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G테크놀러지
고등학교 졸업 후 저는 기도원에 가서 큰 은혜를 받고 결심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겠다.' 하나님께 제 인생과 모든 것을 맡기고 살고 싶었고, 그런 제게 누군가는 "신학을 공부해보라"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전경이던 우리는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실을 갖추고 있는 구로경찰서로 갔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4명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소리 내서 기도하다가 행인들로부터 "경찰서에서 기도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중대장님은 믿지 않는 분이셨는데도, "너희들이 기도해줘서 좋다"고 좋아해 주셨습니다. 순복음전도교회의 한 집사님(현 장로님)은 빵을 잔뜩 가져다주시면서 부대원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이런 선한 분들을 통해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님 앞에 날마다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80년대 후반은 우리 모두가 아픈 시대였습니다. 시위하는 이들과 동기, 친구들을 붙잡아야 하는 전경들도 몸과 마음이 힘든 시대였습니다. 시위 현장에 투입됐다가 부상을 입는 경우가 흔했고, 경찰병원에 입원했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하루는 시위 현장에서 고참이 화염병을 완전히 뒤집어썼습니다. 급히 소화기로 불을 끄고 살펴보았는데 모자에 맞아서인지 크게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화염병 때문에 심한 화상을 입고 죽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부대원 모두가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도하는 저와 동료들은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철거민 현장에 가면 마음이 또 그렇게 아팠습니다. 한번은 봉천동, 사당동의 철거민 집을 강제철거 하러 갔습니다. 우리가 가면 봉지가 날아옵니다. 봉지 안에는 배설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걸 뒤집어쓰는데도 밉지 않았습니다. '오죽 힘들면 저렇게 할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습니다.

회사 사장이 월급을 안 주고 도피하는 바람에 국회 앞에서 월급을 달라고 시위하는 직원들을 막던 적도 있었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시위를 진압해야 하는 상황은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1980~1990년대 초까지 130여 명의 부대원은 거의 다친 곳 없이 제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작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고, 기적을 일으키셨다고 확신합니다.

김신기 3G테크놀러지 생산부 부장
▲김신기 3G테크놀러지 생산부 부장
이런 큰 은혜의 세계를 경험했음에도 탕자로 살던 저는 3G테크놀러지에 입사한 후 믿음 생활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회사 후배와 함께 교회에도 찾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척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같이 타고 가던 친구는 죽고 친척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습니다. 사고를 수습하며 저는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열이 나고 근육이 아픈 것이 독감인 줄 알았습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감기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응급실에 실려 가 피검사를 해보니 유행성 출혈열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병이었는데, 계속 감기인 줄 알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계속>

김신기 3G테크놀러지 생산부 부장(5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