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자의 소리는 한국 초기 교회 순교자들이 전했던 말씀과 설교를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 쇠퇴의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11월 22일부터 매주 화~금요일 새벽 6시 정릉 고가도로 아래에서 ‘언약 갱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예배를 드리는 정릉 고가도로 밑은 한국 초기 기독교인 교사인 김교신 선생이 매일 아침 한국을 위해 부르짖은 장소다. 본지는 한국 순교자의 소리 공동설립자이자 CEO인 에릭 폴리 목사의 언양 갱신 예배에 관한 기고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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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남한 교회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다수의 문제가 힘들게 얻었던 한국 초기 기독교인들의 ‘불로 연단한 금’을 한쪽으로 미뤄두고, 그 자리를 한국 전쟁의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받았던 미국 기독교인들에게서 받아들인 새로운 신학적 값싼 보석과 장신구들로 대체해버린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오늘날 남한 교회의 거대한 건물과 엄청난 위엄, ‘아름다운 기독교’는 한국의 초기 기독교인들의 이상을 실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각한 것이다. 이제 현대 남한 기독교는 서 있는 곳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든 간에 내부에서부터 녹이 슬며 허물어지고 있다. 그들 다수는 우리 세대에서 그 존재를 다 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남한 목회자들은 남한 교회의 급격한 쇠퇴를 여전히 부정한다. 또 다른 목회자들은 계속 해외에서 해답을 찾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아직 배우지 못했던 것을 찾아냄으로써 해답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때는 알았으나 이제는 잊어버린 것들에 새롭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한국 초기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던 것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상이 북한과 전 세계 다른 폐쇄적인 국가들의 지하교인들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지난 15년간 이러한 성도들을 섬기면서 우리는 그들의 삶이 어떻게 현재 남한 기독교보다 훨씬 더 한국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실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를 보아왔다. 그것이 바로 북한과 다른 폐쇄적인 국가들의 성도들이 기독교인이 된 이유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닌 이유이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된 이유는 세상에 대하여 죽고 진리를 위해 살기 위함이며, 이것이 곧 ‘순교자’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한국의 초창기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오래전 존재했던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제자 훈련을 ‘하늘의 컨테스트를 대비한 훈련’이라 정의했다. 즉,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고난을 감수하는 그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의 몸과 혼과 영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들은 세 가지 종류의 순교를 세 가지 색깔로 구별하여 이야기했다. 녹색 순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흰색 순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어머니요 형제라 말씀하신 대로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빨간색 순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내려놓는 것을 뜻하며, 이는 녹색과 흰색 순교와 정도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종류의 순교가 아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인들이 순교의 색깔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 것,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첫걸음으로써 모든 기독교인에게 요구되는 것들임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기독교인들에게 이 사실이 진리인 나라에서는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 이 진리가 무시되거나 단지 영적인 것으로 해석된 곳에서는 교회가 쇠락하고 있다. 그러니까 남한에서 교회가 쇠퇴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북한에서 기독교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개 자신이 보다 더 행복해지는 데 집중하고 있는 남한 기독교인들보다 순교에 초점이 맞추어진 북한과 세계 다른 곳의 지하교인들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남한 기독교인들이 북한과 전 세계 지하교인들로부터 녹색과 흰색 순교를 배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아내와 나는 한국 순교자의 소리 단체를 설립했다. 주님은 이제 우리가 남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한국 초기 기독교인들로부터 녹색과 흰색 순교를 배우도록 돕는 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남한 목회자들이 미국 기독교인들에게서 교회 쇠퇴의 해결 방안을 찾기를 원한다면, 미국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한국의 선조들의 목소리, 즉 김교신, 안창호, 조만식,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김치선, 이성봉,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김정준, 남궁억 등 한국 초기 교회의 녹색, 흰색, 빨간색 순교자들의 목소리에서 그 답을 찾으라고 말하겠다. 나는 매일 먼지 앉은 역사책과 희미해진 사진을 펼쳐서 그들의 말을 전하고 위성, AM 라디오, 단파방송, SNS를 통해 방송하면서 그들의 소리가 북한과 남한과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 동남지방과 이민자들에게 들려지도록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한국어를 배우고 있지만, 목사인 나의 아내도 내가 이와 같은 매일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궁극적으로 남북한 교회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모든 한국인이 매일 이 메시지를 듣고 묵상할 수 있도록, 다른 한국 기독교인들도  ‘순교자의 소리’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을 도와주기를 기도하고 있다. 한국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의 말씀을 조사하고 녹음 및 방송하며 전하는 일에 자원 봉사로 우리와 함께 함으로써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소리가 다시금 매일 들려지고, 우리 일상의 대화를 형성하며, 진정한 한국 기독교를 회복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며, 이 나라 역시 변화시키는 것이다.

