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한 풍선, 우리는 왜 풍선을 북한에 띄우나?>


간단히 말하자면, 평화는 지극히 평범한 한국 사람들만의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소통에 있어 시중들어 줄 보호자가 필요 없으며, 서로를 다시 소개해줘야 할 필요도 없다. 남한과 북한의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를 향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남한과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유대감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남북 정부가 (전쟁으로) 서로를 날려버리지 않겠다고 서약한다면, 평범한 한국 사람들은 이 평화를 이룩하는 핵심적인 과정, 즉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성취하기 어려우며,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이 작업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것이다. 이것은 남한과 북한이 공유하고 있는 유교 문화의 유익 중 하나이고, 인공적인 방해물(정부가 만들어 놓고 유지하고 있었던)이 제거되었을 때 작동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본능 중 하나이다.

이 글은 로널드 레이건이 서독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이 장벽을 허무시오” 라고 말한 것처럼 말로 평화를 이루자는 순진한 제의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적어도 한번은 이 순진한 제의로 평화가 일어났지만 말이다. 대신, 이 글은 정부의 노력을 그저 지원하기보다, 우리가 무언가를 함으로써 평화를 이루려는 정부의 역할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정부가 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정부가 우리에게 평화절차에 참여하는 자신들만의 방법을 알려주기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 사실 평화라는 총체적 목표에 가장 존경을 표할 방법은 우리 각자가 평화를 위한 우리만의 독특한 개인적 기여를 하는 것이다. 정부는 우리의 기여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들만의 평화협정절차에 딱 들어맞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진정한 평화는 수많은 관중이 함께하는 스포츠도, 일방적인 노력도, 차례로 공연되는 3막짜리 연극도 아니다. 진정한 평화는 정부가 협상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인식하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발발하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말이다. 전쟁이란, 우리 몸 안의 장기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이 사회에서 기능하는 각 장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파손된 상태이다. 이처럼 진정한 평화도 어떤 한 장기의 단독적인 제어와 조직화가 만들어낼 수 없는, 사회 각 장기의 동시다발적인 회복을 의미한다. 각 장기는 평화를 이루는데 있어 각자의 독특한 역할을 가지고 함께 기능하고 있다. 또한, 평화협상과정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 평화야말로 그 어떤 하나의 장기가 혼자서 이루어 낼 수 없는, 그 어떤 장기도 앞장서서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히 겸손해야 하고, 이 과정이 일어날 수 있게 충분히 지혜로워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평화가 하나님의 때에 비공식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그러나 당신이 가진 신앙의 배경과 관계없이, 평화는 정부로부터가 아닌, 한 사회 전체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역사가 보여준다. 그 누구도 이것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대통령들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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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교자의 소리 공동설립자이자 CEO인 에릭 폴리 목사(우)와 대표 현숙 폴리 목사(좌). ⓒ한국 순교자의 소리
우리 순교자의 소리가 풍선에 성경을 실어 날려 보내는 이유는 북한 주민들을 전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평화협상 과정에 기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우리는 북한 주민 개개인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다른 평가 기준을 발전시키려는 북한 지하교인들의 노력을 지원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각자가 정부에 충성스럽고 유용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형상, 즉 정부로부터 승인될 수도, 보류될 수도 없으며, 양도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심스럽게, 북한 주민들의 언어로 된 메시지이자 북한 정부가 번역하고 보호하는 이 메시지를 북한으로 날려 보내 왔다. 남한 정부의 법(그리고 처벌)에 온전히 따르며,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에도, 천안함 사건 때에도, 제1연평해전 때에도 우리는 이 메시지를 날려보냈다. 그러나 북한 내에, 그리고 북한 주변 지역에 있는 다양하고 널리 퍼져있는 우리의 연락망이 쉽게 증명해 주듯, 평범한 북한 주민들에게 다다른 이 성경책들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삶의 의미와 용서, 그리고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기독교인들은 아마 남북 정부가 꿈꾸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를 상상하겠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평화적인 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부의 평화협상 절차가 강화되고 보호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풍선을 날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말하자면, 이런 평화적인 노력에는 평화 시위 또한 포함된다. 역사를 보면, 이런 평화 시위는 스포츠 및 문화교류, 대륙 간 철도건설을 위한 계획만큼 시민 사회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유지해주었다. 풍선을 날리는 대북단체들의 전단 내용이 가끔 과장되고 투박할지도 모르나, 이 전단을 “대북전단”, 즉 북한에 반(反) 하는 전단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애석하게도 중립적이라고 알려진 세계적인 뉴스들이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모든 북한 주민들을 그들의 지도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이들을 정치적 논쟁거리로 삼는 지독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남북 관계의 이러한 정치 이슈화는 분명 평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아니면, 적어도 이러한 정치 이슈화를 극복하는 것이 평화를 이루는데 가장 큰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풍선을 날리는 사람들은 남한과 북한의 정부가 계속 유지해온 장벽을 극복하고 평범한 남북한 사람끼리 서로 직접 대화하기 위해 풍선을 날린다. 평범한 이들이 DMZ를 만든 것이 아니다. 정부가 만든 것이다. DMZ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평범한 이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이것은 평범한 이들이 정부를 지나치게 믿고, 정부에게 지나치게 맡겼기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평범한 남북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정치적 논쟁거리로 되었음을 DMZ는 보여준다. 이렇게 정치 이슈화가 되고, 심지어 변경된 형태(즉, 세심히 관리되고 연출된 행사나 교류를 통해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으서 상호작용하는 형태)로 유지되는 평화협상 과정은, 최악의 경우에는 실패할 것이 뻔하고, 기껏해야 한 민족으로서 인간으로서 가족으로서 서로 직접 소통하는 것이 평화라고 주장하는 남북한 사람들에게 어느 시점에 전복될 것이 분명하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그의 시 ‘담장 고치기’에서 “담장을 싫어하는 무엇이 있어, 그 아래 언 땅을 부풀게 하여…”라고 썼다. ‘그 아래 언 땅을 부풀게 하는’ 인권단체의 전단지들은 때로 보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그 담을 부순다. 특히, 그 담장이 담장 반대편에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게 한다면 말이다.

남북한 정부는 평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지만, 평화를 이뤄내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우리의 수단들을 정부가 독점하게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주기적으로 평화협상 절차를 위해 노력하기 전이든, 노력하고 있는 중이든, 아니면 노력한 후에라도 말이다. 남한과 북한의 정부는 평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겠지만, 문화 평론가인 앤디 크로치(Andy Crouch)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치 기구들이 혼돈의 심연으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구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요즘 북한 정부는 남쪽으로 풍선을 날리지 않는 것 같다 (이맘때의 날씨도 풍선을 날리기에 좋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일본과 미국에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평화협상 과정이 무산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없이 말이다. 이처럼 남쪽에 사는 우리도 북쪽으로 날리는 전단들이 우리를 전쟁 직전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신, 우리를 훨씬 더 괴롭히는 무언가를 걱정해야 한다. 질문은 이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65년이 지났건만, 우리 스스로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과 방법, 심지어 이산가족 문제까지도, 그것들을 처음부터 우리에게서 앗아간 정부에게 맡기지 않는 법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으니 말이 되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