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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많은 사람이 열등감에 대하여 알고 있는 줄 착각한다. 정작 본인은 어떤 열등감이 있는지 모르면서 열등감 이야기만 꺼내면 버럭 화를 낸다. 자기도 모르는 감정의 특성 때문에 힘들어하지만 결국은 열등감에 사로 잡혀있음을 의미한다.

우상의 제물을 비롯한 모든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아는 척한다. 무식하면서도 유식한 척 한다. 신구약 성경을 달달 외우는 것 같지만, 지극히 일부적인 이야기만 알뿐이다. 신학적인 지식은 고사하고 신앙의 근본적인 구원관과 관련된 내용도 10분 정도 설명하라고 하면 그 시간을 채우기란 절대 쉽지 않다.

추석이나 설 명절만 되면 온 집안 형제가 모인다. 평화가 전쟁으로 치닫기도 하는데, 제례의식 절차 때문이다. 절을 하지 않고 예배하는 이들과 절을 당연히 해야 하는 이들의 갈등이다. 조상들께 절하는 자체를 우상숭배로 보느냐, 부모를 우상으로 보느냐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사전에 협의하고 모처럼 모인 날에 조용하게 서로 생각과 의견을 존중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 제사상을 차리고 절하는 문제로 형제간에 다투는 것보다 생전에 한 번 더 찾아 뵙는 것이 좋은 일이다.

자신의 신앙에 익숙해지면 내가 가진 지식이 전부인 양 으슥하지만, 그 자체가 우쭐해 보이려는 교만이다. 교인들 간에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데 정작 처음 오는 자는 그렇지 않다. 그들도 제아무리 우쭐하고 싶어도 적응기간이 필요하고 상대를 파악하는 최소의 시간적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교회생활을 좀 알고, 신앙의 특별한 체험을 하거나 오랜 기간 봉사를 도맡아 하면서 간증 거리가 꽤 있는 사람이 교만하기 쉬운 것이다. 큰 교회에서 하는 차량 봉사가 순수한 의미도 많지만, 특정 직위나 고위층에 있는 사람이 장로나 권사가 되기 위해 나를 알아봐달라는 얼굴 내밀기식의 봉사가 될 때도 그렇다. 표를 얻기 위한 봉사는 결국 철새정치인의 행위에 불과하듯 교회 안에서도 자기만족으로 봉사하고 신앙하는 행위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언제 교만할까? 뭔가를 알만할 때이다. 뭔가 가졌다 싶을 때이다. 내세울 것이 있기에 교만하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데 교만한 것은 허언증이나 허풍이나 허세이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정확하다.

교만한 마음은 끝이 없으며, 또 다른 교만을 낳으며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이루고 또 이룰 때까지 교만하기에 중간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마음속에 교만이 싹트기 시작할 때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절대로 오래 일어서 있을 수가 없다. 열등감의 부정적인 형태가 교만으로 둔갑한 것인데, 내가 잘났음을 외치고 있지만 실은 열등감의 한 형태일 뿐이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익숙해지는 것은 당연한데, 그것이 자신만의 지식인 줄 안다. 지식과 익숙함은 다르다. 교회생활에 달인이 된 사람들은 성경 지식은 없고 종교적 생활에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결국 ‘교회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우를 범한다. 오랜 신앙생활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이 많아진 만큼 성경 지식과 신학 지식으로 차곡차곡 채워질 때 영적으로 성장하고 신학적으로도 가치를 정립할 수가 있다. 교회에 몇 년째 다니는 것으로만 자기 열등감의 표출로 교회 시어머니가 된다면 상대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c13.jpg믿음의 본질과 신앙생활의 년 수를 자랑하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오래된 사람일수록 신앙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교만하지 않으며 남의 허물이나 흉보는 것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자기 확신과 자기 고집에 빠져 자기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갇혀서 상대방을 힘들고 답답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지식, 사랑이 없는 봉사, 사랑이 없는 섬김은 모두가 자기의 열등감을 표출하려는 자기기만임을 알고 우리 내면을 돌아보아야 한다.

최원호 서울한영대학교 겸임교수, <열등감, 예수를 만나다> 저자