나는 매일의 이 ‘순교자의 소리’ 메시지를 나누는 형식이 바로 언약 갱신 예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특별한 유형의 예배로,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일 년에 한 번, 보통은 새해 첫 날에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세례에서 주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성만찬을 통해 그 언약을 갱신할 수 있도록 만든 예배이다. 하지만 언약 갱신 예배는 웨슬리교파 만의 예배가 아니다. 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개신교 교회들은 모든 기독교의 예배가 언약 갱신 예배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으며, 그에 맞춰 자신들의 주일 예배를 구성하고 있다.

순교자의 소리의 매일 언약 갱신 예배는 다음과 같이 드려진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세례에서 주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한다. 바로 매일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죽기로 했던 언약이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우리 삶의 매일 매일을 녹색과 흰색 순교자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서 고난을 감수하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기 위한 주된 도구로 우리의 돈이나 기도가 아닌 우리의 몸을 사용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한국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 중 한 사람의 말씀과 설교를 듣는다. 그들에 대한 소개나 해설, 역사적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 순교자의 소리를 역사에 관한 호기심으로 만나지 않는다. 그 대신,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일에 관해 말씀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살아있는 말씀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함께 성만찬에 참여한다. 이 성만찬의 식탁에서 순교자들은 우리와 함께 임재한다. 그들은 죽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순교자들과 함께 한 몸이 되는 우리의 언약을 갱신한다. 이는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과 주님, 우리가 다니는 지역 교회만이 아니라 그 순교자들에게도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한국 교회에 속해있다. 이는 우리 시대나 취향에 맞게 정의하거나 바꾸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전에 존재했던 모든 한국 기독교인들과 앞으로 우리를 뒤따르는 한국 기독교인들까지 책임져야 한다. 가장 특별하게는 한국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이 충실하게 받아서 우리에게 전해주었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의무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아침 6시, 정릉에 있는 고가도로 밑에서 이뤄진다는 사실에 어떤 이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 장소는 위대한 한국 초기 기독교인 교사였던 김교신 선생이 사랑하는 한국을 위해 매일 아침 부르짖었던 바로 그 장소이다. 당시 이곳은 높게 펼쳐진 암벽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폭포가 떨어지며 깨끗한 산골짜기 시내가 빛나던 편평한 바위였다. 김교신 선생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날씨가 춥거나 기막히게 좋은 눈 녹는 봄날에나, 매일 아침 그곳에서 기도들 드렸다.

오늘날 이 지역의 풍경은 그때보다 훨씬 못하다. 한국의 경제력과 매시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만있지 않는 문화의 상징처럼 말이다. 밤낮으로 자동차들이 머리 위에서 굉음을 내며 질주하고, 덜컹거리는 버스와 트럭들이 잇따라 지나간다. 마치 그 우뚝 솟은 콘크리트 건물 아래서 김교신 선생의 기도는 고요해지고, 한국을 위한 그의 부르짖음은 거부당하며, 그의 이상(理想)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속임수일 수도 있다. 그 고가 도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덜 영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김교신의 목소리, 그리고 모든 한국 순교자들과 전 세계 모든 기독교 순교자들의 소리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다짐하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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