유하였으며 그가 리더로 있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을 보는 것 같다.”
“그는 우리들이 정말 힘이 들었을 때 이곳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었다.”
“그는 우리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왜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지 스스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Ivor Davies는 콩고 선교사였고 아프리카 선교의 절대적 영향을 주었던 C.T Studd가 1931년 콩고의 이밤비에서 사망하였을 때 그의 후임으로 1932년 떠났다. 그의 가방을 주인공들은 Evan Davies와 함께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